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정치 간부 양성기관으로 평양학원을 발족시킨 후 5개월여만인 1946년 7월 8일 ‘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강서군(江西郡) 성암면(城岩面) 대안리(大安里) 지역의 대안전기공장 합숙시설에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하였다. 이는 평양학원 군사반과 보안간부훈련소를 통합하여 군 초급간부(소대장) 양성기관으로 설립된 것이었다.29)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는 보병, 포병, 통신병, 공병을 비롯한 여러 병종의 지휘관들을 전문적으로 키우기 위하여 창설하였으며 북한 정규군 건설에 속도를 더해 주었다.
여기에는 김일성의 직계인 항일유격대 출신 손종준, 최병열, 김준동, 박승철 등, 중국 연안파 출신 박효삼(朴孝三), 김강 등 30여명, 그리고 평양학원 단기과정 출신 10여명이 주축이 되었다. 이어 8월 10일에는 김일성․김책․안길․강건(姜健) · 최용건 · 최충국(崔忠國) · 박영순(朴英順) · 오백룡(吳白龍) · 무정 · 박일우(朴一禹) · 주연(朱然) 등이 회합하여 군 창건 준비를 결정하였다. 이 학교의 정치부 교장과 교무부장 등 핵심적인 자리에 모두 항일유격대 출신을 임명하였다. 김일성에 의하면, “정규무력 건설사업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항일무장투쟁에서 단련된 동무들을 우선 무력건설 부문에 많이 보냈다”고 하였다.
이때 학교 편성은 학교장 아래 군사 및 정치 부교장 그리고 전술, 포병, 사격, 통신의 4개 학부를 두었다. 학교장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정치 부교장은 김웅, 군사부교장은 최용진이 보임되었다. 전술학부장에는 박성철(소련군 출신), 포병학부장은 전학준(소련군 출신), 사격학부장은 박길남(소련군 출신), 통신학부장은 이종인(소련군 출신) 등이 각각 임명되었고 그외 지휘관으로 이두익, 최병열, 오찬복 등이 임명되었다. 소련군사고문은 스베레주크 소좌였다. 이때까지는 보병중대, 포병중대, 통신중대로 구분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각 중대장들은 전부 소련군 출신 한인이었다.
이 학교의 정원은 500명이었고 수업기한은 12개월이었다. 입학자격은 각급 인민위원회의 추천을 받은 신체 건강한 30세 이하의 자로서 중등학교 1학년 수료 이상의 학력으로 제한하였다. 학생모집은 무정, 최용건, 김책, 김웅, 장종식 등 5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맡았다. 학과 공부는 7월 20일 시작되었다. 교과과정은 소련 국방성 총정치국의 지시에 따라 25군 정치부가 작성했고 군사회의가 승인했으며 교원은 소련군사령부 소속인원 가운데 초빙하였다.
중앙보안간부학교는 스티코프 대장의 구상대로 설립된 것이었다. 1946년 6월 12일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스티코프 대장은 스탈린에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활동을 결산 보고하며, 향후 소련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위한 결정 초안을 제출하였다. 그 가운데 9항은 향후 창군작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9항 연해주의 북한인 부대설립 제안을 채택할 것. 철도경비를 위한 철도경비여단, 만주와의 국경경비를 위한 국경경비사단, 군 간부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500명), 철도경비여단, 국경경비사단과 군관학교의 무장에 필요한 양의 무기를 북조선 인민위원회에게 판매할 것” 등이었다. 중앙보안간부학교는 스티코프가 계획했던 원안대로 개교한 것이었다.
이 무렵 1946년 7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로 스탈린의 소환을 받았다. 이 회담기록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지만, 당시 통역으로 배석한 샤브신 서울부총영사는 회담의 요지와 분위기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북한지도부를 압도하는 스탈린의 절대 카리스마와 특유의 화법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샤브신의 기록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소련군이 얼마안가 조선에서 철수할 것이며 그 유지가 곤란하다고 스탈린이 지적하자, 북한대표들은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앞으로 도와주게 됩니까?”라고 크게 우려 섞인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흡족한 표정으로 “배워야죠. 러시아에 배우러 와도 좋소. 당신들이 더 많이 배우지 않으면 상어 밥이 될 수 있소”라고 하였다. (중략)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조선 공산당 관련문제이다. 스탈린은 질문을 주로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는 말을 아꼈으나 그 한마디가 천금과도 같은 무게를 지녔다. 당시 반드시 준수해야 할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북한동지들은 특히 간부 양성, 신문과 잡지 발행, 의료분야에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묵묵히 집무실을 왔다 갔다가 일순간 멈칫하더니 “당신들에게는 이에 필요한 모든 토대가 있지 않소”라고 말했다. 그 토대라는 것이 바로 소련을 염두에 둔 말임을 다들 알고 있었다. 북한동지의 당 행동강령이 없다는 지적에 스탈린은 “도와주겠소”라고 말했다 (중략) 남한 정세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스탈린은 “미국인들이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싸움을 걸어오는 한, 말로 안될경우 힘으로라도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과연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 또한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누구 한사람 되물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샤브신은 전했다. (중략) 스탈린은 “조선공산당이 스스로 사회민주당 내지 노동당으로 선언하고 이에 상응한 과제를 제지해도 안될 바 없을 것 같은데”라고 운을 뗐다. 북한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다룰 준비가 채 되지 않은 듯,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민들에게서 조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내뱉듯 “인민은 무슨, 인민이야 흙이나 파는 거고, 결정은 우리가 내려야 하오”라고 했다.
