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조각의 단편으로서 전해 내려오는 흉상으로 판단할 때,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못생겼다. 대머리에다가 크고 둥근 얼굴, 깊숙하고 쏘아보는 듯한 눈, 많은 잔치에 참석했다는 역력한 증거인 빨간 납작코 등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의 머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짐꾼의 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면 거친 돌을 동해 이 못생긴 사상가를 아테네의 가장 우수한 청년들의 사랑받는 교사로 만든, 인간적인 자애(慈愛)와 주제넘지 않은 소박함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족적인 플라톤이나 말이 없고 학자적인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소크라테스를 더욱 친숙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2천 3백년의 세월을 사로질러 언제나 구겨진 튜니카(고대 그리스인이 입던 셔츠 같은 옷)를 입고 한가하게 광장을 걸어가며, 소란스러운 정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때마침 걸려든 사람과 긴 이야기를 나누며 청년들과 학자들을 모이게 한 다음 그들은 사원주랑(寺院柱廊)의 그늘진 구석으로 끌고 가서 그들의 용어를 정의하라고 요구하는 그의 어색한 모습을 눈 앞에 보는 듯하다.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그가 유럽 철학을 창조하는 것을 도와준 청년들, 즉 그들은 잡다한 군중이었다. 그 중에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풍자적인 분석을 즐기던 플라톤과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잣집 청년도 있었고, 가난을 개의치 않는 스승의 태도에 반해 이를 종교로 삼았던 안티스테네스 같은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들도 있었다. 또한 그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주인도 노예도 없다고 하며 모든 사람이 소크라테스처럼 태평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를 갈망하는 한두 명의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도 있었다.
오늘날 인간 사회를 뒤흔들고 청년들의 무한한 토론의 재료가 되고 있는 온갖 문제들이 스승과 마찬가지로 토론 없는 삶은 인간답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던 사상가와 변론가(辯論家)의 소집단을 선동했던 것이다. 사회 사상의 모든 학파는 여기에서 그 대표자를 찾을 수 있고 아마도 그 기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스승이 어떻게 생활해 나가는지는 거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일을 하지 않았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이 그들의 식탁을 빛내달라고 초청할 때에 식사를 했다. 모든 면에서 신체적으로 건강이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자들은 그와 동석하는 것을 좋아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아내와 자녀를 소흘히 했으므로 집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크산티페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가족에게 빵보다는 악평을 몰아다 주는 쓸모 없는 게으름뱅이였다. 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에게 지지 않을 만큼 말이 많았으므로 그들은 여러 가지 대화를 했을 것이지만 플라톤이 이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크산티페도 그를 사랑했으며, 남편이 70세가 되어 죽을 때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의 제자들은 이렇게 그를 존경했는가? 아마도 그는 철학자일 뿐 아니라 인간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싸움터에서 엄청난 모험을 해서 알키비아데스의 목숨을 구해 준 일이 있었고, 또한 신사답게 즉 두려워하지도 않고 과도하지도 않게 술을 마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그의 겸손한 지혜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은 없었으며, 오직 지혜를 애구(愛求) 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지혜의 아마추어이지 프로는 아니었다.
델포이 신전의 신탁(神託)은 뛰어난 형안으로 그가 그리스인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선언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는 이 신탁을 그의 철학의 출발점이 된 불가지론(不可知論: 나는 오직 내가 무지하다는 한 가지 일을 알고 있을 뿐이다)의 시인이라고 해석했다. 철학은 회의(懷疑)를 의심할 줄 알 때 시작된다. 이 소중한 신념이 어떻게 확실한 것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은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욕망에 사상에 옷을 입혀 수상한 경로로 이 신념을 탄생시키지나 않았는지 아는 자가 있는가? 정신이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며 검토할 때까지는 진정한 철학은 존재하지 못한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물론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철학자는 있었다. 텔레스나 헤라클레이토스처럼 강한 사람들, 파르케니데스나 엘레아의 제논처럼 예민한 사람들, 피타고라스나 엠페도클레스 같은 예언가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체로 자연철학자(自然哲學者)였다. 그들은 자연(Physis), 또는 외계 사물의 본성(本性), 물질적이며 계량적(計量的)인 세계의 법칙과 구성요소를 탐구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러나 모든 나무나 돌, 심지어 모든 별보다도 철학의 주제로서 무한히 가치있는 것이 있다. 즉 인간의 정신(情神)이다.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그는 억견(臆見)을 폭로하고 확실성을 의심하면서 인간의 영혼을 기웃거렸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정의를 논하면, 는 조용히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당신은 이 추상적인 말로 아주 쉽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거니와, 도대체 그 뜻은 무엇인가? 당신이 말하는 명예 · 덕 · 도덕 · 애국심은 어떠한 뜻을 갖고 있는가? 당신은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 무슨 뜻을 나타내는가? 소크라테스가 즐겨 다룬 문제는 이러한 도덕적 · 심리학적인 문제였다. 정확한 정의와 명석한 사고와 치밀한 분석을 요구하는 소크라테스적 방법 때문에 시달린 사람들 중에는 그가 대답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이전보다도 더 혼란에 빠뜨린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어려운 두 가지 문제, 즉 덕의 의미는 무엇인가? 최선의 국가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매우 분명한 두 가지 대답을 철학에 물려 주었다.
