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그〕 Πέτρος
〔라〕 Petrus
〔영〕 Peter

예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성인. 초대 교황. 축일은 6월 29일.

 

 

Ⅰ. 이름과 초기 생애

〔이름〕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Σίμων)이다(사도 15,14 ; 2베드 1,1). 이는 그가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실하게 입증된다. 신약성서에서 시몬은 약 50번 정도 나타나는 순수한 그리스식 이름인데, 이는 히브리식 이름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살던 지역은 그리스 문화가 성행했던 곳으로 두 가지 언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아람어로 ‘게파'(Kepa, 그리스어로는 κηϕας)라고 불리는데 ‘돌’ 혹은 ‘반석’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가 후에 이듬 사도(갈라 2, 9 참조)이며, 모퉁잇돌로서의 지위를 차지할 것을 예고한다. 바오로는 베드로를 보통 게파로 불렀는데(갈라 2, 7만 제외), 게파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전하는 ‘신앙 고백문'(1고린 15, 3-5)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예수가 부활한 후 베드로에게 나타났을 때, 시몬이 게파로 변경되었을 것이다(루가 24, 34 참조). 마태오 복음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마태 16, 16-19). 또 마르코 복음은 베드로가 초기 제자 시절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고 전해 주는데, 다시 말해 즉 마르코 복음 3장 1절까지는 시몬이라고 부르지만, 그 다음부터는 베드로라고 부른다. 그런데 루가 복음에서는 “정말 주님은 부활하여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가 24, 34)라고 함으로써 원초적인 복음 선포 양식을 전해 준다. 시도 행전에서는 베드로의 이름을 몇 군데에서만 시몬이라고 부르고(사도 10, 5. 18. 32), 게파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가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삶 전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때부터 그는 예수를 ‘주님'(κυριος)으로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한 최초의 증인이다(에페 2, 20 ; 묵시 21, 14).

 

〔초기 생애와 성격〕

베드로의 고향은 갈릴래아 지방 베싸이다(Bethsaida)이다(요한 1, 44). 이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였지만, 동시에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함께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요한(요한 1, 42 ; 마태 16, 17에서는 ‘요나’)이고 동생은 안드레아인데, 두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고기를 잡는 어부였다(마르 1, 16-21). 베드로는 결혼한 후에 가파르나움으로 이사한 듯하다(마르 1, 21. 29). 그들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베싸이다와 갈릴래아 호수에 있는 가파르나움 근처에서 어부 생활을 하면서(마태 4, 18-22 ; 루가 5, 1-11),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마르 1, 30).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전도 여행을 다닐 때 고린토 지역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부인과 동행하기도 하였다(1고린 9, 5). 베드로는 헬레니즘 문화를 접하였지만 많은 공부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사도 4, 13). 그렇지만 헬레니즘 문화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그는 독특하면서도 알아듣기 쉬운 자기 고장의 언어를 사용하였다(마르 14, 70 ; 마태 26, 73).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요한 1, 40-42).
신약성서에서 베드로가 직접 한 말이나 그에 관한 내용, 또는 그가 등장하는 일화에 나타난 행동과 반응 등을 통해 베드로의 성격을 수 있는데, 그는 우유부단하고 소신 없이 행동하기도 하였으며(갈라 2, 11-14), 때로는 단호하기도 하고(사도 4, 10 ; 5, 1-10), 경우에 따라서는 무분별하고 경솔하였다(루가 22, 33). 또 성급하고 화를 잘 내기도 하였다(요한 18, 10). 반면에 온유하면서도 확고한 인물로, 그리고 예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명에서 나타나듯이 큰 사랑과 충성을 바칠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요한 21, 15-17).

 

〔부름을 받음〕

메드로가 예수로부터 부름을 받은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와 요한 복음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이 내용을 요점만 간략하게 전해준(마르 1, 16-20 ; 마태 4, 18-22) 반면, 루가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루가 5, 1-11). 루가는 그 상황을 상세하게 전해 줄 뿐만 아니라, 고기 잡는 기적 이야기를 첨가하였다. 루가의 구성은 근본적으로 제자들의 부르심과 배경이 달라, 오히려 요한이 전해 주는 이야기와 유사하다(요한 21, 1-13). 이 유사성은 ‘시몬 베드로’라는 명칭에서 잘 나타나는데, 루가는 이 이중명칭을 이 장면에서만 사용한다는데 반해 요한은 자주 사용하였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당신은 사람들을 낚을 것입니다”(루가 5, 10) 라고 한 언급을 여기서 소개한 것은 그가 사도 행전의 제자들 사이에서 특수한 역할을 할 인물임을 강조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도 그가 제자로 부름받은 내용을 소개하는데(요한 1, 40-42), 여기서 그의 이름이 최초로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뀐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를 먼저 만난 사람은 안드레아 였고, 그가 형을 예수에게로 인도하였다고 전해 준다. 비록 예수가 ‘요한의 아들 시몬’을 ‘게파'(게파는 베드로와 같은 뜻이다)라고 불렀지만, 주님을 먼저 알아본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안드레아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복음서가 전해 주는 내용은, 베드로가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따라나섰고, 예수로부터 온전히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Ⅱ. 복음서에 나타는 위치와 역할

