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전쟁 그 자체의 종결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국제세력 판도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소련의 세력지배 하에 있던 동독, 폴란드(Poland), 헝가리(Hungary), 루마니아(Rumania), 불가리아(Bulgaria),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 알바니아(Albania) 등 동유럽 제국은 소련의 주도하에 공산정권을 수립하였다.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동유럽 공산국가의 등장으로 소련은 세계에서 미국 다음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103)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외형적으로는 연합정권을 형성하였으나 실제 소련식의 정치형태를 취함으로써 동유럽 전역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소련은 동유럽제국을 소위 철(鐵)의 장막(帳幕)의 틀을 형성하여 서구의 자본주의 제국에 도전하는 하나의 동구세력을 형성하였다.

소련은 동유럽권에서 서유럽의 시장을 폐쇄시켰을 뿐 아니라 그 세력을 점차 자본주의 제국으로 확장하려 하였다. 특히 군사 면에서 소련은 영국과 함께 이란(Iran)에 주둔한 외국군대를 전후 반년 간 더 주둔하기로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1945년 9월 런던에서 영국ᐨ소련 외상(外相)회의를 개최하여 1946년 3월까지 모든 외국 군대를 이란에서 철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전후에도 이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소련의 태도에 대해 열강제국이 이의를 제기하였지만, 소련은 오히려 그곳에 병력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또한 소련군은 다시 이란 지역을 거쳐 터키(Turkey)를 포위하였다. 그것은 다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을 분할하여 하나의 독립권을 수립하고 소련군과 독일군이 공동 방위한다는 구실 하에 소련군을 주둔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장차 그리스(Greese)에서 연결하고 극동지역에까지 그 세력권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리스는 전쟁 중에 대독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던 그리스 공산당이 전후 동구권의 지원과 책동에 의하여 소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여 정부군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감행함으로써 전 그리스를 내전(內戰) 상태로 몰아넣었다. 전후의 경제부흥은 고사하고 날로 팽창되는 인플레로 인해 그리스는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그리스는 그러한 사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하는 한편 경제전문가의 조언 제공에 관한 미국의 제의를 수락함으로써 미국이 조사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구는 경제적으로 피폐된 데다가 소련을 비롯한 공산세력이 급진적으로 확대되어 서구를 위협함으로써 다시 절박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도 공산권내에서 크게 제고된 비중과는 달리 국제관계상 여러 가지 어려운 난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시 동맹국이었던 세계 최강국 미국과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는 한편,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서방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진영 사이의 양극(兩極) 대결이 구조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종전이후 세계는 공산주의 국가들의 등장과 함께 자본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간의 대결, 동서냉전(東西冷戰)의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유럽은 패전국인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물론,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전승국인 여러 국가에 있어서도 전화로 말미암아 국가경제가 피폐되어 전쟁이전 수준으로 복구하기가 힘들 정도로 일대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전승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미국은 전쟁 중에 직접 전화를 입지 않았지만 전쟁을 통하여 전시의 생산력이 거대하게 팽창하여 악성 경제공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자유진영 국가의 경제 원조를 증대하여 소련의 침투를 막는 한편 수출을 위한 시장개척에 서둘게 되었다.

결국 종전 이후 표면화되기 시작한 동서냉전은 양 진영간의 정치, 군사적 경쟁을 초래하였다. 우선 이 시기 미국은 스탈린의 공산주의 팽창정책에 위기를 느끼고 소련과의 협조체제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채택하였다. 그 일환으로 서유럽에 대하여 경제적 지원과 아울러 방위조약(防衛條約)과 동맹체제(同盟體制)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947년 3월 12일 있은 트루만 독트린의 선언 속에 구체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동년 6월 5일에는 마샬 국무장관의 유럽 부흥계획인 마샬 플랜도 발표되었다.104)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정책에 대해 중대한 위협이라 비난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같은 해 10월 바르샤바에서 국제공산당 정보기관인 코민포름(Cominform)을 창설하였다. 여기에는 소련⋅폴란드⋅체코⋅헝가리⋅루마니아⋅유고 등 동구 6개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2개국의 서유럽 공산당이 참가하여 미국과 서유럽 국가간의 단결에 대항하였다.

소련은 코민포름 회의에서 “각국의 공산당간에 연락을 도와서 강건한 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공산당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활동조정을 꾀한다”고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당면한 활동목표는 서유럽의 경제부흥을 방해하는데 두었다. 이 회의에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즈다노프(A. A. Zhdanov)는 ‘서방에 대한 영원한 냉전을 선언’하는 이른바 즈다노프 노선을 발표하였다. 또한 다음 해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경제상호원조회의, 즉 코메콘(Comecon)을 발족시켜 동유럽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결집시켜 미국의 봉쇄정책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하였다.105)

소련을 비롯한 동구의 공산주의 위성국들과 서유럽의 공산당이 창설한 동 기구는 공동선언에서 “트루만 독트린, 마샬 플랜이란 세계의 모든 지방에 미국의 손이 뻗치고 있는 세계적 팽창을 기도하는 정책을 위해 일반적 계획 속에 포함된 것과(중략) 미 제국주의에 의해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유럽을 노예화하려고하는 계획(중략) 이와 같은 정세 하에서는(중략) 제국주의자의 침략계획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유럽에 있는 민주적 반제국주의자의 능력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하여 실제로 서유럽에 대한 정면대결 태세로 나왔다.

