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평시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군사력 감축은 병력과 장비의 감축만으로 완료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전후 소련 당국은 결과적으로 2차에 걸쳐 군 지휘부를 개편하였다. 즉, 1차 편성은 종전 직후 군을 평시체제로 전환시킴에 따라 이루어졌고, 2차 편성은 재무장정책으로 전환된 후 이루어졌다.121)
소련 지도부와 총참모부는 총력국방을 위한 사회주의 진영 내 총 가용자원의 파악과 효율적 운용을 검토하였고 사회주의 진영의 재무장과 역할 분담도 논의하였다. 서구진영과의 접점 지역은 만약을 대비해 우선적으로 증강할 필요가 있었고 또 적전 분열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친소(親蘇)정권의 확립도 절실하다고 판단하였다.
종전 직후 1차편성에서 소련 당국은 먼저 군 지휘기관들을 대폭 개편하였다. 1945년 9월 4일 소련최고회의 간부회의의 지시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시 국가최고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국가방위위원회(GKO)를 해체하였으며 최고총사령부 역시 활동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1946년 2월 25일 소련인민위원소비에트의 포고령에 따라 방위인민위원회와 해군인민위원회를 ‘무력인민위원회’라는 단일기관으로 통합하여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3월 무력인민위원회는 무력부(武力部)로 개칭되었다. 무력부 산하에는 협의체기관 성격의 최고 군사소비에트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된 1950년 2월 무력부는 지상군⋅공군⋅방공군 등이 속하는 군사부와 해군부로 재분할되었으며, 1950년 3월에 설립된 최고 군사소비에트는 군사력 전반을 관장하는 최고 국가기관으로 기능 하였다. 군사부와 해군부는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재차 소련 국방부로 통합되었으며 국방부 산하에는 통합군사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122) 또한 일부의 중앙 군 정치기관들도 개편하였다. 즉, 1946년 2월말 전군에 대한 지휘권이 단일의 무력인민위원회로 통합된 것과 관련하여 전군 통합의 정치 총지휘부를, 그리고 각 군종별로는 정치지휘부를 설립하였다.123)
아울러 육군⋅해군⋅공군 등에 대한 지휘권은 해당 군종의 총사령관 및 총참모부에 귀속시켰으며, 각 군종 총사령관 산하에는 협의체 기관인 군사소비에트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군 건설과정에서 해당 총사령관 산하의 군사소비에트를 협의체 기관으로 개혁한 것이 부적절한 조치였다고 평가되었으며 1950년 중반 각 군종, 군관구, 집단군, 군 등에 해당 부대의 지휘를 위한 군사소비에트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각급 부대에 설립된 군사소비에트의 권한은 과거에 비하여 대폭 강화되어 부대의 동원과 훈련, 정치교양 활동, 규율통제 등의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원적 지휘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군사소비에트의 활동에 대해서는 해당 부대지휘관의 직접적인 지휘권이 발휘되었다. 즉, 군사소비에트에서 채택된 결정은 해당부대 지휘관 및 참모장의 서명을 받아야만 공식적인 지시로서의 성격을 갖도록 하였다.
