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부유한 귀족 케팔로스의 집에서 벌어진다. 좌중에는 플라톤의 형제인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거칠고 흥분하기 잘하는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도 있다. 이 대화에서 플라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묻는다.

“당신은 부(富)로부터 얻는 퇴대의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케팔로스는 대답한다.
“부(富)는 사람들을 관대하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만들어 주므로 그에게는 축복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짓궂은 방식에 따라 정의(正義)라는 말을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느냐고 물음으로써 철학적 전투가 시작된다. 정의보다 어려운 일은 없고 정신의 명료성과 숙련을 시험하거나 훈련하는 데 정의보다 더 가혹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차례차례 제시되는 정의를 논파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누구보다도 성미가 급한 트라시마코스가 고함을 지르며 갑자기 끼어들었다.

“소크라테스, 당신들은 언제까지 어리석은 말싸움을 할 셈인가? 왜 당신들은 바보처럼 서로 발꿈치를 밟고 있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당신은 묻지만 말고 대답도 해야 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반박하는 것을 능사로 삼다니. ……질문은 잘하지만 대답은 못 하는 친구는 얼마든지 있거든.”(《공화국》)

소크라테스는 겁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묻기만 했다. 잠시 동안 논쟁을 하다가 그는 경솔한 트라시마코스로 하여금 정의를 내리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들어보시오.”
노한 소피스트는 말했다.
“나는 힘이 정의이고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선언한다. ……여러 가지 형태의 정부는 각각의 이익에 따라 민주주에 적합한 법, 귀족정치에 적합한 법, 전제정치에 적합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각각의 이익을 위해서 제정한 이 법률을 각 정부는 국민에게 정의(正義)로 제시하고 이 법을 어긴 자를 부정(不正)하다고 처벌한다. ……나는 지금 대규모의 부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전제정치에서 가장 명백히 알 수 있다. 전제정치는 기만과 폭력으로 타인의 재산을 일부가 아니라 전부 빼앗는다. 한 사람이 시민들의 돈을 빼앗고 노예로 삼아도 그를 사기꾼이나 도둑놈이라고 부르지 않고 모두 축복받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부정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부정을 저지를까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정한 일을 당할 것이 두렵기 때문에 비난하는 거야.”(《공화국》)

이 말은 물론 오늘날 다소간 정당한 관련을 갖고 니체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자기가 절름발이이기 때문에 착하다고 생각하는 약자를 나는 정녕 여러 번 비웃었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가방에 가득 찬 정의보다는 한 줌의 권력이 낫다’고 말했을 때, 쉬티르너도 똑같은 사상을 간결히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철학사상 이 사상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고르기아스》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을 것이다. 《고르기아스》에서 소피스트인 칼리클레스는 도덕을 강자의 힘을 약회시키기 위한 약자의 발명품이라고 비난한다.

약자들은 그들의 이익에 따라 칭찬하고 비난도 한다. 그들은 부정직은 부끄럽고 부정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이때 부정직은 이웃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을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 열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평등하기만 하면 더 이상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한 힘을 가진 자가 있다면(초인의 등장), 그는 이쯤은 털어버리고 짓부순 다음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는 자연에 어긋나는 모든 의식·주문·마술·법률을 짓밟아 버릴 것이다. ……참되게 살려는 자는 욕망을 최대한으로 증대시켜야 한다. 그러나 욕망이 최대한도로 커지면 그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모든 갈망을 충족시키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정의이며 고귀함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무능을 숨기고 싶어서 충분한 힘을 가진 자를 비난한다. ……그들은 보다 고상한 천성을 속박하면서, 비겁한 자들이기 때문에 정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주인을 위한 도덕이 아니라 하인을 위한 도덕이며 영웅의 도덕이 아니라 노예의 도덕이다. 인간의 진정한 덕은 용기와 지혜이다.(《고르기아스》)

이 격렬한 비도덕주의는 아테네 외교 정책의 제국주의적 전개와 약소국에 대한 무자비한 조치를 반영하고 있다. 페리클레스는 투키디데스가 초안을 만든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당신의 제국은 국민의 선의보다는 오히려 당신들 자신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같은 역사가는 아테네 사절단이 멜로스를 위협하여 대(對) 스파르타전(戰)에 가담시킨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신들도 정의는 현실적으로는 오직 동등한 힘을 가진 자 사이의 문제임을 알고 있다.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해야만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이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우리는 여기서 윤리의 근본적 문제, 즉 도덕적 행위에 대한 학설의 난점에 부딪힌다.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 힘을 추구할 것인가? 착한 것이 더 좋은가, 강한 것이 더 좋은가?

소크라테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은 이러한 이론적 도전에 어떻게 응전하는가? 처음에는 그는 이 도전에 전혀 응하지 않는다. 정의는 사회 조직에 의존하고 있는 개인간의 관계이며, 따라서 개인적 행위로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일부로서 연구하는 편이 더 좋다고 그는 지적한다.

만일 우리가 정의로운 국가를 묘사할 수 있다면 정의로운 개인을 말하기에 훨씬 유리한 입장에 놓일 것이라고 그는 시사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탈선의 핑계로 인간의 시력검사는 우선 큰 글씨를 읽고 다음에 작은 글씨를 읽는다는 사실을 내세운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적 행위라는 작은 범위보다는 더 큰 범위에서 정의를 분석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속을 필요는 없다. 사실은 플라톤은 두 권의 책을 꿰매놓은 것이고 위에서 말한 논의를 솔기로 이용하고 있다. 그는 개인 도덕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개조의 문제도 검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소매 속에 유토피아를 감추어 두었다가 적당할 때에 내놓을 셈인 것이다. 이 탈선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이고 진가이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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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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