이리하여 유럽은 완전히 동서로 분열되었고 두 개 진영간의 대립은 격화하게 되었다. 이때 서유럽의 공산당들은 정치적 파업을 통해 경제 혼란과 파괴 공작을 감행하였으며,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의 공산당은 대규모적인 노동공세를 취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 공산당의 노력은 미국이 트루만 독트린 선언 이래 소련세력에 대한 봉쇄를 위해 마샬 플랜에 의한 긴급원조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효력이 없었다. 다만 1948년 2월 철의 장막 가운데 유일한 서구식 민주주의국가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당 쿠데타로 인해 전복되어 공산독재 정권이 수립된 사실은 미국이나 서유럽의 자유진영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노동당 내각조차도 반공적 태도를 취하게 되어 베빈(E. Bevin) 외상이 주도하여 공산주의세력 확대에 대항하고 서구제국의 공동방위를 위해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1948년 3월에는 영국⋅프랑스⋅베네룩스(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3개국) 등 5개 국가가 서유럽연합 부루셀 조약기구를 결성하였다. 한편 트루만 대통령도 소련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의회에 대하여 서구부흥계획의 촉진, 징병제도의 채용 등을 의회에 요청하고 동시에 아메리카대륙 자체를 공동방어하기 위해 1947년 9월에 체결한 리오조약에 이어 1948년 4월에는 아메리카기구 헌장을 조인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은 마샬 플랜을 가일층 촉진시키게 되어 서구제국에 대한 경제 원조뿐만 아니라 군사원조까지도 확대하였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코민포름의 활동은 그동안 뚜렷한 성과가 없자 마샬 플랜에 반대투쟁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세계평화 옹호운동으로 전환시켰다. 1948년 6월 코민포름은 유고의 공산당이 농촌에 대한 골호즈(Kolkhoz : 소련의 집단농장화)화를 촉진하지 않고 있다고 부르조아적 민주주의의 편향에 대해 비난하는 결의를 행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대전 중 대독 게릴라전의 영웅 티토(Tito)가 전후 소련의 지지에 의해서 정권을 장악하여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모든 것을 소련과 협조해 왔다. 그러나 티토는 유고의 민족적 이익을 강조하고 소련이 민족적 불평등과 지배주의를 위하여 위성국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은 공산주의 원칙에 위반되는 것이라 판단하고 암암리에 소련의 대국주의(大國主義) 정책을 비판하고 코민포름의 결정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동구제국의 공산당은 코민포름의 결의에 따라 일제히 당내숙청을 감행하여 각 공산위성국 내에 있는 티토주의자들을 추방하는 조치를 감행하였다. 이어 동년 6월 유고를 코민포름에서 제명하는 동시에 대(對)유고 경제봉쇄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유고는 재건 5개년 계획을 달성시키기 위해 직접적인 원조가 절실하였으므로 서구에 의존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코민포름의 활동과 마셜 플랜의 진행으로 미⋅소 양대진영의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으며 이러한 대립은 동서독의 통치문제를 절박한 사태로 몰아갔다. 서구측은 서독점령 지역을 유렵경제협력기구(OEEC)에 가입시키기 위한 준비로서 1948년 6월 서독에서의 마르크 통화개혁(通貨改革)을 감행하여 통화안정을 꾀하였다. 이에 대해 소련은 서독에 적용한 마샬 플랜에 대한 보복조치로서 동독 점령지역 내에 있는 미⋅영⋅불⋅소 등 4개국 관리 하에 있는 베를린(Berlin)을 봉쇄하여 유럽와의 관계를 차단하여 고립시키려고 함으로써 양 진영간에 일대 위기를 조성시켰다. 그러나 서독에서 단행한 통화개혁의 결과는 오히려 생산율을 상승시켜 동독의 경제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나 유럽제국도 이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공수(空輸)로 베를린에 대대적인 물자보급을 계속하여 소련의 지상봉쇄에 대한 기도를 무력화시키고 다시 역보복(逆報復) 조치로 이미 유럽에서 영, 불, 베네룩스 등 5개국이 체결하였던 부루셀조약기구를 반공방위체제로 정비하였다. 동시에 미국은 1947년 9월에 양 아메리카대륙 제국 간에 체결된 공동방위조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48년에 열린 보고타 회의에서 기구를 발전시켜 아메리카제국의 안전과 경제, 문화 등에 대한 능력을 제고시켰다.