복음서들은 베드로의 역할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보도하나 이 내용들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복음서〕

마르코 복음은 베드로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은 미묘한 입장이다. 그는 베드로의 반대론자로 보이지만, 베드로의 역할에 대한 그의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찬성론자로 나타난다. 마르코는 베드로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도한다(마르 1, 16-18. 29-31. 35-38 ; 3, 14-16 ; 5, 35-37 ; 9, 2-13 ; 13, 3-8, 안드레아도 포함됨 ; 8, 27-30 ; 9, 2-13 ; 10, 28-30 ; 11, 20-21 ; 13, 3-8 ; 14, 27-31. 32-42. 54-72 ; 16, 1-8, 안드레아는 포함되지 않음). 마르코가 건한 베드로 관련 기사들 중에서 역할과 관련된 본문은 그리스도 고백 사건(마르 8, 27-33)이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한  함구령(8, 30)과,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8, 31)을 강조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의 예언을 인정하지 않자 그를 꾸짖는 예수의 말씀(8, 33)에서도 나타난다.  이 부분에서 베드로의 나약한 인간성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는 사탄의 세력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었고, 결국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사탄의 대리자인 동시에 잘못된 열성 분자로 드러난다. 그러나 마르코는 베드로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 께 실패한 제자들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14, 50).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지만, 베드로의 배반만을 특별히 부각한 마르코의 이러한 시각은 분명히 베드로의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다. 당시 마르코의 공동체 안에는 ‘신적 인간'(θειος ανηρ) 그리스도론이 있었다. 이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마르코는 베드로를, 이런 잘못된 그리스도론을 바로잡는 대변인으로 그렸다. 또 마르코는 수난 신학(8, 31)을 강조함으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비난하려는 것보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배제한, 당시의 잘못된 그리스도론을 정립하려 했던 것이다.

예수가 부활 후에 베드로에게 전해 주라는 소식 장면(16, 7)은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에도 병행 구절이 있지만, 오직 마르코 복음에서만 분명하게 베드로가 언급되고 있다. 마르코는 부활한 예수가 가장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났다는 전승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제자들에게, 특히 베드로에게 전해 주어라’라는 의미를 부각시킨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코는 베드로에 대해서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증인들 중의 한 사람이기에, 마르코는 베드로의 특별한 역할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이다.

 

〔마태오 복음서〕

마태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그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지기 시작할 때 예수가 구해 준 이야기(14, 28-31)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건(16, 16-19), 그리고 성전세 납부에 대한 질문(17, 24-27)에서 특별히 다루었다. 이 세 장면들은 모두 마태오의 교회에 대한 기사(마태 16, 21–17, 27)에 속해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부분에는 4복음서에서 오직 두 번 나타나는 ‘교회'(εκκλησια)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며(마태 16, 18 ; 18, 17), 1세기 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마태오의 관점을 통찰하게 해준다.

첫째, 예수가 베드로를 구해주는 장면은, 마르코의 같은 이야기(마르 6, 45-52)를 변경하고 새로운 내용도 첨가하였다. 즉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마르 6, 52)을 생략하고, 그들의 긍정적인 면이 부각되도록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14, 33)라는 고백을 덧붙였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사랑한 제자로 묘사되는 동시에 믿음이 약한 사람으로도 나타난다. 베드로가 나약한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을 때 그에게 높은 지위가 주어졌다. 이는 그가 예수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하나, 이 장면을 그의 수위권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제자들 사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근거는, 예수가 믿음이 약한 베드로를 죽을 위험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이며, 예수가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기 때문에 그의 특별한 지위를 강조한 것이다.

