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 살얼음판을 걷듯 신중하던 미⋅소의 관계가 1948년 말을 고비로 급격히 냉각되었다. 냉전이 표면화되면서 소련의 대외(對外)정책도 1920년대로 회귀했다. 소련 내에서 소위 “적에게 포위된 신생 사회주의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대 결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총력 국방사상이 다시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이전과의 차이는 그 범위가 종전 소련 일국에서 동유럽과 중국⋅몽골⋅북한을 포함하는 신생 사회주의 진영으로 확대되었을 뿐이었다.
소련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후복구와 경제력 회복을 위해 군비를 대규모로 감축시켰으나 다시 재무장으로 급선회하였다. 이미 1946년 1월부터 2월까지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는 군사력 건설과 관련된 군사정책 계획을 광범위하게 논의하였으며, 정치국 특별위원회는 군의 재조직과 군사력의 지속적 증강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1946년 2월 2일 당 중앙위원회는 선언문을 통하여 전후 당 군사정책의 기본원칙을 천명하였다. 당시 선언문에 제시된 소련 군사정책의 기본원칙은 국방력 강화를 위한 물적, 기술적 기반의 지속적 강화, 과학기술의 발전성과를 이용한 국방력 강화, 대외 상황을 고려한 군의 감축 및 재조직, 유사시 군의 동원 및 대처능력 향상 등이었다. 당시 수립된 계획의 주요 방향은 소련의 방위에 적합한 무장과 인원 확보, 강력하고 유사시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정규 상비군 건설, 각 군종 및 병과의 균형 있는 발전 등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1947년 4월에 개최된 최고 군 지휘관회의에서 군사정책의 세부사항이 규정되었다. 이 시기 소련당국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중공업을 중심으로 한 국가 경제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재래식 병기의 성능향상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단시일 내에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서방국가들에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자 하였다.113)
당시 소련 당국은 제4차 국가경제부흥 발전 5개년 계획(1946ᐨ50)의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로 “소련 방위력의 강화와 신형 병기(兵器)의 보급지원” 활동을 제시함으로써 국가경제의 발전, 특히 중공업의 발전과 군사력의 강화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잇다는 것을 재차 발표하였다. 이는 과학기술이 소련군사력 강화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판단하고 이의 발전을 위한 시책을 수행한 것이었다. 소련당국은 경제 특히 국가의 생산력 수준이 군사력의 원천으로 보고 과학에 기반을 둔 군사 경제정책과 국가경제의 성공적 발전만이 소련 군사력의 물적, 기술적 기반의 질적 변화를 위한 필수적 전제가 된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소련은 국가 경제력의 강화와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한 제 시책을 추진한 결과, 산업과 과학기술 영역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군사력 강화와 관련한 관련 산업분야의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우선 군수산업과의 연관성이 깊은 에너지, 자동차 산업, 화학공업, 철강산업, 건설 등의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었고, 항공기 제작, 함선 제작, 트랙터 생산, 차량생산 공장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신기술 영역의 전문인력을 양성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어, 군수산업 관련 전문 인력의 배출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114) 군수산업 관련 분야의 발전 결과 소련군의 무기와 군 장비 수준은 사실상 급속하게 향상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 소련 군사기술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핵무기의 개발이었다. 당시 서방 국가들에서는 소련이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개발해 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당시 수많은 외국 군사전문가들은 핵에너지를 이용하는데 10ᐨ15년 심지어는 20년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115)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잘못된 것이었다.
즉, 소련에서는 독일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11월에 이미 소련 과학아카데미로 하여금 원자력에 관한 연구를 광범위하게 진행하라는 지시가 있었으며, 1943년 초부터는 학자인 쿠르차토프(I. V. Kurchatov)의 지휘 하에 원자력 에너지에 대하여 연구하는 과학 실험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결과 소련은 1946년 말 우라늄 흑연반응기를 개발하였으며, 이후 우라늄의 대량생산에 돌입하게 되었다.116) 이와 관련하여 소련정부가 1947년에 이미 “핵 폭탄에 대한 비밀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17)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소련은 결국 1949년 8월 최초의 핵실험을 행하였고, 그 실험 결과는 동년 해 9월 25일 타스통신에 의해 성공적이었다고 보도되었다. 즉, 타스통신은 소련이 핵무기와 핵무기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후 소련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유형의 핵폭발 실험이 진행되었으며 신형 핵무기들이 속속 생산되었다.118)
소련은 핵무기의 개발과 함께 핵무기 운반 수단인 미사일의 개발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당시 소련 군사이론에서는 핵폭탄을 목표물까지 운반하는 최고의 전략적 수단으로 장거리 유도미사일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 항공기 개발에 비중을 두고 있던 미국과는 달리 미사일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119)
결과적으로 소련은 1947년 소련 최초의 미사일(Rᐨ1) 제작을 완료하여 같은 해 10월 18일 발사실험에 성공하였으며, 그 후 즉시 군에 미사일을 보급하였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보다 강력한 로켓용 엔진이 개발되어 1951년부터는 보다 개선된 미사일(R-2)을 보유하게 되었다.120)
113)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43-345. 전쟁에서의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공업은 신속하게 재건되어 갔다. 1948년에는 산업 생산력이, 그리고 1950년에는 농업 생산력이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며, 1950년의 국내 산업생산력은 1945년 수준을 81% 뛰어 넘었다. 그러나 이는 중공업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며 1950년 소비재산업의 생산력은 1940년과 비교할 경우 3%에 지나지 않았다.
114) 제4차 국가경제 부흥 발전 5개년 계획 기간(1946-50)중 대학교에서는 총 65만 2천명, 그리고 중등교육기관에서는 127만 8천명의 전문 인력이 배출되었다. 위의 책, p. 347.
115) 소련의 키르얀은 『과학기술혁신과 소련 군사력』에서 “1948년에 소련 과학자들은 이미 원자폭탄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위의 책, p. 348 재인용.
116) 乾一宇(譯), 『蘇聯軍 思想, 構造, 實力』(東京 : 時事通信社, 1986), p. 34. 1945년 소련이 핵 폭탄 개발에 성공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부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117) 프라우다 (1949년 9월 25일자), 국방군사연구소,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 349 재인용.
118) 스탈린은 1951년 10월 6일 프라우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국방계획에 의거하여 앞으로도 다양한 폭발력을 지니는 핵폭탄 실험이 진행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프라우다 (1951년 10월 6일자), 국방군사연구소,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 349 재인용.
119) 乾一宇(譯), 앞의 책, p. 34. 소련도 최초의 핵폭탄 운반수단은 TU-4폭격기였다.
120) 당시 군사조직 개편을 비롯한 군사력 건설정책 영역의 최고입법기관은 소련최고회의, 그리고 최고 집행기관은 소련장관소비에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