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례자
〔그〕 ‘Ιωάννης ο Βαπτιστής
〔라〕 Joannis Baptistae
〔영〕 John the Baptist
예언자. 구세주가 오실 것을 선포한 인물. 성인.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였으며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라고 부른다. 탄생 대축일은 6월 24일이며, 수난 기념일은 8월 29일이다.
〔역사적 언급과 평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38~100)는 《유대 고대사》(18. 5. 2. 116-119)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들에게 헤로데의 군대를 멸망시킨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례자(baptistes)라고 불리는 요한에게 헤로데가 한 일을 복수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정당하게 그를 책벌하셨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요한이 선한 사람이었고,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그들이 덕을 함양하고 상대방에 대한 정의와 하느님께 대한 신심을 기르도록 하였을 뿐 인데도 그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어떤 죄를 용서받기보다는 차라리 몸의 정화를 얻고자 하고 이리하여 그들의 영혼이 정의로 이미 깨끗하여졌다고 간주된다면 하느님께서 (자신이 집전하는) 세례를 받아 주시리라는 것이 요한의 생각이었다. (소위 평범한) 유대인들이 요한 주위에 모였을 때 그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 흥분이 절정에 달했으므로 헤로데는 군중들을 설득하는 요한의 놀라운 능력이 모종의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요한이 권고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이 폭동에 불을 붙이기 전에 먼저 공격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작정하였다. 헤로데는 이렇게 하는 것이 상황이 악화되어 위기에 빠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헤로데의 음모로 인해 요한은 앞서 언급한 마캐루스 성채로 사슬에 묶여 압송되었다. 거기서 그는 처형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헤로데 군대가 패배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벌하시고 요한의 원수를 갚아 주시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상과 같은 요세푸스의 진술은 복음서가 전하는 종말론적인 예언자로서의 요한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오직 자신의 권위에 근거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유일회적인 세례를 베풀었기에 별칭으로 세례자라고 불렸다는 점, 그는 많은 군중들을 매혹시켰고 이를 두려워한 헤로데 안치파스(Herod Antiaps, 기원전 4~ 서기 39)에 의해 처형되었다는 점은 서로 일치한다. 아울러 일부 유대인들은 헤로데가 서기 36년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4세(Artas Ⅳ, 기원전 9 ~ 서기 40)에 의해 군사적으로 패한 사실을 요한의 부당한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하였을 만큼 요한의 죽음 후에도 그를 흠모하는 군중들이 있었음도 신약성서와 일치한다. 또한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루가 3, 14-15 ; 요한 1, 8. 15. 20-21), 요한 복음서와 사도 행전은 요한의 제자들과의 경쟁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요한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복음사가들이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그를 적절히 해석하는 데 늘 어려움을 겪을 만큼 독자적인 인물로 남아 있었다.
〔예언자적 삶〕
성장배경: 루가 복음서 1장은 요한이 즈카리야라는 사제의 외아들로 태어난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면, 요한이 사제직의 계승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가 성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사죄를 목표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요한의 성장 과정을 언급하는 루가 복음 1장 80절은 요한과 쿰란 공동체와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에세네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입양하여 에세네의 관습에 따라 교육을 시켰던 것처럼 (《유대 전쟁사》 2. 8. 2. 12), 어린 요한은 쿰란 공동체에서 종교적 훈련을 받고 유대의 광야에서 독자적인 예언자요 금욕주의자로 처신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요한은 세상을 기피하고 광야에서 탈속의 삶을 살면서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정(淨), 부정(不淨)의 기준에 따라 차별했던 쿰란 공동체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이어(J. P. Meier)는 요르단 강에서 목욕재계하며 살았던 바누스(Vanus)를 상기시키면서 요한과 바누스, 쿰란 공동체가 동일한 종교적 운동권에 속한다고 볼 이유가 없음을 정당하게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요세푸스도 이 삼자 간의 관계를 분리시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이 비록 쿰란 공동체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 공동체의 종말론적 사상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만큼은 굳이 부정할 수 없다.
예언자로서의 요한: 요한이 활동한 요르단 강은 구약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 곳이기도 하고, 엘리야와 엘리사가 머물렀던 곳(2열왕 2, 1-18 ; 5, 1-15)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은 또한 심판의 상징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장소이기도 하다.
한편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3, 22) 요한은 물이 많은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다 한다. 이곳은 사마리아 지방에 속했는데 요한의 활동 범위가 요르단 강을 끼고 상당히 넓게 전개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쩌면 그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 순회 세례자였다고 볼 수 있다. 요한이 설교한 광야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하느님이 만나는, 특히 이사야서 40장 3절에 의거하여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리이다. 사실 쿰란 공동체도 이 성서 구절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삶의 자리로 광야를 선택하였다.