당시의 아테네 청년들에게는 이 문제보다 어 중요한 화제는 없었다. 소피스트들은 이 청년들이 올림푸스의 신(神)들에게 품고 있던 신앙과 사람들이 편재하는 무수한 신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준수해 오던 도덕률을 파괴시켰다. 그들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인제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될 이유는 분명히 없었다. 인간의 마음을 분열시키는 개인주의(個人主義)는 아테네 사람들의 성격을 약회시켰고 결국은 아테네를 엄격한 훈련을 받은 스파르타 사람들의 희생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국가를 볼 때, 오합지졸의 통치, 감정에 치우친 민주주의, 토론회에 의한 통치, 장군의 경솔한 선발과 해임과 처형, 단순한 농민과 상인을 알파벳순으로, 윤번제로 국가의 최고재판소의 구성원으로 뽀는 비선택적 선택보다 더 가소로운 일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테네에 새롭고 자연스러운 도덕을 발달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에게 죽음과 불멸을 준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이었다. 만일 그가 고대의 다신교적(多神敎的) 신앙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해방된 영혼을 갖고 있는 그의 무리들을 사원과 신성한 숲으로 이끌고 가서 선조의 신들에게 다시 제물을 바치라고 명령했다면, 나이 많은 시민들은 그를 찬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은 절망적인 자살적 수단으로 무덤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독자적인 종교적 신앙이 있었다. 그는 유일신(唯一神)을 믿었고 죽음도 그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하리라고 겸손하게 바라고 있었다(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두 명의 아테네 사람을 다룬 볼테르의 이야기를 참조할 것. 그들은 ‘유일신을 말하는 것은 무신론자이다’라고 말한다(《철학사전》 〈소크라테스 항〉)). 그러나 그는 불변의 도덕률이 이와 같이 불확실한 신학(神學)에 근거를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종교적 교리로부터는 완전히 독립된, 무신론자나 경건파(敬虔波)에게도 타당한 도덕 체계를 세울 수 있다면, 신학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더라도 도덕적 결합은 이완되지 않고 변덕스러운 사람들은 공동체의 평화로운 시민으로 만들 것이다.
