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출현한 38도선은 한민족을 가르는 남북의 분단선인 동시에 동북아시아에서 양대 진영의 분단선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한반도 문제를 구체화하려는 제1⋅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소련은 “유엔은 한국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외국군은 통일정부 수립 전에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점령국은 ‘즉시 군대를 철수 시킨다’는 대안으로 응수하였다. 소련은 이미 북한에 소위 민주기지를 구축하여 공산기반을 강화
하였음은 물론 충분한 군사력을 육성하였기 때문에 주한미군철수를 압박하고 나섰던 것이다. 소련은 미소 공위가 진행되는 동안 이미 1947년 7월부터 북한의 38경비대에 경비임무를 인계하기 시작하였고 북한군이 전술상의 요지를 장악하고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미국의 한국문제로의 유엔 상정(上程)은 신탁통치를 더 이상 거론치 않고 유엔 주도하에 독립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을 뜻하며 미국은 유엔의 도움을 얻어 소련의 의도를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한국문제의 유엔이관과 단독정부안이 가시화되자 소련은 1948년 2월 8일 정규군 창설 선언과 함께 ‘조선인민군’으로 개편하고 북한군 총사령부의 설치를 발표하였다. 북한군 창설 발표와 곧 이은 북한의 헌법안에 대한 선거 발표는 미국으로 하여금 남한의 단독선거 실시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소련군은 ‘북조선인민집단군’이 창설된 1947년 9월 시점 북한에 약 4만여 명 정도를 잔류시키고 있었다. 1947년 4월 5일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치코프 대장이 교대되어 그 후임으로 코로트코프(G. P. Korotkov) 중장이 부임하였고, 1948년 6월 7일 소련군 축소 발표와 동시에 메르쿠로프(Merkulov) 소장이 부임하였다. 이처럼 주둔군 사령관의 계급구조가 대장에서 중장, 소장으로 낮아지는 것은 병력규모가 축소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 소련군의 철수는 스티코프 장군의 공식 철수발표 이전에 이미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 공식 정부가 수립된 1948년 9월에는 증강된 1개 사단 규모 정도가 잔류하고 있었다.

소련은 북한 정권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본격적으로 강화하고 북한군의 훈련에 주력하는 동시에 북한에서의 소련군 철수에 대비하여 1948년 12월에는 소련 군사고문단의 북한파견을 결정하였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이듬해 1월말부터 북한지역에서 정규 공산군의 편성과 전투훈련을 도와주는 동시에 각종 소요장비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북한군 건설초기부터 군사물자와 장비지원은 물론 군수뇌부, 각 부대 및 학교기관을 지도하였다. 각 사단에는 대좌급 사단장 고문관을 비롯하여 중대급까지 150명을 배치하고 전차⋅항공부대에도 전문고문관을 파견하여 전술훈련과 장비교환에서부터 정비분야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 군사고문관은 평양의 소련대사관에서 각 부문사절단을 통제하며 본부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북한의 정책결정기구인 정치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남한의 정부수립 직후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의 공포와 더불어 북한군총사령부를 민족보위성으로 격상시키고 작전국 등 11개국으로 편성하여 각 군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북한은 정부수립직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소련과 외교관계를 설정하기를 희망한다는 서한을 보냈으며,186) 이에 1948년 10월 12일 스탈린이 “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소련의 승인이 결정되었으며, 그 후 15일에는 그의 특명전권대사로서 스티코프 대장을 임명하게 되자 김일성은 주영하를 소련주재 특명전권대사로 임명하였다. 뒤이어 10월 15일 몽골인민공화국, 17일 폴란드, 22일 체코스로바키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헝가리 등 동유럽국가들의 승인이 이어졌다.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자 이후 주한외국군 철수문제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소련은 1948년 9월 북한정권의 외군 철수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소련군이 12월말까지 철군 완료할 것이라 발표하고 미국도 이에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면서 10월 19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12월 25일 소련은 북한에 주둔한 소군의 최종 철수를 보도하였다. 그 후 북한 내부에서는 ‘소련군 철퇴는 전 세계인민의 평화를 실현하고 미 제국주의의 야망을 폭로하는 길’을 주요 주제로 하는 군중집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되었다. 또한 북한주둔 소련군 철수 보도를 접한 남한의 상당수 지도자들도 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만큼 남북에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된 이후의 주한외국군 철수문제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군은 철수시 북한군에게 장비를 이양하여 1948년 9월 이후 4개 사단으로 증편하고 소련군 전차사단의 지원 하에 제105전차대대를 창설하였고, 또한 민족보위성 산하의 항공대대를 항공연대로 증편하였다.

