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 포르투갈의 Elisabeth Portucaliae (1271~1336)
성녀. 포르투칼의 여왕.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 축일은 7월 4일.
〔 생애 〕
스페인 아라곤(Aragon)의 왕 페드로 3세(Pedro Ⅲ le Grand, 1239~1285)와 시칠리아의 왕 만프레디(Manfredi, 1232?~1266)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이름은 고모 할머니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 Hungariae, 1207~1231)의 이름을 딴 것이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디니스 1세(DinisⅠ, 1279~1325)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는데, 가스티야(Castilla)의 왕인 페르난도 4세(Fernando Ⅳ, 1291~1357)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 큰스탄스와 포르투갈의 왕위를 잇는 아폰수 4세(Afonso Ⅳ, 1291~1357)가 그들이다. 디니스 1세는 유능한 통치자였으나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엘리사벳은 남편의 불신앙을 감내하면서 자신이 낳지 않는 서자(庶子)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끊임없이 기도와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병원 · 고아원 ·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순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숙소를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정치 중개자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상황 때문에 알랑케(Alenquer)로 추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297년에 이복 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하던 아폰수 4세와 남편 디니스 1세 사이를 조정하기 위해 맺은 ‘알카니체스(Alcanices) 계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디니스 1세가 1324년에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는데, 극진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한 남편은 회심하였지만 이듬해 사망하고 말았다. 남편이 사망한 뒤에 혼인 계약에 따라 많은 재산을 얻게 된 그녀는 수도원 · 교회 · 빈민 구제소 등을 세우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어 쿠임브라(Coimbra)의 ‘성녀 글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근처에서 살았다. 만년에 그녀는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336년 7월 4일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의 왕이자 자신의 조타인 알폰소 11세(Alfonso Ⅺ, 1311~1350) 간의 평화를 중재하러 가는 도중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사망한 엘리사벳은, 쿠임브라의 ‘성녀 글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성당에 묻혔다. 훗날 포르투갈의 왕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11세는 동맹을 맺고 마오로족에 맞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시성과 공경 〕
1516년 교황 레오 10세(1513~1521)에 의해 복녀로 선언됨으로써 쿠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으며, 1626년에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에 의해 시성되었다. 1630년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에 성녀의 축일이 7월 4일로 수록되어 있었으나, 1695년 12월 18일에 교황 인노첸시오 12세(1691~1700)가 7월 8일로 바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두 날을 모두 축일로 인정하면서,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 기념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톡릭대사전』 9, pp.6065-60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