예컨데 선(善)이 이성적이 것을 의미하고 덕(德)이 지혜를 의미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깨닫고 그들 행동의 먼훗날의 결과를 간파해서 비판과 조정에 의해 그들의 욕망을 자기부정적인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합목적적(合目的的)이고 창조적인 조화를 갖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학식이 있고 말이 많은 사람들도 도덕(무식한 사람에게는 교훈의 반복과 외부적 강제에 의해 심어진다)을 몸에 익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모든 죄악을 오류이고 불완전한 통찰이며 어리석음이 아닐까? 학깅 있는 사람도 무식학 사람돠 마찬가지로 난폭하고 비사회적인 충동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학식 있는 사람은 이러한 충동을 더 잘 통제할 것이고 동물 흉내를 내는 일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통치되고 있는 사회, 즉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개인으로부터 빼앗는 것보다는 오히려 권리 확대에 희애 개인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훨씬 많은 사회에서는 각자의 이익은 사회적인 정직한 행위에 있다. 또한 평화에 질서와 선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직 명료한 통찰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 자체가 혼돈하고 부조리하며, 도움은 주지 않고 다스리기만 하고, 지도는 하지 않고 명령만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국가에서 어떻게 각 개인에게 법을 지키고 전체의 복지를 위해 이기심을 제한하라고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알키비아데스 일파가 능력을 불신하고 지식보다는 수효를 존중하는 국가에 반대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상이 없는 곳에서 혼돈이 지배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군중은 무지 가운데서 서둘러 결정하고는 한가하고 조용할 때에는 후회하기 마련이다. 단순한 수효가 지혜를 대표한다는 것은 불순한 미신이 아닌가? 반대로 오합지졸 같은 군중이 개개의 고립된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고 더 난폭하고 더 잔인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번 두드리면 손을 댈 때까지 계속 울리는 놋쇠단지처럼 장광설을 늘어놓는'(플라톤 《프로타고라스》) 웅변가들의 통치를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확실히 국가 경영은 최대한의 이성을 요구하는 일이며 최고 인물들의 자유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영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회가 구제되고 강해질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이 모든 비판에 침묵을 요구하는 것 같고 부유하고 학식 있는 소수자들이 혁명을 획책했을 때, 이 귀족적인 복음에 대해 아테네의 인기 있는 정당이 보인 반응을 상상해 보라. 그의 아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 아버지가 믿는 신들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면전에서 이 신들을 비웃은 민주주주의 지도자 아뉴토스의 감정을 생각해 보라. 비사회적인 이성에 의해 낡은 덕이 외관상으로만 교체될 때 일어나는 이러한 결과를 아리스토파네스는 정확히 예언하지 않았던가?(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B.C. 423)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사고상점(思考商店)을 조롱한다. 이 상점에서 사람들은 아무리 옳지 못할 땡라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기술을 배운다는 것이다. 필리피데스는 아버지가 늘 자기를 때렸고 모든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때린다. 이 풍자는 선의의 풍자인 듯하다. 우리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와 자주 자리를 같이 했으며 그들은 민주주의를 조소하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였고, 플라톤은 《구름》을 디오니시오스에게 추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연극은 소크라테스의 재판보다 24년이나 앞서 상연되었으므로 이 철학자의 비극적 최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혁명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혁명을 위해서, 또는 혁명에 반대하며 최후까지 분전했다. 민주주의가 승리했을 때,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는평화주의자이기는 했지만 혁명파의 지적 영도자였다. 그는 미움을 받고 있는 귀족주의적 철학의 근원이었다. 그는 청년들을 토론에 열중시켜서 타락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 편이 나으리라고 아뉴토스와 멜레토스는 말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온 세계가 다 알고 있다. 플라톤이 시보다도 아름다운 산문으로 이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만일 전설이 아니라면) 간결하면서도 용감한 《변명》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이 《변명》에서 철학의 최초 순교자는 자유로운 사상의 권리와 필요성을 선언하고 국가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고 항상 경멸해 온 군중에게 자비를 애걸하는 것을 거절했다. 군중은 그를 용서할 권한을 갖고 있었으나 그는 애소(哀訴)는 떳떳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판관들은 그를 방면하려고 했으나 노한 군중이 그의 사형을 투표로 결정해버린 것은 그의 이론의 기묘한 확인이었다. 그는 신들을 부정하지 않았던가? 불행하게도 그는 아직 배울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너무 일찍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셔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의 친구들은 감옥으로 와서 그에게 쉬운 탈옥 방법을 제시했다. 친구들은 그와 자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관리들을 매수했던 것이다. 그는 거절했다. 그때 그는 70세였다.(B.C. 399) 그는 지금이 바로 죽을 때이며 다시는 이와 같이 훌륭하게 죽을 때를 맞이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슬픔에 잠긴 친구들에게 말했다.
“기운을 내게. 자네들은 오직 내 육신을 묻으려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플라톤은 세계 문학 중 가장 감동적인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일어나 크리톤과 함께 욕실로 갔다. 크리톤은 우리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큰 슬픔에 대해 말하거나 이를 생각하며 기다렸다. 그는 아버지와 같았는데 이제 우리는 그를 여의고 여생을 고아처럼 지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헤어질 때가 가까워졌다. 그가 안으로 들어간 다음 상당한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그는 밖으로 나와 다시 우리와 함께 앉았다. …그러나 말은 별로 하지 않았다. 곧 간수가 …들어와 그의 옆에 서서 말했다.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이 지금까지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너그럽고 가장 훌륭한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상부의 명령으로 독약을 마시라고 명령할 때, 나에게 화를 내고 저주를 합니다만, 당신을 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리라고 정녕 확신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죄는 나에게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편안한 마음으로 운명의 짐을 가볍게 지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내가 온 용건을 아실테죠.”