이때 북한의 군사업무는 이원화 체제를 유지하였다. 북한군은 민족보위성에서, 보안대와 국경경비대는 내무성에서 각기 관장하였다. 어느 것을 막론하고 소련군의 철수 때까지 소련군 정치사령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후에는 소련군사사절단이 북한의 군사업무에 관여하였다.

이렇게 군사업무 체계를 정비한 북한은 소련점령군의 장비를 인수받고 이어 중⋅소의 군사지원을 받아 급속히 군비를 확장해 나갔다. 소련 군사고문관은 1948년 말 2천 명 정도까지 증강되었으나, 소련군 철수와 동시에 대대급까지만 고문관을 유지함으로써 1949년부터 군사고문관은 크게 감소하였으며, 그 대신 장성 5명을 포함한 40여명 규모의 특별군사사절단이 파견되어 북한군의 전력증강을 지도하였다.

소련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북한과 소련 당국간의 명분을 위한 절차상의 진행과정을 보면 사전의 치밀한 준비작업을 거친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즉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북한은 8월 25일 최고인민대의원선거를 실시하고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1948년 9월 2~10일)가 평양에서 개최되었을 때 의안으로써 ‘미⋅소 양 정부에게 미⋅소 양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는 요청서를 1948년 9월 10일자로 미국과 소련정부에 발신하였다.

이 요청서를 받은 소련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인 쉬페르닉(N. Shevernik)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인 김두봉(金枓奉)에게 1948년 9월 18일 자로 회신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소련 최고인민회의가 북한에서 보내온 요청서를 검토하고 소연방 내각에서 1948년 12월말까지 소련 군대를 북한에서 완전 철수하도록 지시를 내렸다”고 하는 답신이었다.

이어서 1948년 9월 20일자로 소련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의 요청에 의한 소련연방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결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소련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첫째, 북한 영토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대의 소련 영토로 철수한다. 둘째, 소련 군대는 1948년 10월 중순 이후에 철수하기 시작하여 1949년 1월까지 완전히 철수한다는 내용이다. 소련 외무성의 철군 발표(1948년 9월 20일)가 있자, 그 이틀 후인 9월 22일자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소련 외무성의 철군 발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감사의 서한을 보내게 된다.

경애하는 이 오씨프 위싸리오노위츠!(스탈린의 본명) 북조선에 남아 있는 소비에트군대의 철거에 대하여 소비에트정부가 채택한 결정에 관한 보도를 듣고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전 조선 인민의 이름으로써 각하와 또는 각하를 통하여 위대한 전 소비에트인민에게 나의 무한한 경애와 감사에 넘치는 뜨거운 충정을 표하는 바입니다.  (중략)  소비에트군대를 철거함에 대한 소비에트정부의 결정  (중략)  각하께서 주신 고귀한 기여로서 어느 때나 잊지 않을 것입니다.(중략) 위대한 소비에트인민의 진정한 원조와 동정을 힘입어 조선 인민은 우리조국의 완전한 민족적 독립을 위하여(중략) 결정적인 투쟁을 하여 왔으며 또한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위대한 소비에트련맹과 친히 당신 이 오씨프 위싸리오노위츠께서는 우리가 민족적 및 자주적 권리를 수호함에 있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발전 강화함에 있어 지지와 원조를 하여 주실 것을 우리 인민은 믿어마지 않습니다.  (중략)  조선 인민의 가장 친한 벗이며 해방자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

이와 같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소련군 철수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조국의 완전한 민족적 독립(남북통일의 뜻)을 위하여 결정적인 투쟁을 하겠으니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강조하고 있다. 이리하여 잔류 소련군의 북한 철수는 공식적으로 10월 19일부터 시작되어 당초 소련 외무성이 발표한 철수 완료 시한인 1949년 1월보다 1개월이나 빠른 1948년 12월 25일 철수가 완료되었다. 소련군의 철수가 완료되자 소련 타스통신은 내각의 발표를 인용 보도하기를 “북한으로부터 소련군의 철수는 12월 25일로 완료되었다. 그러나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요청한 남한에서 미군의 철수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처럼 소련군의 북한 철수는 사전에 미국과 남한을 압박하기 위한 계획된 절차에 불과한 것이었다. 남북한에서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에 대한 보장도 없었음도 불구하고 소련군이 단독으로 철수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배경이 있었다.