둘째, 마태오는 필립노의 가이사리아 고백 사건에서 마르코의 핵심 이야기(마르 8, 27-30)를 그대로 보존하는 동시에, 두 가지 요소들을 확장 · 편집하였다. 마태오는 마르코와는 달리 베드로의 역할 전환을 강조하였는데, 그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16, 16)이라고 덧붙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고백에 이어서 세 구절(16, 17)에서 베드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마태오에게 이 고백 사건은 극적인 전환점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테오 복음서의 시작부터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1, 1 ; 9, 27 ; 12, 23 ; 15, 22). 심지어 모든 제자들도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비록 이 고백이 마태오 복음서 안에서 시간적으로 앞서지는 않지만, 그 후에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는 교회론을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둘째 구절(16, 18)에서 교회를 내리누르지 못할 죽음의 세력에 대한 표현은 교회의 영원성을 암시한다. 따라서 ‘반석’은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무리 베드로의 믿음이 걸림돌이 될 정도로 부족하더라도, 그는 교회 창립의 반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를 잘 말해준다. 마지막 구절(16, 19)은 그에게 탁월한 위치가 주어졌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준 권세와 제자들에게 준 권세(18, 18)는 똑같지 않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준 권세는 땅에서 맺고 푸는 것뿐만 아니라, 세례로써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베드로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가르침'(16, 12)에 반대되는 규칙들을 제정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스승임을 강조한 것이다.

셋째, 마태오는 마르코의 연속성을 끊고 성전세의 장면을 삽입하였다.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여러분의 선생님은 두 드락메를 바치지 않습니까?”(마태 17, 24) 하고 묻는 장면에서 ‘여러분’이라는 복수 표현은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마태오의 공동체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권위있게 가르쳤음을 보여 주며, 이 권위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16, 18-19)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마태오는 예수의 선교활동에서 시작해서 마태오가 속한 교회의 상황까지 전체적으로 베드로의 탁월한 지위, 곧 수위권을 나타냈다. 그리고 유대교의 음식 문제(15, 15)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질문(18, 21-22)에서와 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을 제기한 인물이 바로 베드로라고 제시하였다.

 

〔루가 복음서〕

루가는 베드로의 긍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이 이용한 자료들을 일부 변경하였다.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9, 18-21)에서 베드로가 수난에 대한 예수의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부분과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은 부분(마르 8, 31-33)을 생략한 것이 그 예이다. 또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성전이 언제 파괴될 것이냐는 질문을 한 데 반해서(마르 13, 3-4), 루가는 이 질문자를 익명인 “그들”로 바꾸었다(21, 7). 이렇게 바꾼 것은 베드로의 생애 중에 비난받을 만한 모든 내용들을 생략 · 변경하려는 루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이런 의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수난 사화이다. 마르코에 나타난 베드로의 배반에 대한 예언(마르 14, 29-31)을 루가는 다르게 표현하였다. 예수는 베드로가 사탄에 의해서 시험받을지라도, 그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기도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는 다시 돌아와서 형제들의 힘이 되어 줄 것이다(22, 31-32). 또 게쎄마니 동산에서 베드로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22, 39-46). 그래서 마르코의 이야기(마르 14, 32-42)와는 달리 그는 예수로부터 꾸중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제자들은 근심하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고 루가는 옹호한다(22, 45). 베드로의 배반 사건도 같은 경우이다. 그의 배반은 축소되었고,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눈여겨보셨다”(22, 61)는 내용이 첨가되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서 과월절 음식을 준비한 이들은 ‘제자들’ 이지만(마르 14, 12-17 ; 마태 26, 17-20). 루가 복음서에서 음식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다(22, 8). 그래서 루가는 사도 행전 앞 부분에서 베드로를 요한과 함께 탁월한 역할을 하는 사도로 묘사했다(사도 3, 1-11 ; 4, 13-22). 또 빈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말을 할 젊은 남자의 말(마르 16, 7)은 생략되고, “정말 주님은 부활하여 시몬에게 나타나셨다”(24, 34)는 정승으로 대치되었다.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고쳐 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만진 사람이 누구요?”라고 질문하자 대답한 사람도 베드로였다(루가 8, 45).

베드로의 특별한 위치는 소명 사화(5, 10)에서도 나타난다. 베드로의 이런 위치는, 그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허락한 예수의 권능에서 유래된다. 베드로의 믿음을 위한 예수의 기도(22, 31-32)는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누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배반을 강조하는 상황도 루가의 이야기(22, 54)와 전혀 다르다. 그래도 예수가 붙잡혀 끌려갈 때 그는 멀찍이 서서 따랐다. 루가는 확실히 제자들의 나약성을 덜 강조한 편인데, 그 예는 베드로의 패배를 완곡하게 표현한 구절(22, 31-32)에서 볼 수 있다. 그를 포함한 제자들 모두 사탄이 제멋대로 다룰 만큼 유혹받기 쉬운 자들이었다. 비록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아!”(마르 8, 33)라는 구절이 루가에는 없지만, “돌아오거든”(22, 32)과 “배반”(22, 34)이란 말은 베드로의 실패를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도라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부활한 예수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24, 13-22)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 모여 있던 열한 제자들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났다고 말하였다(24, 34). 이전의 장면에서 베드로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다(24, 12). 루가는 이 이야기에서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특별히 나타났고, 예수 부활 후의 베드로의 특수한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루가 복음서에 마지막으로 거론되며, 사도 행전에서는 제일 먼저 등장한다. 루가에게 열두 제자단이 역사적 예수와 교회의 역사를 이어 주는 연결 고리라면, 베드로는 이런 연결 고리의 가장 탁월한 위치에 있는 제자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 

