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먼저 전문적인 유격대를 양성하기 위해 제766보병연대를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 1949년 4월 함경북도 회령에 유격대원 전문양성 기관으로 통상 제766부대라 하며, 대외적으로는 제3군관학교라 했다. 부대장(학교장)은 김일성과 같은 빨찌산 출신인 오진우(吳振宇)을 임명하였고, 참모장 겸 군사 부교장은 강동정치 학원의 군사 부원장이며 같은 빨찌산 출신인 서철(徐哲) 소좌를 임명하였다.

부대 창설 당시는 강동정치학원 출신 53명과 민청 소속 학생 100여명으로 약 200명에 불과한 대원이었으나, 같은 해 5월 말경은 중국으로부터 중공군 소속이었던 1,000여명의 병력이 도착하였고, 7월에 북한군 정규군 2개 대대 300여명이 전속되어 왔는데 이들 양개 대대는 1949년 5월에 남한에서 월북한 표무원과 강태무가 인솔하는 대대였다. 그리고 연말까지 추가로 1,000여명의 중공군 소속 병력 및 포병 병력이 도착하였고, 이 때 부대의 편성은 3개 보병대대와 포병대대, 통신대대, 그리고 월북한 강․표 대대로 구성되어, 제766부대의 총 병력은 약 3,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950년 3월 말경 함북 유선으로 이동하여 훈련하였고 같은 해 5월 13일에는 원산 호도반도로 이동하여 상륙전 훈련을 1개월 전 실시 후 같은 해 6월 21일 수십 대의 어선에 분승하여 원산항을 출항, 6월 24일 속초(束草)로 와서 속초 부두에서 정박 대기하다가 같은 날 오후 늦게 다시 출항하여 6월 25일 02:00에서 03:00시경 동해안의 주문진 앞바다를 지나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하여 아군 후방을 위협하는 남침 대열에 참가하게 된다. 상륙전에 참가하지 않은 부대는 양양지역에서 6월 25일 이전에 38선을 넘어 상륙 예상지역에 도착, 상륙부대의 상륙을 엄호하였다.

다음으로 북한군은 제12모터싸이클 정찰연대(일명 제603모터찌크 연대)를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 1949년 8월 중국으로부터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전투 경험을 가진 약 2,000명을 병력을 기간으로 1950년 4월 청진에서 창설된 부대이다. 54대의 모터찌크와 각각 16문의 45㎜ 대전차포와 120㎜ 박격포로 장비된 총 병력 3,500명에 달하는 북한군 유일의 기동화 된 독립 연대이다.

1950년 5월 23일 김일성이 이 부대를 방문하여, “모터찌크는 추격전과 시가전에 큰 위력을 나타냈습니다. (중략) 동무들은 지난날에 중국 혁명을 위하여 잘 싸웠다면 이제는 조선혁명을 위하여 잘 싸워야 합니다”라고 격려한 바 있을 만큼 김일성이 비중을 두는 기동성 있는 부대이다. 이 모터찌크는 오토바이 측면에 1인용 보조좌석을 부착하고 그 곳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기동하면서 기관총사격이 가능한 장비로, 소련군이 제2차대전시 추격전과 시가전에 유용하게 사용하던 장비이다.

 

한국군의 곡사포에 비해 사정거리가 배나 되었던 북한군의 122mm 곡사포

 

또한 1949년 중순 북한군은 122㎜ 야포연대를 창설하였다. 1949년 7월 15일 개성(開城) 북방 송악산(松嶽山) 488고지 쟁탈전에서 북한 북한군이 처음으로 122㎜ 야포를 사용하였다. 당시 한국군 제11연대장은 그 위력에 놀라 불발탄을 수거하여 즉각 새로운 병기의 출현을 보고하였으나 육본에서도 122㎜ 야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122㎜ 야포는 소련군의 신형장비로 1949년 3월말 제1군관학교 포병부에 보내 교육하도록 하였다. 122㎜ 포를 인수한 군관학교에서는 1949년 4월 22일 김일성이 참석한 가운데 실탄사격시범을 실시하였다. 이 시범을 참관한 김일성은 “122㎜ 포는 인민군의 보배다. 이 포야말로 조국과 인민에 최대의 공헌을 할 것이다. 그러니 여러 포병군관동무들은 이 포의 사격술을 잘 배워서 보다 나은 포병이 되기 바란다”는 격려사를 보낼 만큼 122㎜ 야포의 도입은 북한군 포병에게는 최대 성능의 신무기였다.

당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최대구경 포는 105㎜ 포로 사거리가 6,252m인데 비해서 122㎜ 포의 사거리는 배나 되는 11,710m의 장거리 포였다. 122㎜ 야포 연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며 1개 대대는 122㎜ 포 12문으로 장비되어 연대는 총 36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이외에도 새로이 공병연대를 창설하였다. 1949년 3월경 평양 북방 15.6㎞ 지점에 있는 간리에 총 병력 1,000명 수준의 공병연대가 창설되었다. 연대장에는 장인호 대좌가 임명되었고, 연대 예하에는 공병 1개 대대(약 250명), 중(重)도하대대, 경(輕)도하대대, 전기중대, 급수(給水)중대, 자동차수리소, 기계수리소 등이 있었다. 장비는 트럭 20대, 발전기 2대, 항타기 1대, 모터보트 4척, 조립식 주정 몇 십 정 등이 있었고, 불도저나, 덤프트럭도 없는 취약한 공병연대였다.

1950년 4월에 소련으로부터 공병장비 일부가 도착하여 보강되었으나, 경도하장비 1개 세트를 비롯하여 조립식 철주, 발전기, 지뢰탐지기, 폭파기, 유자철조망, 위장망 등 일부가 있었다. 연대는 공병여단으로 증편되었으나 남침시 한강 도하작전이 지연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공병여단의 장비 부족에 있었다. 이외에도 1949년 9월 평양에 방공포연대가 창설되었고78), 1950년 6월초 나남에서 새로운 독립전차연대가 별도로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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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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