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영어학교(MLS : Military Language School)는 경비대 창설을 앞두고 미 군정청이 군 간부요원을 확보하고,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학교였다. 미군정청의 군사담당 기구의 책임자인 국방사령부의 초대 부장 쉬크(Lawrence E. Schick) 준장은 경비대를 창설하기에 앞서 언어 장벽을 해결하기 위해 영어를 가르칠 학교 설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5년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의 감리교신학교(監理敎神學校)에 설치된 것이 바로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이다.

 

군사영어학교: 군사영어학교는 서대문구 냉천동에 소재한 감리교 신학교에 위치했다가 1946년 2월 27일 태릉의 현 육군사관학교 자리인 국방경비대 제1연대의 일부 병사로 이전하였다.

 

군사영어학교의 모집은 한국군의 인재를 육성하는 최초의 교육기관으로서 군에서 필요한 인원을 모병하였다. 군사영어학교는 한국인에게 일반 영어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가르쳐 창군에 필요한 장교와 미군지휘관의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군사영어학교의 입교 자격은 과거 군사경력을 지닌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 장교 및 준사관 중에서 중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니고, 영어에 대해 약간의지식을 구비한 자를 선발하였다. 최초 계획은 각 출신별로 20명을 선발하여 총 60명을 입교시키려고 하였으나, 좌익계 군사단체인 국군준비대와 학병동맹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반발하고, 한국광복군은 법통을 고집하여 응시 자체를 기피했기 때문에 추천을 의뢰 받은 중국군 대좌 출신 조개옥(趙介玉)은 이성가(李成佳)와 유해준(兪海濬) 등 2명만을 추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만주군출신의 원용덕과 일본군 출신의 이응준이 대부분을 추천할 수밖에 없어 출신 간에 균형이 유지되지 못하였다. 특히 미 군정하 ‘경비대창설계획’인 뱀부계획(Bamboo Plan)에 의해 경비대 창설이 진행되어 장교소요가 급증하게 되자, 최초 계획과는 달리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될 때에는 입교생이 200명에 이르렀다.

개교 당시 군사영어학교의 교장은 그린(Green) 중령이 임명되었는데, 리스(L. W. Reese) 소령이 그를 보좌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만주군 중좌 출신의 원용덕이 부교장으로서 보좌관 역할을 하였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2월 27일 교사(校舍)를 태릉(泰陵)에 있는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 제1연대의 서쪽 건물로 이동하였으나, 그해 4월 30일 폐교되었다. 학교가 폐교되자 임관하지 못한 학생들은 경비사관학교(警備士官學校) 제1기로 편입되어 임관하였다.

군사영어학교에서는 영어회화 수준을 참작하여 A~D 4개 등급으로 편성된 학급을 운영하였다. 교육과목은 군사영어, 한국사, 자동차 교육, 소총 분해 등이 있었고, 교재는 미국의 초등 영어교과서를 사용하였다. 학생들은 영내생활을 하였으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루 8시간의 교육을 그리고 토요일에는 4시간 동안 시험을 치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여 임관한 자는 200명의 입교자 중 110명이었다. 이는 미 · 소의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좌 · 우익간의 충돌 속에 발생한 탈락자, 재학 중 신분이 불분명한 자에 대한 퇴교자, 그리고 졸업 후 임관을 포기하고 군정청 관리로 진로를 바꾼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영어학교 수료자는 원칙적으로 참위(參尉)로 임관했다. 그러나 예외로 창군 주역인 이응준(李應俊)은 정령(正領), 군사영어학교의 부교장으로 있던 원용덕(元容德)은 참령(參領), 군번 1~5번 임관자인 이형근(李亨根) · 채병덕(蔡秉德) · 유재흥(劉載興) · 장석륜(張錫倫) · 정일권(丁一權)은 정위(正尉)로 임관하였다.

중국군 참령 출신 이성가(李成佳)와 연대창설요원으로 부임한 백선엽(白善燁) · 김백일(金白一) · 최남근(崔楠根)은 교육을 받지 않은 채, 곧 바로 부위(副尉)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연대 사병으로 입대하였다가 자격과 능력을 인정받아 임관한 자로는 오덕준(吳德俊), 박진경(朴珍景), 송요찬(宋堯讚), 함병선(咸炳善), 유흥수(劉興守) 등이 있었다.

이들 임관자들의 연령은 23~30세가 97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최고령자로는 대령으로 임관한 이응준이 56세, 대위로 임관한 장석륜이 54세였고, 최연소자로는 소위로 임관한 정래혁(丁來赫)과 오일균(吳一均)이 20세였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 이전에는 건군의 주역으로 활동하였고,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는 연대장급 이상의 고급 지휘관 및 참모로서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며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 결과 군사영어학교의 출신자들은 준장(准將)으로 추서(追敍)된 5명의 장군을 포함하여 모두 78명이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그 중 대장(大將)까지 오른 분으로는 이형근, 정일권, 장창국(張昌國), 민기식(閔機植), 김종오(金鍾五), 김계원(金桂元), 백선엽, 김용배(金容培) 등 8명이고, 중장(中將)에는 양국진(楊國鎭), 최경록(崔慶祿), 강문봉(姜文奉), 박병권(朴炳權), 백인엽(白仁燁), 김종갑(金鍾甲), 함병선, 정래혁, 원용덕, 최영희(崔榮喜), 이한림(李翰林), 민병권(閔丙權), 김상복(金相福), 장도영(張都暎), 김일환(金一煥), 최창언(崔昌彦), 송요찬, 강영훈(姜英勳), 박경원(朴璟遠), 이응준 등 20명이다. 육군의 정상인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분으로는 이형근, 채병덕(蔡炳德), 정일권, 최경록, 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최영희, 백선엽, 김용배, 장도영, 송요찬, 이응준 등 13명이다. 합동참모의장에는 이형근, 정일권, 유재흥(劉載興),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 장창국 등 7명이다. 국방장관을 역임한 분으로는 유재흥, 장도영, 박병권, 최영
희, 정래혁 등이 있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27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의 태릉으로 이전하여 60여명을 교육하고 있던 중 4월 30일 폐교되어 20여명은 소위로 임관되었고, 40여명은 5월 1일부로 명칭을 바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國防警備學校)의 제1기생으로 입교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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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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