요한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 확실히 다른 전승은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에 대한 강조에서 나타나다.(19, 35 ; 21, 24). 요한은 베드로에 대한 특수한 장면들을 전해 준다(13, 6-11 ; 18, 10-11). 또 공관 복음서와 병행 구절들도 있다(1, 42 ; 6, 67-69 ; 13, 36-38 ; 18, 17-18. 25-27). 그런데 요한 복음사가는 베드로에 대해 언급할 때, 에수의 사랑받는 제자와 관계시켜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첫째, 베드로가 사랑받는 제자와 관계없이 나타나는데(요한 1-20장), 여섯 개의 부분이 있다(1, 40-42 ; 6, 67-69 ; 13, 6-11. 36-38 ; 18, 10-11. 17-18. 25-27). 이 중에서 특히 두 번째 기사(6, 67-69)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제가를 대표해서 고백하는 사람은 바로 베드로이나 이 고백이 마르코 복음서에서처럼 결정적이지는 않다. 요한은 베드로를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서에서처럼 책망받거나 친찬받는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 맡지만, 이 고백 때문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둘째, 베드로가 사랑받는 제자와 함께 등장한다(요한 13-20장). 사랑받는 제자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이고, 그의 활동은 극적인 데가 많아서 모든 믿는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세 가지 이야기(13, 23-16 ; 18 15-16 ; 20, 2-10) 중에서 이 제자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13, 23). 그는 예수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베드로도 궁금한 것을 예수께 물어 보도록 그에게 부탁하였고, 예수는 그의 질문에 기꺼이 대답하였다. 이 기사에서 베드로는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요한의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도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예수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 바로 그 제자였음을 알려 준다. 그는 또 십자가 곁에 있던 여인들과 함께 서 있었던 유일한 남자 제자였다(19, 25-27).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그 제자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그 제자는 베드로와 대조되어 칭송을 받는다. 그는 결코 예수를 배반하지도 않았고 수는 때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빈 무덤 사화에서 그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 베드로보다 나중에 들어갔지만 “보고 믿었다”(20, 8). 이는 요한의 공동체에서 부활 신앙을 처음으로 체험한 사람이 바로 그 제자였음을 가리킨다. 그가 티베리아 호수가에서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21, 7)라고 말한 것은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그는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베드로를 제외하고 예수의 사건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즉 사랑받는 제자가 요한의 공동체에서 내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베드로도 예수에 대한 전승을 정확히 전수해 주는 필수불가결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셋째, 베드로가 사랑받는 제자와 함께  나타난다(요한 21장). 부활한 예수의 발현과 고기 잡는 기적 이야기(21, 1-14)는 루가 5장의 이야기와 유사한 것 같지만, 사랑받는 제자와 베드로 사이는 대조적이다. 비록 둘 다 티베리아 호수가에서 낯선 사람을 보았지만, 그 제자가 먼저 주님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앞의 이야기(20, 8)와 요한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베드로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예수와 가장 친밀하고, 그 주위에서 일어난 사건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은 사랑받는 제자이다. 즉 베드로는 예수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는 유일한 제자가 아니고, 다른 제자들 사이에 속한 인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뛰어난 역할을 행사하는 제자로 그려진다. 사랑받는 제자가 누락되고 모든 관심이 베드로에게 집중된 장면(21, 15-17)에세 이루어진 세 번의 질문은 배반 때문에 실추된 베드로의 명예 회복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반해서 사랑받는 제자는 결코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예를 회복할 필요도 없었다.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양 떼를 돌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사랑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베드로의 명예 회복을 입증하는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동체들이 그를 사도적 권위의 상징으로서 받아들였음을 반영한다. 그런데 마태오가 베드로의 법적 권위를 더욱 강조한 데 반해서(마태 16, 16-19), 요한은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양 떼를 사랑해야 한다고(10, 11-18) 강조하였다.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서 바칠 것(21, 19)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이를 입증해 준다. 여기서 베드로와 사랑받는 제자 사이에 유사성과 상이성이 있다. 그 둘은 같은 증인이지만, 서로 다른 방법으로 증언한다. 베드로에게만 목자가 되라는 명령이 주어지며, 기꺼이 순교하라는 명령도 받는다. 그런데 예수는 사랑받는 제자의 증언도 또한 원한다. 하지만 이 제자의 증언은 베드로의 증언보다 낮은 단계가 아니라 다른 방법일 뿐이다. 예수가 원한대로 그 제자는 예수의 사랑을 받으며 오랫동안 살았다. 그래서 요한의 공동체는 베드로에 대한 언급 없이 예수에 대한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고, 동시에 베드로의 중요한 선교와 목자적 역할을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었다. 이를 통해서 요한의 공동체는 제자직의 모범을 확고히 정립하였다. 그 모범 인물이 베드로와 함께 사랑받는 제자라는 것이다.

