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측은 1945년 8월 20일 주중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중장 명의로 남한 지역에 미군이 진주할 것임을 알리는 삐라를 공중 살포하였다. 이어서 9월 7일 태평양 미국 육군총사령부는 포고 제1호⋅제2호⋅제3호를 동시에 발표하여 남한에 군정을 실시할 것임을 공포하였는데, 이때 공포된 제1호 포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평양 미국 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호
제2호와 제3호 포고는 범죄와 법규위반자에 대한 규정과 통화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한국민에 고함
태평양 미국 육군최고지휘관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포고함.
본관 휘하의 전승군은 일본 국왕, 정부 및 대본영의 명에 의하여, 또한 이에 대신하여 서명된 항복문서의 조항에 근거하여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지역을 점령한다.
오랫동안 한국민이 노예화되어 있었던 사실과 한국은 불원 해방 독립될 것을 결정한 사실을 고려하여 한국민은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의 조항 실행과 한국민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의 보호에 있는 것을 깊인 인식할 것으로 확신한다. 이와 같은 목적 수행을 위하여 나는 여러분의 적극적인 지원과 협력을 요망한다.
본관은 본인에게 부여된 태평양 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으로써 여기 한국의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 내지 동 지역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설립한다. 따라서 점령에 관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포고한다.
제1조 한국의 북위 38도 이남 지역 및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을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
제2조 정부 공공단체 기타의 명예직원 및 모든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모든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 및 고용인은 유급 또는 무급을 불문하고 그밖에 모든 중요한 직무에 종사하는 자는 별명이 없는 한 종래
의 직무에 종사하고 모든 서류 및 재산의 보관에 임할 것.
제3조 주민은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으로 발하는 명령에 즉시 복종할 것.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동 또는 질서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엄벌한다.
제4조 주민의 소유권은 존중한다. 주민은 본관의 별명이 없는 한 일상 업무에 종사할 것.
제5조 군정 기간 중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영어로 한다. 영어와 한국어 또는 일본어간의 정의의 해석의 불명, 불일치한 것은 영어를 기본으로한다.
제6조 이후 공포되는 포로⋅법령⋅규약⋅고시⋅지시 또는 조례 등은 본관의 권한하에 발표되며 주민의 이행 사항을 명기함.
이와 같이 포고함.
1945년 9월 7일 요코하마(橫濱)에서,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지휘관
미국 육군 원수 더글라스 맥아더
주한 미 점령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인 9월 9일 아래와 같은 최초의 포고문을 발표하여 군정에 임하는 그의 기본 태도를 밝히고 한국민에게 대하여 협력과 각성을 촉구하였다.
한국민에게 고함
미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이행하며 한국의 재건과 질서있는 정치를 실행코자 근일 중 귀국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명을 엄격히 실행코자 하오니 불행한 국민에게 자비심 깊은 민주국인 미국에서 실시하는 것이니 확실한 것입니다. 주민의 경솔 무분별한 행동은 의미 없이 인명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도 황폐되어 재건이 지체될 것입니다. 현재의 환경은 여러분의 생각에 맞지 않더라도 장래의 한국을 위하여서는 평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국내에 동란을 발생할 행동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장래의 귀국의 재건을 위하여 평화적 사업에 전력을 다하여야 되겠습니다. 이상 지시함을 충실히 지키며 귀국은 급속히 재건되고 동시에 민주주의 하에서 행복하게 생활할 시기가 속히 도달될 것입니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국방사(제1집)』 (1984), p. 60.)

미군정 포고문(1945. 9. 19)
이러한 포고와 성명에 뒤이어 군정 실시에 수반되는 실제적인 조치가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에 도착한 며칠 후 하지 장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연합국의 후원 아래 중국에서 귀국시켜 정치가 안정되고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명목상의 지도체제로 활용하도록 할 것을 맥아더 장군에게 제안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이미 해방 직후인 8월 17일에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중 미 대사를 통해 트루만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대표를 한국에 파견하여 한국과 한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회의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달했지만 수용되지 않은 바 있었다.(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p. 14-15.) 결국 미 군정 당국은 38도선 이남에서 미 군정이 유일한 정부이며 다른 정부는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주도해 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 제24군단이 한반도에 진주한 후에도 상부로부터 군정에 관한 지침을 받지 못한 하지 장군은 일본 총독부 체제를 잠정기간 유지시키고 이를 관리감독하다가 일정기간이 경과한 후 미국인으로 그 직무를 대행하게 하면서 점차 한국인으로 대체시켜 군정 체제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복안(韓國化 Koreanization)을 수립하였다. 미군 선발대인 해리스 준장 일행이 9월 7일 일인(日人) 정무총감과 대담할 때에도 이 구상이 논의되었다. 9월 9일 항복 접
수식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아베(阿部信行) 총독과 다른 일본인 관리를 당분간 현직에 유임토록 하겠다는 하지 중장의 발표는 이러한 의도에서 취해진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이 항복한 후에도 일본인 관리들은 그대로 유임되었
다. 미 군정청은 전(前) 조선총독부에 자리를 잡고 9월 11일에 비로소 한국에서 반세기만에 일장기(日章旗) 강하식을 거행하였다.