그 후 1949년 4월에는 다시 이들 유럽동맹제국과 아메리카 공동 방위제국을 결속시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체결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프랑스⋅캐나다⋅벨기에⋅네덜란드⋅이탈리아⋅룩셈부르크⋅포루트칼⋅아일랜드 등 12개국이 이에 가맹하고 서독을 포함한 유럽과 양 아메리카대륙에 있는 가맹국(加盟國) 중에서 어느 한 나라, 또는 둘 이상의 국가가 공격을 당할 경우에는 전 가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공동방위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전 가맹국은 이에 필요한 군사훈련 전략 군수생산 등을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하여 반공 전초(前哨)를 구축함으로써 군사⋅정치적 반공체제를 강화시켰다.106)

한편 소련은 현실적으로 국제 관계에서의 문제보다 국내문제로 훨씬 더 심각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세계 제2의 강국으로 부상한 소련은 여전히 내부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난제들이 내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엄청난 인적 손실과 물적 피해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절대 빈곤 상태를 면한 것이었다. 전쟁에서 상상하기도 힘든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산업시설은 철저히 파괴되고 경제활동이 극도로 침체되어 대다수의 국민이 굶주림 속에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련 내부 자료에 의하면, 이 전쟁을 통해 소련은 국부의 약 30%를 상실하였다고 하였다.107)

소련은 경제회복을 위해 제4차 국가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108) 이때의 조달된 재원(財源)은 주로 패전국 독일 등으로부터 받아 낸 배상금과 기타 지불금, 그리고 소련군이 주둔한 국가들로부터 부당하게 받아 낸 주둔지원비 등이었다. 그 액수는 대단히 큰 규모였으며, 소련 정부의 전체 수입 가운데에는 상당 부분이 그러한 형태의 자금이 포함되어 있었다.109)

냉전의 격화와 국내 경제력의 피해상황은 전쟁 직후 소련의 군사정책 기조를 설정하는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즉, 소련은 전쟁으로 인하여 피폐된 자국경제를 복구하기 위하여 군사력 감축을 위시한 다양한 경제수단을 동원하는 동시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세계와의 군사력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는 군사력 강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전후 소련은 전쟁 중에 점령하였던 동유럽 지역을 그의 위성국으로 만들어 완전 장악함으로써 철의 장막을 치고 서구지역으로 그의 세력을 팽창시키고자 시도하였으나 서유럽제국의 공고한 결속과 미국의 적극지원으로 말미암아 그 세력 확장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소련은 베를린 봉쇄에 전면적으로 대응한 미국과 서방측의 봉쇄정책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으로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렇듯 소련은 서구세력의 강화로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어 유럽에서의 진출이 완전 봉쇄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세력 확장에 대한 집념을 결국 단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대신 소련은 목표를 아시아지역으로 전환하였다.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특히 극동지역과 동남아지역은 서구나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다. 소련은 이 지역이 미국이나 서구제국의 저지 정책 내지는 봉쇄정책이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세력 확장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설정하였다. 극동에 있어서 제정러시아 시대 이래의 남진정책이 러일전쟁에서 실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다시 가능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전후에 있어서 중국과 한반도 지역은 소련의 극동진출에 부합되는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소련은 전쟁 중 연합국의 4대강국으로서 전후처리에 직접 참여하여 미국과 함께 한국을 남북으로 분단시킨 후 북한을 점령하게 되었고, 또 만주를 비롯한 중국대륙의 진출에 있어서도 중국내전의 결과 중공군이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대륙을 석권함에 따라 극동지역으로 향한 팽창정책은 한층 용이하게 되었다.

 

103) 소련의 군사전략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시기 소련군 발전단계를 다음과 같은 3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제1기는 1945년 종전 이후부터 1953년 3월까지이며, 제2기는 1953년 4월부터 1962년까지, 그리고 제3기는 1962년에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 소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나올 때까지이다. 김학준, 『러시아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 pp. 304-306.
104) Thomas H. Etzold and John Lewis Gaddis, eds., Containment ; Documents on American Policy and Strategy 1945-1950, N.Y., Columbia Univ. Press, 1978. 참조.
105) 김학준, 『러시아사』, pp. 308ᐨ309.
106)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제1권, 1967, pp. 185-186.
107)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인적손실 약 2천만 명, 도시 및 도시형 부락 1710개, 초란 7만개 이상, 공장 3만 2천여 개, 콜호즈 9만 8천 개, 소브호즈 1,876개 등 파괴, 철로 6만 5천㎞, 선박 1만 6천 척, 화차 42만 8천 량 상실 등의 피해를 입었다. 국방군사연구소, 『소련군사정책, 1917-1991』, 서울인쇄, 1997, p. 339.
108) 이 계획은 1946년 3월 소련최고회의에서 확정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4년 3개월 만에 초과 달성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위의 책, p. 346.
109) 김학준, 『러시아사』, p. 293. 전쟁 피해복구의 기본적 자원인 노동력과 장비의 동원은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즉 군사분야에서는 필요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군사력의 감축이 이루어져 1,0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동원 해제되고 상당수의 군장비가 민간 산업분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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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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