 

 

 

Ⅲ. 사도 시대의 활동과 위치

〔사도 행전〕

사도 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사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 안에서 지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부활 후 열한 명의 사도단이 언급될 때 제일 먼저 등장한다(1, 13). 가리소 유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마티아 선출 과정을 이끈 사도도 베드로이다(1, 15-26). 뿐만 아니라 그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설교자로,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선교사로 활동하였다(2, 14-36 ; 3, 12-26 ; 4, 8-12 ; 5, 29-32 ; 10, 34-43).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서, 그가 행한 몇몇 기적들은 예수의 기적들과 흡사하다. 때로는 기적적으로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데(5, 17-21 ; 12, 6-11), 무엇보다도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변인이었다(8, 14-25 ; 11, 11-18). 여기서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베드로의 의식 전환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된다(10,18). 초대 교회 안에서 이 사건은 중대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 뒤에 바오로의 첫 번째 전교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추측되는 것은, 베드로와 바오로는 서로 적대 관계가 아니라 다른 선교단의 지도자였다는 점이고, 이 사실은 당시에 매우 복잡한 선교 조직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의 사도들과 베드로의 관계이다. 그리스도교 선교 정책의 중대한 시점에서 베드로와 예루살렘 사도들이 등장한다(8, 14 ; 9, 32 ; 15, 6-7). 이 정책의 총지휘자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첫째,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예루살렘보다 더 넓게 그리스도교 선교 전략을 마련하였다. 즉 베드로는 한 지역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며, 예루살렘 지역 교회의 지도자는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였다. 야고보는 베드로 이후에도 그곳에서 계속 활약하였고, 다른 사도들은 선교 여행이나 혹은 죽음 때문에 더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였다.  따라서 야고보의 권위는 그 지역 교회에만 미쳤다. 둘째, 베드로가 전도로 넓은 지역에 걸쳐서 알려졌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예루살렘 지역 교회의 지도자였다. 아고보가 베드로의 지위를 차지하여 지도자로 활약한 것은 좀 더 후대였다. 베드로는 그 지역 밖의 교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하지 않았다. 셋째,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세계 교회의 지도자였다. 이 교회에서 그의 위치는 후대에 야고보에게 옮겨졌다. 예루살렘 교회 회의(사도 15장)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교회 회으에서 베드로가 첫번째 연설을 하였고(15, 7-11), 마지막 설득 연설은 야고보가 하였기 때문이다(15, 12-31). 여기서 논의된 안건은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15, 1). 이에 대해 사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나 다른 율법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신앙의 자유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르넬리오 개종에 근거한 율법을 추천한 데 반해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이 준수할 몇 가지 규율들을 제시하였다(15, 20). 야고보는 베드로가 제안한 의견을 인정하였고(15, 14), 사도들과 원로들은 야고보의 결정을 따랐다.

사도 행전에서 베드로에 대한 기사가 많지 않은 것은 필자의 편집 의도 때문이었다. 그는 초대 교회 선교의 확장 과정을 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과 베드로를 언급한 뒤(사도 1-15장), 소아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이방인 교회들과 바오로에 대해 보도하였다(사도 16-28장), 즉 필자는 1세기 말의 교회들과 초기 시대 사이의 연결 고리를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도 행전은 예루살렘의 열두 사도로부터 시작해서(2, 37), 베드로와 요한을 특별히 강조한 다음, 사도들과 원로들을 다루고(15, 6. 22 ; 16, 4). 마지막으로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에게서 끝난다(21, 18). 필자의 이런 신학적 전망 속에서, 후반부의 중심 인물인 바오로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나타난다.

 

〔바오로 서간〕

첫째, 바오로는 부활한 예수를 만난 제자들 중 맨 처음 인물이 베드로라고 묘사하였다(1고린 15, 5). 둘째, 바오로가 예수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원천적인 전승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된 바오로가 첫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갈라 1, 18) 예루살렘의 지도자였다. 또 바오로가 두 번째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갈라 2, 1-10). 넷째, 바오로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의 사도로서 활약하였다(갈라 2,8).