요컨대, 스탈린은 북한지도부에게 소련군 철수 후에도 상어 밥이 되지 않으려면 소련을 토대로 열심히 소련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회담의 분위기도 시사하는바 적지 않다. 스탈린은 말수가 적고 주로 듣는 입장을 취하나, 그가 가끔씩 던지는 한마디는 당시로선 정곡을 찌르며 되물어 확인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지
령이었다.
위와 같은 샤브신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중앙보안간부학교는 스티코프가 계획하고 스탈린이 승인함으로써 구체화된 것이었다. 이 학교는 창설 후 4개월간은 이 곳에 보직된 교관들에 대한 교관 교육을 먼저 실시하고, 교육훈련 준비가 완료된 1946년 10월 22일 보안간부 제2기생 300명을 입교시켰는데, 이들은 각 지방의 보안대 및 인민위원회의 요원 중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엄선한 청년들로서 투철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제1기생의 학생은 3개 중대로 편성하였는데 제1중대는 보병중대, 제2중대는 포병중대로 각각 120명으로 구성되었고, 제3중대는 60명으로 구성한 통신중대였다.
각 중대의 중․소대장은 소련군 출신 한인들이었는데 교관도 겸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실시한 교육훈련 중 전술훈련은 소총소대로부터 연대에 이르기까지 실시되었는데 높은 제대의 전술훈련은 소련 고문관의 지도를 받아 소련군 출신 교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제1기생의 교육기간은 1년으로 1947년 10월 26일 졸업하였는데 졸업시 대부분 본교의 교관 및 소대장(일부 우수자는 중대장)으로 잔류, 보직되었다.
1947년 5월 27일 북한군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 장병에게 일제히 계급장 수여식이 있은 후 이어서 인민집단군이 편성되어 군 체제로 개편되자, 동학교의 간부들은 인민집단군 사령부의 각 기관장으로 보직되고 그 후임으로는 제1기생 출신들이 소대장, 중대장, 교관 등에 임명되었다. 제1기생이 배출된 후, 동학교의 편제는 종합군관학교의 규모로 확장되어 위생중대, 경리중대, 통신중대가 각각 증편되었다.
1948년 12월 초순경, 규모가 확장되자 동학교는 해방 전 일본군 99부대 자리인 평양 사동으로 이전하였다. 중앙보안간부학교가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정식으로 제1군관학교로 개칭되었는데 이미 이때는 북한군 창설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후였다.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제1군관학교) 편성
당시 확대된 편제를 보면 정치부, 후방부, 군사부, 포병부를 두고 동학교에는 소련군 고문관들이 배치되어 총 고문관 1명, 정치 고문관 1명, 보병 고문관 1명, 포병 고문관 1명, 지휘관 고문관 1명, 전술 고문관 1명, 도합 6명이 동학교 전반을 운영담당하고 있었다.
훈련과정은 소대, 중대, 대대와 연대 훈련에 이르는 전술학을 교육하고 있었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군관학교의 편제로 개편되면서 북한군에 필요한 각종 병과를 증설한 종합군관학교로서 보병과를 중심으로 포병, 공병, 중기병, 통신, 경리, 군의, 군악병과까지 양성하였다.
특히 포병부에서는 1949년 3월경에 소련제 122㎜ 포가 도입된 후부터는 본격적인 포술훈련이 실시되었다. 군관학교 포병시범훈련은 1949년 4월 22일에 실시되었는데 동 시범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각 상(장관)들과 소련고문관들이 참관한가운데 소련제 122㎜ 포 시범사격이 실시되었다.
이 때 참관하던 김일성이 그들의 사격술을 격찬하면서 “이 122㎜ 포는 우리 인민군 사상 처음 쏘는 포다. 이 포야말로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크게 공헌할 것이다. 그러니 여러 포병 군관 동무들은 이 포의 사격술을 잘 배워서 보다 나
은 포병군관이 되기 바란다”라는 격려사까지 아끼지 않았다. 소련고문관들과 각상들도 그들의 사격술에 만족의 뜻을 표하면서 격려하였다.
이러한 시범사격은 비단 포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병과별로 졸업기를 앞두고 실시되어 그들의 실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제1군관학교는 약 2년이라는 기간 내에 양적으로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충실하게 성장되었다. 이 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이 북한군 확장시 주요 간부로 보직되었음은 물론이고 남침시 북한군 장교의 대부분이 이 학교 졸업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