또한 포병사령관에 속하는 방공군사령관 직책을 부활시켰으며, 각 군종간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총참모장, 각 군종 총사령관 및 후방사령관 등은 모두 무력부의 차관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각 부대 훈련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부대에 대한 규칙적인 통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전쟁이 끝난 직후 각 군종내에 총감찰국을 설립하였으며, 1947년 초에는 무력부내에 총감찰부를 설립하여 모든 군종을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124)
한편 소련당국은 1945년 7월부터 9월까지 각 전선군과 일부군의 지휘부를 군 관구 지휘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군관구의 수를 증가시켰으며, 시베리아군관구, 백러시아ᐨ라트비아군관구 등 기존의 일부 군관구는 해체하였다. 이때 새롭게 창설되거나 과거에 해체되었다가 다시 설립된 군관구로는 바쿠(Baku)⋅바라노비치(Baranovich)⋅보로네즈(Voronezh)⋅고리키(Goriky)⋅돈(Don)⋅서부 시베리아⋅동부 시베리아⋅카잔(Kazan)⋅쿠반(Kuban)⋅레닌그라드⋅민스크(Minsk)⋅프리발틱(Pribaltik)⋅프리카르파트(Prikarpat)⋅스몰렌스크(Smolensk)⋅스타브로폴(Stavropol)⋅스텝(Step)⋅타브르(Tavr)⋅투르케스탄(Turkestan) 군관구 등이 있었다.125)
종전 직후 극동지역에서 자바이칼전선군을 근간으로 하는 자바이칼ᐨ아무르군 관구, 제1극동전선군을 근간으로 하는 프리모르예군관구, 제2극동전선군을 근간으로 하는 극동관구 등 3개의 군관구를 설립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자국 내에 총 32개의 군관구를 보유하게 되었다.126)
1946년 초에는 방공활동과 관련하여 바쿠관구와 모스크바관구 등 2개의 방공관구를 설립하였다. 방공관구의 경우에는 일반 군관구와는 다른 특수한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각 군사위원회 활동의 지휘, 군 징집활동, 관구내 동원 활동수행 등 일반 군관구의 고유한 행정적 기능들은 수행하지 않았다. 이후부터는 군관구의 수가 수차례에 걸쳐 감소되었다.127)
동유럽에 주둔한 소련군의 경우에는 각 국가를 기준으로 수 개의 집단군으로 통합되었다. 우선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부대들이 북부 집단군으로 통합되었다. 1947년에는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로부터 소련군 부대들이 철군함에 따라 이미 조직되어 있던 남부 집단군은 해체되었다. 또한 1949년 독일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부대들은 독일점령 집단군으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동유럽 각국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 집단군들은 이후 결성된 바르샤바조약군의 근간이 되었다.
121) 이하 소련군 지휘부 및 군 조직의 재편 내용은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52-369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 보완하였다.
122) 1947년 3월까지 무력부 장관에는 스탈린이 재직하였으며, 1947년 3월부터 1949년 3월까지, 그리고 1953년 3월부터는 불가닌이, 1949년 4월부터 1953년 3월까지는 바실리예프스키(Vasilebvsky)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123) 1945-1953년 정치 총지휘부장은 쉬킨(Shikin), 크라이뉴코프(Krainyukov), 쿠즈네쪼프(Kuznetsov) 등
이었다. 각 군종별 정치지휘부는 1953년 국방부로 통합된 이후 해체되었다.
124)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52-253.
125) 독소전 개전 직후 소련내 군관구는 프리발틱, 서부 키예프, 레닌그라드, 오데사, 아르항겔스크, 북카프카즈, 자카프카즈, 모스크바, 프리볼즈예(볼가), 중앙아시아, 우랄, 시베리아, 자바이칼, 하리코프, 아룔(오를로프), 극동전선 등 총 16개였다.
126) 소련극동군은 제1극동전선군, 제2극동전선군, 자바이칼전선군, 태평양함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의 동측방을 담당한 조공부대로 동만주 일대의 일본군 방어지대를 돌파한 후 왕청(汪淸)⋅도문(圖門)⋅연길(延吉) 방면으로 진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47년 5월 자바이칼ᐨ아무르 관구를 근간으로 극동군총사령부가 창설되었다. 극동군총사령부에는 극동 군관구, 프리모르예 군관구, 태형양 함대, 아무르 군사소함대 등이 소속되었다. 1953년 4월에는 극동지역 전체가 단일의 극동 군관구로 통합되었다.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53-354.
127) 1946년 2월 바라노비츠군관구와 민스크군관구가 백러시아군관구로 통합됨에 따라 군관구의 수가 31개로, 그리고 군사력 감축과 관련하여 일부 군관구들이 해체되어 1946년 10월에는 총 21개로 감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