갈라디아서: 바오로는 베드로는 주로 ‘게파’라고 불렀고(갈라 1, 18 ; 2, 9 ; 11. 14 ; 1고린 1, 12 ; 3, 22 ; 9, 5; 15, 5), ‘베드로’라는 이름은 한 번만 사용하였다(갈라 2, 7-8). 바오로는 베드로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보지 않았다(1, 6). 오히려 바오로가 적으로 여기던 자들은 베드로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 받으려는 유대인들이었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사도 직위와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베드로를 권위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였다(1, 18). 바오로는 베드로의 과거 행적을 설명하면서, 그를 예루살렘(2, 1-10)과 안티오키아(2, 11-14)에서 자신과 최로로 대립하였던 유대인 중의 한 사람으로 그렸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런 행적은 베드로를 포함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력한 사람들’ (2, 2)과 교제하던 갈라디아 유대인들의 지위를 바오로가 반박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들이 바오로의 사도직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명을 명백히 한 것이다(1, 1, 12 참조).
바오로는 베드로를 세 번 만났다(1, 18 ; 2, 1-10 ; 2, 11). 첫 번째 만남에서 바오로는 베드로에게 나타난 부활한 예수(1고린 15, 5)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두번 째 만남은 바오로 자신의 업적이나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바오로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자신의 정책, 이방인 개종자들을 할례시키지 않겠다는 노선을 승인받지 못한다면, 그는 교리적으로 ‘헛된 일’을 하는 셈이다. 아니면, 오히려 그의 정책에 반대해서 생긴 정책적인 음모를 밝히려고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는 베드로를 포함한 예루살렘의 지위는 인정하였다. 바오로가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를 마지막 만났을 때 그의 인격을 손상시키지 않고, 다만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데 고려해야 할 원칙을 지키지 않고 행동하였다는 사실만 밝힌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그는 베도르가 하나이며 유일한 복음(1, 7 ; 2, 14)에 맞추어 바른길일 걷지 못하였다는 점만을 지적하였다.
또 베드로, 바오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사이에서 권력의 변천 가능성이 보인다. 처음에는 바오로가 베드로를 만나보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머물렀다(1, 18). 그 다음에는 바오로와 베드로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도로 등장한다. 즉 베드로가 할례받음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았듯이 바오로는 할례받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복음을 위임받았다(2, 7-8). 더 나아가서 베드로가 대적할 수 없는 바오로의 우월성이 나타난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 복음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해 면박을 주었다(2, 11-21). 이런 내용을 통해 사도들 사이에 권력의 변천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베드로가 야고보 앞에 거론되다가(1,18-19), 나중에는 야고보가 베드로와 요한보다 앞에 거명된다(2, 9).

고린토 전서: 베드로에 관한 네 개의 기사들(1, 12 ; 3, 22 ; 9, 5 ; 15, 5) 중에 앞의 두 보도 내용은 고린토 내부의 분열 상황이다. 즉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오로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혹은 그리스도파로 갈려져 있었다(1, 22 ; 3, 22). 그런데 고린토에 베드로파가 있었다는 내용만으로 베드로가 고린토에 전도 여행을 왔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전도 활동에 종사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갈라 2, 7. 11) 주로 사마리아(사도 8, 15), 리따(사도 9, 32), 요빠(사도 9, 39), 가이사리아(사도 12, 19)에서 활동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베드로파는 그가 전도하러 갔을 때, 그에 의해서 개종한 신자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혹은 팔레스키나에서 그에 의해서 세례를 받고 고린토로 아주해 간 신자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단지 고린토의 분열 상황, 구체적으로 베드로와 바오로의 분열을 드러낸 것이 결코 아니다.
바오로의 신앙 고백(15, 1-9)은 색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구절 속에는 예수가 부활하여 베드로에게 처음 발현하였다는 전승이 들어 있다고 인정한다(루가 24, 34의 내용과 일치함). 여기에서 바오로는 자신에게 맨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고백하였다. 첫째 부류(베드로, 열두 사도, 500명이 넘는 형제들)는 예수의 지상 생애 동안에 따라다니던 제자들이고, 둘째 부류(야고보, 사도들, 바오로)는 조금 늦게서야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을 나타낸다. 따라서 바오로는 전자를 ‘교회의 창립’을 대표하는 부류로, 후자는 ‘선교의 출발’을 대표하는 부류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혹은 갈라디아인들의 논쟁과 마찬가지로, 권력의 변천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바오로는 야고보가 베드로를 대리하는 인물이고, 사도들은 열두 제자를 대리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바오로가 전적으로 전승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와 다른 사도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치된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그는 고린토 내부에 분열된 당파의 어리석음을 해결하였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사도직 활동에 대한 보오로의 시각이 부정적이거나, 두 사도 사이에 분열이 있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고린토 후서:  이 서간에는 베드로에 대한 특별한 설명은 없지만, 간접적인 증언들이 들어 있다. 바오로는 “누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확신한다면,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듯이 우리도 그렇다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명심하시오”(10, 7), “누가 와서 우리가 선포한 적이 없는 …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도 … 사실 나는 저 거물급 사도들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11, 4-5)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누가’는 베드로를 가리킨다. 또 고린토에서 복음의 혼란을 일으킨 이도 베드로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날카롭고 논리 정연하게 논박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토 전서에 나타는 베드로에 대한 보오로의 중립적인 입장에 비추어 볼 때, 바오로는 베드로를 결코 적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 서간〕