그런데 한국인을 배제한 채 일본인 관리들을 유임시킨 이러한 처사는 한국인들로부터 일본식민통치를 연장하려 한다는 맹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하지 장군은 9월 12일 아베 총독을 해임함과 동시에 제7사단장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을 군정장관, 쉭크(Lawrence E. Schick) 준장을 경무국장에 임명하고, 국무부 관리 베닝호프(H. Merrell Benninghoff)를 정치고문으로 지원 받아 미군이 직접 관장하는 군정으로 전환함으로써 본격적인 군정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9월 20일부터 새로운 군정청 기구를 출범시키고 각 국(局)의 국장을임명하였다.(재정국장 고오든 중령, 철공국장 언더우드 대령, 법무국장 우드올 소령, 농상국장 아던 중령, 교통국장 해밀튼 중령, 체신국장 헐리 중령, 교무국장 럭키아드 대위 등이었다.)

미 군정청 기구표
미 군정 당국은 한국민의 반대로 당초의 계획을 변경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현지 실정을 알지 못하는 미군이 직접 행정사무를 관장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일본 총독부 기구를 모방하고 국장에는 미군 장교를 임명하면서도 현직에서 물러난 일본인들을 고문으로 임명하여 그들의 보좌를 받도록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통치체제를 잠정적이나마 유지시키려 했던 미 군정 당국의 의도는 한국의 실정을 외면한 중대한 착오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전후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서 구체적인 준비가 없었던 미국 정부가 대부분의 군정정책을 한국 사정에 어두운 현지 군사령관에 일임한데서 연유하였다. 한국 점령 후 미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한 하지 장군의 입장도 곤란할 수밖에 없었으며, 정책의 미비와 불일치로 인하여 워싱턴-도쿄-서울로 이어지는 군정 지휘 체계에는 계속 시행착오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하지 장군은 확실한 정책지침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실패할 것이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 밖에도 미군의 군정에는 또 다른 큰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당시 한국의 산업은 위축되고 경제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좌⋅우⋅중도로 나뉘어 각축을 벌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은 정치경험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부나 산업체의 자격이나 책임을 요하는 자리에 한국인을 거의 기용치 않은 일본 식민정책이 남긴 유산이었다. 하지 장군은 이러한 정치적 복잡성과 일본 잔재의 어려움을 처리할 방도에 대해 지침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 장군의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미 군정이 한국의 장래에 관한 미국 및 연합국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며 주한미군 병력이 부족하고 유능한 군정장교 및 전문적인 장교가 적어 효율적인 군정을 실시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p. 17-18.)
이런 현상이 초래된 원인은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수행하여 승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미국에게는 전후 일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걸쳐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급하고도 복잡한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이 때문에, 그들의 주요 관심이 한반도에 집중될 수가 없었으며, 한반도의 사태 수습 및 사건 처리에 대한 우선순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면은 소련의 입장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 한반도 문제를 서양식 논리와 사고에서 풀어가려고 했던 데서 결과적으로 발생한 시행착오가 있었음도 분명하다.
이러한 정책 부재와 남한 사회의 혼란 가운데서도 미 군정 당국이 남한의 행정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은 10월 5일에 이르러 일본인 고문들을 퇴임시키고 그 자리에 11명의 지도급 한국인 인사(김성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인 고문은 김용순, 김동원, 이용설, 오영수, 송진우, 김용무, 강병순, 윤기익, 여운형(그후 사직), 조만식 등 11명이었다.)를 임명함으로써 한국인이 참여하는 군정으로 한 걸음 진전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미 군정 당국은 10월 9일에는 일제 시대의 악법들을 폐기하였으며, 미 군정하의 사법기관장인 대법원장에 김용무를 임명(10. 12)하는 등, 각 행정기관장을 한국인으로 대폭 교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군정청 행정기구에 미국인과 한국인을 함께 기용하는 양국장(兩局長)제도를 채택함에 따라 보다 많은 한국인이 군정청에서 일하게 되어, 1945년 말에는 그 수가 75,00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군정기구가 정비되고 있을 무렵인 10월 17일 다음과 같은 미국의 기본 군정지침이 맥아더 장군을 거쳐서 하지 장군에게 하달되었다.
한국에서 미국의 최종 목표는 자유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 나아가 책임 있고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여건을 형성하는 것이다. 모든 행동에 있어 귀하는 미국의 대한정책, 즉 미⋅소에 의한 잠정 군정기로부터 미⋅소⋅영⋅중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거쳐 최종적으로 유엔 회원국으로서 독립국가에 이르는 단계적 발전을 계획하고 있는 미국의 정책을 유념해야 한다.(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p. 19; History of US AFIK, pt. 2, ch. 4, pp. 57-58.)
이로써 미국의 정책은 군정-신탁통치-독립국가로 이행한다는 것으로 분명해졌다. 이즈음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還國)하기 시작하였다. 10월 16일에는 이승만(李承晩)이, 11월 23일에는 김구(金九)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였다. 그러나 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수임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좌⋅우익을 망라한 모든 정파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는 크게 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뉘어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여 공산체제가 확실하게 형성되어 간 북한과는 매우 대조적인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