요한의 옷은 낙타 털옷으로 엘리야의 의복(2열왕 1, 2 ; 엘리야는 짐승의 털로 만든 옷을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을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베두인의 사막용 복장이 낙타 털옷이었다. 요한은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고(루가 7, 33) 산꿀과 메뚜기를 먹었다(마르 1, 6). 이것은 가난한 자의 음식일 뿐 나지르인의 관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야훼께 봉헌된 사람인 나지르인은 술을 금하였으나(민수 6, 1-21), 이는 일시적인 서약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요한은 지속적으로 이를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나지르인은 빵과 고기를 금하지 않았다.
한편 요한은 사막에서 성장 과정을 겪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뒤(루가 1, 80) 금욕적인 삶을 살아간 것으로 미루어 그가 독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독신은 쿨란 사람들의 제의적 독신과는 달리 예언자적 독신의 형태였다. 탈무드(babli, Shabbat 87a)에 의하면, 모세는 하느님께 소명을 받은 이후 아내와의 동거를 중지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하였다고 한다. 하느님께 단 한 번 짧게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일시적으로 여인을 멀리하는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람은 항상 정결하게 몸을 지켜야 한다.
죽음: 요세푸스에 의하면 요한은 베레아의 마캐루스 성채에 압송되어 처형되지만, 마르코 복음에서 요한은 갈릴래아의 연회장에서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참수된다(6, 17-29). 그러나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18. 5. 4, 136)에서 헤로데 대왕의 손녀인 헤로디아가 헤로데라고 불리는 안티파스의 이복 형제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달 살로메를 낳았고, 바로 그 살로메가 필립이라는 안티파스의 또 다른 이복 형제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요세푸스의 기록헤 근거하여 마르코의 내용을 수정한다 하더라도 요한이 안티파스에게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되어 처형된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요한의 생애를 요약하여 말하면, 그는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서 티베리오 치세 15년(루가 3, 1) 그러니까 서기 28년경부터 팔레스티나를 무대로 세례 활동을 하다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30년 4월 7일(요한 복음의 최후 만찬 연대를 따르면)보다 훨씬 전에 정치적인 이유로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마캐루스 성채에서 처형되었다.
〔요한의 세례〕
요한의 세례, 정확히 말하면 침례(浸禮)는 1세기 유대교 안에서 성행했던 침례 운동의 맥락 안에 위치한다. 그러나 양자 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대의 일일 세례자들은 명백히 스스로 물에 잠기는 침수자들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별명이 시사하듯 자신의 인격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였고, 에세네파의 빈번한 목욕 재계나 일일 침수자들의 행위와 달리 그의 세례는 유일회적인 것이었다.
둘째,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었다(마르 1, 4). 그리고 유대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와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다고 한다(마르 1, 5). 그것은 대속죄일(욤 키푸르)에 행하는 죄의 공개적인 고백과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요한의 경우 고백이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유대교가 일 년에 한 번 속죄의 날, 대사제에게 부여한 사죄의 선포권을 수시로 행사함으로써 성전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비춰졌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유대교의 근본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섯째,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쇄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이는 차별 없이 죄인과 창녀(루가 7, 29-30)를 포함하여 모두 받아들이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은 바리사이파나 에세네파의 배타적인 집단 행위와 대조된다. 이런 점에서 페로(C. Perot)의 말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하겠다. “유대인의 세정례가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요한의 세례는 그들을 일치시키는 기능을 발휘하였다.”
〔가르침〕
요한은 1세기 유대교의 다양한 예언자 운동 중에서 소위 신탁 예언자로 활동하였다(홀슬리). 요한의 메시지는 마르코 복음(1, 7-8)과 예수 어록(3, 7-9, 16-17)에 요약되어 있는데, 이를 비교하면 예수 어록의 내용이 더 본래적으로 보인다. 예수 어록에 의하면, 요한은 두 개의 세례를 말했다. 하나는 곳간에 모아들일 밀을 위해 준비된 성령에 의한 세례요, 또 하나는 불에 태워 없앨 껍질을 위한 불의 세례이다. 이 두 가지 긴장은 정통 실천을 강조하는 예언자 전통에 정확히 어우러진다. 요한의 세례가 하는 일은 미래의 종말론적인 심판의 세례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어떤 성사적 안전주의의 보호막이 아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되 이제부터 회개한 결과로 만들어 가야 할 좋은 열매는 각자가 맺어야 할 결실이다. 그러므로 언젠가 닥쳐 올 심판의 날을 각자는 자신의 열매를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루가의 고유 자료(3, 12-14)에 나타나는 요한의 윤리적 권고의 말씀은, 그가 회개의 표지와 사회적 실천을 연결시키는 예언자 전통에 서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나눔으로 사뢰 정의를 실천하게 하고, 세리와 직업 군인 등을 받아들여 그들 역시 직업 윤리에 충실할 것을 당부한다. 요한은 하느님 진노의 시간이 임박했다고 하여 사회적 삶으로부터의 도피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요히려 진정한 정의와 자비의 실천을 강조했다. 요한의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루가의 고유 자료가 나름대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면, 요한은 분명 세례와 종말론적인 심판 사이의 시간적 간격을 사회적 실천의 기회요 장(場)으로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요한의 근본 취지는 세례의 성사적 안정성을 고취시키는 데 있지 않고, 구체적인 회개와 그 실천을 앙양시키는 데 있다고 하겠다.