베드로 서간이 베드로의 친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서간의 기원과 특성으로 인해 베드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베드로 전서: 이 서간은 베드로의 활동 영역이 아니었던 소아시아 지역으로도 보내졌었기에, 바오로가 활약했던 다른 넓은 지역까지 베드로의 권위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또한 베드로의 이름에 의지하였던 당시의 교회들은 이 서간을 그들의 길잡이로 삼았다.
베드로는 자신을 ‘목자’로 묘사하면서, 소아시아 공동체들의 원로들을 “같은 장로”들이라고 부른다(5, 1-4). 여기서 그의 권위는 이미 사도적인 것으로 규정되었고(1, 1),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5, 1)이기 때문이다. 이 증언은 그가 순교자로서 죽었음을 암시한다. 또 베드로가 동료 장로들에게 “하느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시오”(5, 2)라고 권고하는 동시에, 자신이 양 떼를 돌보라는 위임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요한 21장). 이 ‘돌보다'(ποιμαινειν) 라는 용어는 바오로가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명령할 때도 사용되었다(사도 20, 28). 따라서 ‘목자’라는 직분은 그 지역 교회들 안에서 원로들이었던 특수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으뜸 원로 목자’였던 베드로를 가리킨다.

베드로 후서: 베드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목격 증인이며(1, 16-18), 바오로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권위자로 등장한다. 여기에 나타난 염려와 권고는 거짓 가르침과 윤리의 혼란을 바로잡으려는 내용이다. 이는 베드로가 정통 신앙의 수호자이며, 거짓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대항한 사람이라는 주장(사도 20, 28-30)과 일치한다(2, 1). 또 예수가 영광스럽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오류를 반박하는 목격 증인으로도 묘사되었다(3, 1-10). 그는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예와 영광을 받았을 때,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된 광경을 목격하였다(1, 17-18 ; 마르 9, 2-8 참조). 이렇게 베드로는 거짓 가르침을 주장하는 자들을 논박하는 강력한 위치에 있었으며, 영광 중에 예수의 첫 번째 오심을 본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1, 19) 사도들 중의 한 명이었고, 예언서와 성서를 해석하는 데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1, 20-21). 그의 사도적 권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오로의 서간들을 왜곡하는 무지하고 무법한 자들의 주장을 바로잡는다(3, 15-16). 이들은 바오로의 서간에서 엿볼 수 있는 일종의 그노시스주의자들이다. 이 서간은 이러한 자료들을 제공하면서, 베드로의 가르치는 직무는 이미 제시된 것(마태 16, 16-19 참조)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에게는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Ⅳ. 성서 외에서의 베드로

몇몇 교부들, 즉 이레네오, 히폴리토, 테르툴리아노, 오리제네스 등은 다양한 그노시스주의 학파의 작품들 속에 강력한 반(反) 베드로 경향이 있음을 밝혀 냈다. 이런 경향들은 사도들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였으며, 바오로를 그노시스주의자로 높여 중심 위치에 있는 사도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또 야고보, 토마, 마리아 막달레나 등을 그노시스주의자로 높였는데, 이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반베드로 경향은 그 당시 그노시스주의에 대항한 정통주의의 논쟁을 반영한다. 《토마의 복음서》(The Gospel of Thomas)에는, 베드로가 그노시스주의 모임에서 여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를 표명한 사도로 묘사되었다(51, 18-25). 또 베드로는 그노시스주의의 모범적인 사들들이 주님의 특별한 환시(visio)를 체험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사도로도 나타난다. 이런 환시적 체험 때문에 마리아, 야고보 그리고 토마를 존경하는 부류들은, 그들이 베드로보다 모범적인 사도라고 주장하였다. 신약성서의 많은 내용들을 재구성한 《야고보 외경》에는 베드로가 잘못 알아들은 예수의 신원에 대해서, 예수가 베드로 대신 야고보에게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13, 39-14, 1). 이왕 유사한 경향들은 《토마의 복음서》와 《토마의 행전》에서도 반견된다.