즉, 북한은 남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남북한 당사자들끼리 통일문제에 대한 처리에서 북한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또 북한에는 친소 공산정권이 이미 수립되어 있고 강력한 군대가 있으므로 한반도는 더 이상 대소 공격기지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이 철수하더라도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기능이 확립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한반도에서 야기되는 남북한간의 어떤 문제이건 소련군의 철수와 소련 군정의 종식으로 소련이 책임질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소련군의 단독철수는 세계 여론 상 미군의 철수를 종용하게 되는 결과가 되어 결국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 계산되었다.

소련은 김일성이 수상으로 취임한 다음날 발표한 8개 정강 중 군사관계의 2개 정강의 그 첫 번째 정강인 ‘양군의 철수’는 우선 소련군의 단독철수로서 김일성이 할 수 있는 과업이 성사되었고, 마지막 정강인 ‘인민군대를 백방으로 강화하여 발전시키겠다’는 정강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따라서 소련의 북한 군사원조는 장차 미소양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후에 남한방위가 미군의 철수로 완전공백상태에 빠지게 될 것을 예상하여 비밀리에 추진시켜 방위력이 약한 남한의 국군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소련군 철수발표와는 달리 소련군 최근에 공개된 소련 국방문서에 의하면 상당수의 소련군이 북한에 잔류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문서에 의하면 군사고문단과 별도로 북한에 머물면서 전쟁준비를 지원한 소련의 군사전문가나 군무원은 4천명을 넘어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당시 군사전문가 잔류상황은 소련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1949년 2월 18일자 보고서 ‘군 철수 이후 잔류인원 보고’에 총 4,298명이 북한에 남아 있으며, 이중 4,020명은 군인이 고 나머지 273명은 군무원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 같은 시점 국제적으로 철수 압박을 받고 있었던 주한미군이 1개 연대(제5연대전투단) 7천명 수준임을 고려할 때 그 숫자 역시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북한과 소련사이에 체결된 의정서에서도 북한이 소련군의 잔류를 요청하였으며 소련군의 일부가 잔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의정서 제1조에 “소련정부는 남한에 미군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해군부대를 청진항에 잠정적으로 주둔시켜 달하는 북한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소련정부는 해군부대의 주둔과 관련하여 모든 경비를 지불한다”고 되어 있다.

북한주둔 소련군이 잔류하고 있을 가능성에 관해서는 미군 보고서에 의해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미 육군보고서에 의하면, 소련은 12월 25일 북한으로부터 점령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고 보도하였으나 2천의 군사고문 요원과 천여 명의 경비병력이 북한에 잔류한다는 증거가 있다고 분석하였으며, 또 다른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949년 2월 소련군 1,500명이 평양에서 확인되고, 이반 메시코프의 지휘를 받는 소련 공군요원 211명이 주둔하고 기타 신천⋅차령⋅양양⋅철원⋅원산⋅연포⋅함흥⋅나남⋅청진에서 소련군이 관측되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당시 남한 국회에서도 소련군 철수보도는 근거 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며, 이승만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검증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또 월남자들의 진술을 통해서도 일부 소련군 잔류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주장들은 단순한 정치적 비난이며 근거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소련은 1948년 12월 25일 북한에 주둔한 소군의 최종 철수보도로서 미군 철수를 압박하면서 다른 한편, 모스크바에서는 북한군 전력증강에 관한 구체적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즉 소련 국방상 주제 하에 북한⋅소련⋅중공의 군사대표자 전략회담을 개최하였으며, 이 회담에서 향후 18개월 내에 북한군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육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은 초대 주북한 대사로 임명된 스티코프 대장을 단장으로 5명의 장성과 12명의 대령 그리고 20여명의 중령⋅소령⋅대위 등 총 40여명으로 구성된 군사사절단을 12월말에 북한에 파견하였다. 이때 파견된 소련군 장군들 대부분이 기갑전문가였다. 이 사절단은 도중에 하얼빈에서 조⋅중 실무진과 만나 동북의용군의 입북가능성을 확인한 뒤 1949년 1월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이들과 함께 세계대전 당시 참전경험이 있는 소련군출신 한인병력 약 2,500명이 입북하여 민족보위성과 북한인민군 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소련의 대북정책이 같은 시점 미국의 대남정책의 목표가 전형적인 국내 치안확보에 있었던 점과는 달리, 북한군의 상대적인 우세 또는 적어도 열세하지 않는 전력을 보유하도록 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About Author

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