〔요한과 예수〕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도 받아들인 것이다. 예수는 적어도 한때 요한의 제자요 또는 후계자로 사람들에게 보였다(마르 6, 14 참조). 그러면 문제는 예수 역시 요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 1장 35절 이하에 의하면, 예수의 최초 제자들은 안드레아와 그의 형제 시몬 등 본래 요한의 제자들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고 잠시 가까운 제자 그룹 안에 머물러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한 복음 3장 22절에 의하면, 예수는 세례를 베푸셨다. 그러나 공관복음이 이 주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는 어느 때부터 세례 집전을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어쩌면 예수의 유랑 설교가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어 그가 ‘오시는 분’ 이냐고 묻는 것으로 보다(어록 자료 ” 루가 7, 18-23 ; 마태 11, 2-6) 요한은 예수의 신원을 잘 알지 못하였다. 요한을 예수의 직접적인 증인으로 묘사하는 것은(요한 1, 29) 결국 초대 교회의 해석이었다.
어록 자료(루가 16, 16 병행)에 의하면, 요한은 구약과 하느님 나라의 중간 시기에 속한다. 요한은 예수에 앞서 “회개하시오. 하는 나라가 다가왔습니다”라고 선포한다(마태 3, 2). 또 어록에 의하면(루가 7, 24-26 병행) 요한은 무엇보다 예언자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예수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요한보다 더 크지 못합니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 더 큽니다”라고 말함으로써(루가 7, 27-28) 그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부각시켰다. 요한이 하느님 나라의 미래를 이야기했다면 예수는 자신의 말씀과 행위 안에서 현실화하는 하느님 다스림의 현재를 선포했다(루가 10, 24 ; 11, 20 ; 17, 20). 이 차이는 금욕적인 요한의 삶과 하느님 나라의 축제를 현재화하는 예수의 삶의 차이이기도 하다(루가 7, 33-34 ; 마르 2, 18-22).
유대교의 종말론에서 심판은 하늘 나라에 선행한다. 이 점에서 요한은 전통적인 종말론의 시간적 도식에 따라 설교하고 행동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 순서를 바꾸어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심판의 설교 앞에 두었다. 예수 역시 심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우선성 때문에 그는 심판의 어두운 이야기를 뒤에 위치시켰을 뿐이다. 유대교적 종말론에서 정작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요한과 초대 교회〕
요한이 여인의 몸에서 난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하였다면, 그를 예수와의 적절한 거리에서 평가하는 일이 초대 교회로서 그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요한을 예수와의 연속성과 차별화 구도 안에서 재해석한 것은 무엇보다 어록이었다(루가 3, 7-9, 16-17 ; 7, 18-28, 31-35 참조). 어록에서 예수는 요한이 예고한 “오시는 이”와 동일시되고(루가 7, 18-23) 요한은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루가 7, 27)이지만, 한편으로는 동등하게 모두 지혜의 자녀들이다(루가 7, 35). 마르코 복음은 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소개하고 그가 감옥에 갇힌 뒤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였다고 보도함으로써(마르 1, 14-15), 요한의 시대가 종결되고 메시아의 시대가 열렸음을 강조한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의 세례를 의로움의 완성 과정으로 해석하고(3, 13), 요한을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예언자 엘리야로 묘사한다(11. 2. 10). 그리고 요한이 설교한 미래의 성령 세례는 예수의 파견 말씀에서 구체화된다(마태 28, 19).
루가 복음에서 요한의 탄생 이야기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와 나란히 소개되고 전자는 노녕의 잉태로(루가 1, 7) 후자는 성령에 의한 잉태(1, 35)로 차별화된다. 더욱이 요한은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를 향해 예언자적인 동작을 보여 준다(루가 1, 43). 또한 루가 복음은 요한을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에 포함시키고(루가 16, 16), 이어서 성령의 도래로 개막된 교회의 시간으로 이어지는 소위 구세사적인 도식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에서 세례자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닌(요한 1, 20-21) 오직 예수의 직접적인 증인으로 등장한다(요한 1, 8. 29. 36).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몰리자 그분은 커져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증언한다(요한 3, 30). 그리고 요한은 표징을 행한 바가 없어(요한 10, 41) 예수와 결정적으로 차별화된다. 마르코 복음 6장 14절을 포함하여 복음서와 요세푸스가 요한의 기적 수행 능력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요한 복음 10장 41절은 역사적인 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2세기 초까지 요한을 메시아로 생각하는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는 결국 예수의 선구자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 고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