그런데 1945년에 나그 함마디(Nag Hammadi) 자료들이 발견됨으로써 그로시스주의 안에서도 친(親) 베드로 경향이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그노시스주의 작품들이 마태오 복음 16장 16-19절의 내용 중 베드로의 권위를 손상시키려고 근본적인 면을 변경한 반면, 《베드로와 12사도 행전》은 베드로에 대한 마태오의 관점을 높이 받아들이고 확장시켰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노시스주의에서도 지도적인 사도로 나타난다. 《베드로가 필립보에게 보낸 서간》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 행전에 많이 의존하면서 재해석된 베드로의 설교들을 그노시스주의 가르침의 모범으로 제시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참된 영지적 통찰력을 가진 사도로 언급된다. 《베드로의 묵시록》은 베드로에 의해서 체험된 몇몇 환시들을 전해 준다. 이 환시에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그노시스주의적 가르침들, 특히 예수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 이런 관점은 예수의 고통을 전제하는 실제의 십자가는 거부되고 예수를 가현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신뢰받을 수 있는 그노시스적 가르침의 전승자인 동시에 수호자로서 공헌한다. 또 마테오 복음 16장 16-19절의 내용이 그노시스주의적 시각에서 재해석되었다(71, 15-21). 이와 같이 나그 함마디 자료들은 베드로를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그노시스주의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내용이기 때문에 배척되고 있다.

 

 

 

Ⅴ. 전승에서의 베드로 순교

그리스도교 전승은, 베드로가 자신의 생애 후반기에 로마로 가서 활동하다가 순교하였고 그곳에 묻혔다고 전해 준다. 95년경 로마의 글레멘스(Clemens Romanus) 주교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5-6장)에 베드로가 박해 속에서도 거룩하고 위대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고 기록했다. 몇 년 후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Ignatius Antiochus) 주교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설명을 하였다. 1세기 초기에 기록된 파피아스(Papias)에는 로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한 것이 마르코 복음서라고 하였으며(Eusebius, Hist. Eccl. 3. 39. 15), 1세기 후반 이레네오는 로마에서 베드로가 활약한 바를 명백히 설명하였다(Adversus haereses 3. 3. 3).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 간 체류하였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승도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먼저 이레네오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가 로마 교회의 창립자라고 보았지만, 바오로의 로마서에 의하면 이런 견해는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그때까지 로마를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로마 1, 13). 이보다 좀더 타당성 있는 견해는 바오로가 로마에 갇혀 있을 때 두 사도가 협력하여 일하였다는 것이다. 사도 행전의 끝맺음에서 이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사도 28, 31).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였다는 교회의 전승은 정확하지 않다. 이는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베드로가 로마를 여행하고 순교하였다는 전승이 정립되면서 확정되었다. 그는 65년 네로 황제의 대박해 동안에 순교하였으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전승은 테르툴리아노에 의해 전해졌다(De praescriptione 36 ; Scorpiacus 15). 《베드로와 12사도 행전》에서도 발견되는데, 이 기록은 요한 복음서의 증언(21, 18)에 근거한다. 이는 또한 네로의 대박해 때 바오로와 베드로가 죽었다는 타치루스(Tacitus)의 보도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네로의 박해로 인해 그들이 자유로운 구금 상태에서 일찍 풀려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사도 28, 31). 또 그들이 서유럽에 가서 선교하지 않았다면, 사도 행전 28장 이후에 예상할 수 있는 바오로의 폭 넓은 선교 활동은 방해를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의 많은 학자들은 로마의 클레멘스 주교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5-6장의 직접적인 증언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 사도들은 네로에 의해서 순교하였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Harnack, Lietzmann, Culumann, G. Ogg). 그렇지만 중간 입장을 취하는 군터(G. Gunther) 같은 학자는 바오로가 로마에서 구류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오로는 64년에 로마의 대화재 소식을 접하고 나서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갔고, 재구금 상태에 있다가 베드로와 함께 그 다음해에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제피리노(Zephyrinus) 교황 재임시(199~217?)에 로마의 가이오(Gaius) 사제의 글을 인용한 에우세비오는, 베드로의 기념비가 바티칸에 있었다는 전승을 기록하였다.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는 바티칸 언덕에 대성전을 건축하였는데, 대성전을 평지 위에 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힘들게 세운 것은 베드로의 유해가 그곳에 묻혀 있다는 확신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바티칸에서 발굴된 무덤들을 조사한 결과, 베드로의 기념비는 그가 처형당한 지점 부근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베드로의 유해에 대한 온갖 추측들은, 1968년 6월 26일 바오로 6세 교황의 지시로 유골에 대한 발굴 작업과 확인이 이루어졌다고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베드로의 무덤 또한 정확하게 발견되고 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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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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