1945년 11월 13일 설치된 미군정 군사담당기구인 국방사령부 내에는 공군 창설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 이에 광복 이전부터 항공계에 종사해 왔던 항공인들이 뜻을 모아 1946년 8월 10일 한국항공건설협회(韓國航空建設協會)를 조직하고, 미 군정청과 교섭하였다. 1946년 9월 김정렬과 최용덕을 비롯한 항공계 지도자들은 먼저 유동열 통위부장을 방문하여 공군 창설을 위해 교섭하는 한편, 통위부 정보국장 대리로 있던 김영환(金英煥) 부위(副尉)에게는 미 고문관 프라이스 대령을 만나 공군 창설을 위한 접촉을 시도하도록 하였다. 이에 미군정 당국도 장차 조선경비대가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연락기나 경비행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김정렬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

 

미 군정당국은 항공계의 지도급 인사들은 과거 일본군에 종사하였거나, 중국 공군 출신임으로 미국식 훈련을 위해 먼저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 결과 1948년 4월 1일 최용덕(崔用德) · 김정렬(金貞烈) · 박범집(朴範集) · 이근석(李根晳) · 장덕창(張德昌) · 김영환(金英煥) · 이영무(李英茂) 등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1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후 다시 5월 1일 육사 6기생과 함께 입교하여 2주간의 훈련을 받고 5월 14일 소위로 임관하였다.

 

최용덕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

 

공군 창설요원들은 1948년 5월 5일 경기도 고양군 수색에 위치한 조선경비대 제1여단사령부 내에 통위부 직할부대로 항공부대를 창설하였다. 항공부대 사령관에는 육군 소령 백인엽(白仁燁)이 보직되었다. 같은 해 6월 23일 항공부대는 통위부 직할에서 조선경비대 총사령부로 예속 변경되었다.

 

박범집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

 

항공부대에는 이미 조선경비대 장교로 임관하였던 일본항공사관학교 출신인 박원석(朴元錫)과 장지량(張志良) 소위가 전속되어 근무하고 있었고, 항공 출신 하사관도 추가로 보충되었다. 이로써 항공부대는 장교 9명과 일본군․중국군 출신, 그리고 민간항공 출신자 105명을 주축으로 육군항공기지사령부를 확장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장덕창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

 

항공부대가 통위부에서 조선경비대 총사령부에 예속되고 나서 항공병 모병이 실시되었다. 항공부대 사령부는 조선경비대 내의 항공계 출신 장병을 전입시키면서 사회의 항공분야 경력자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105명을 선발하였다. 1948년 7월 12일에는 이들 가운데 78명이 선발되어 육군보병학교에서 기본군사 훈련을 받은 후 항공병 제1기생으로 정식 입대하였다.

 

이근석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

 

항공병력이 확충되자 1948년 7월 27일 항공부대는 부대 명칭을 항공기지부대(航空基地部隊)로 개칭하였다. 부대도 경기도 수색에서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로 이동하였다. 사령관에는 최용덕 중위, 부사령관에는 이영무 중위가 보직되었다. 다음은 항공기지부대 편성을 나타내고 있다.

 

항공지기부대 편성 (1948. 7. 9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사령관 최용덕 대위는 1948년 8월 16일부로 국방부 차관으로 전임되었고, 항공총감(航空總監)으로 있던 이영무(李英茂) 대위가 제3대 사령관이 되었다. 1948년 9월 1일 항공기지부대가 김포비행장으로 이동하면서 김포기지는 한국 공군의 발상지가 되었다.

 

김영환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

 

항공기지부대는 1948년 9월 8일 미군으로부터 L-4연락기 10대를 인수받아, 9월 13일 여의도기지(汝矣島基地)에서 편대비행을 실시하였고, 9월 15일에는 서울 광화문 상공에서 L-4 연락기 10대의 전시비행(展示飛行)을 실시하였다.

 

이영무 (항공부대 창설요원 7명)

 

1948년 9월 13일 항공기지부대는 연락기 10대를 보유하게 됨에 따라 육군항공사령부로 명칭을 바꾸고, 기구개편을 단행하였다. 사령부 예하에 비행부대(여의도 기지)와 항공기지부대(김포기지)를 새로 창설하고 비행부대장에 김정렬 대위, 항공기지부대장에 장덕창 대위를 임명하였다. 비행부대는 2개 소대로 편성하고 제1소대장에 장성환 소위, 제2소대장에 김신 소위를 임명하였다.

비행부대는 ‘여순 10․19사건’이 일어나자, 부대장인 김정렬 대위 등 19명이 L-4 10대를 비행하여 10여일 동안 공중지원작전을 실시하였다. 1948년 말 항공부대는 L-5형 경비행기 10대를 추가로 도입하여 후방지역의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하였는데, 주로 영남지구, 제주도, 옹진반도, 개성, 송악산 지구 등 38도분계선과 공비출몰지역에서 관측․통신․연락임무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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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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