이렇게 말하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서 나갔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도 잘 있게. 자네가 하라는 대로 하겠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내가 감옥에 들어온 후, 그는 언제나 나를 보러 왔네. 그리고 보시다시피 지금도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네. 따라서 크리톤, 우리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네. 독약이 준비되었거든 잔을 갖고 오라고 하게. 아직 준비되지 않았거든 담당자에게 준비하라고 하게.”
크리톤은 말했다.
“그러나 해는 아직도 언덕 위에 있고 밤늦게야 약을 마신 사람도 많다네. 이 사람들은 통고받고 난 다음에도 먹고 마시는 증 감각적 즐거움을 즐겼다네. 서두르지 말게. 아직 시간은 있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크리톤, 자네가 방금 말한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은 당연하네. 그들은 잠시라도 죽음을 지연시키면 그만큼 이롭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나 나는 독약을 조금 늦게 마신다고 해서 소득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일세. 내가 이미 죽은 목숨을 아끼고 아쉬워한다면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일세. 제발 내가 하라는 대로 해주고 내 말을 거절하지 말게.”
크리톤은 이 말을 듣고 하인에게 신호했다. 하인은 안으로 들어가 잠시 있다가 독이 든 잔을 가진 간수와 함께 돌아왔다.
“여보게, 자네는 이 일에 밝을 테니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주게.”
간수는 대답했다.
“다리가 무거워질때까지 걸으십시오. 다음에는 누우십시오. 그러면 독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잔을 소크라테스에게 건네주었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태평하고 가장 온화한 태도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안색이 변하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일도 없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로 눈을 크게 뜨고 간수를 바라보며 잔을 받아들고 말했다.
“이 잔에 든 것으로 신에게 헌주(獻酒) 하고 싶은데 어떨까? 괜찮을까? 안 될까?”
간수는 대답했다.
“소크라테스, 우리는 꼭 필요한 만큼만 준비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알았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나의 여행이 편안하도록 기도드릴 수는 있을 것이고 기도드리지 않으면 안 되지. 이것이 나의 기도이니 내 뜻을 받아주소서.”
이렇게 말하고 그는 잔을 입술에 대고 아주 태연하고 쾌활하게 독을 마셨다.
이때까지는 우리들은 대부분 간신히 슬픔을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독을 마시기 시작하고 또 독약을 다 마신 것을 보자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더 참을 수 없어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가리고 나 자신을 위해 울었다. 확실히 나는 소크라테스를 생각하고 운 것이 아니라 이러한 벗을 잃게 된 나 자신의 불행을 생각하고 울었다. 내가 처음으로 울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톤은 눈물을 억제할 수 없으니까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이 순간, 지금까지 줄곧 눈물을 흘리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곡은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만이 침착했다. 그는 말했다.
“무슨 괴상한 울음소린가? 나는 이런 꼴을 보일까 드려워 부녀자들을 내보냈던 거야.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네. 제발 조용히 참도록 하게.”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눈물을 참았다. 소크라테스는 걸어다니다가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간수의 지시대로 반듯이 누웠다. 그에게 독을 준 간수는 가끔 그의 발과 다리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간수는 그의 발을 세게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없다’고 대답했다. 다음에 간수는 다리를 눌러 보고 차츰 위쪽으로 손을 옮기다가 소크라테스의 몸이 차가워지고 굳어진다고 우리들에게 눈짓했다. 소크라테스도 이것을 느끼고 말했다.
“독이 심장에 미치면 마지막일세.”
하반신이 뻣뻣해지자, 그는 얼굴을 덮었던 것(가는 몸을 덮고 있었다)을 젖히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크리톤, 나는 이스클레오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자네가 잊지 않고 이 빚을 갚아주겠나?”
크리톤은 말했다.
“빚은 꼭 갚겠네. 다른 말은 없나?”
이 물음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1,2분 동안은 몸을 꿈틀거렸다. 그러자 간수가 몸을 가렸던 것을 벗겨냈다. 그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고 크리톤이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게 했다.
이것이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올바르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의 벗의 최후였다. (플라톤 《파이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