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항복하고 한반도가 광복을 맞이했을 때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일반명령 제1호를 통보받은 맥아더 장군은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하지(John R. Hodge) 중장 지휘하의 미 제24군단(제6⋅제7⋅제40보병사단)을 한국의 북위38도선 이남 지역에 진주시켜 이 곳의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도록 명령하였다.(이로써 하지 장군은 주한미군사령관(駐韓美軍司令官 CGUSAFIK)이 되었다.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 13;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KMAG in Peace and War(Washington, D. C.: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the Army, 1962), p. 7)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에 입성하는 미군 (1945. 9. 9)

 

미군 진주후에 서울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1945. 9. 9)

 

이 명령에 따라 하지 장군은 남한지역 점령군사령관으로 제7보병사단과 함께 9월 3일 오키나와를 출발하여 9월 8일 인천항에 도착하였다.(미 제24군단의 선발대는 9월 4일에 인천에 상륙하였는데, 이 날은 소련군이 북한에 진입한 지 22일 만이었다.) 미 제24군단 제7사단이 한국에 도착하여 서울, 그리고 개성을 포함한 38도선 일대 및 경기도와 충청도 일원으로 진주한 이후인 9월 말에는 미 제40사단이 경상도 지방 일원에 배치되었으며, 10월 16일에 도착한 미 제6사단은 전라도 지방 일대에 배치되었다. 이 시기 남한에 진주한 전체 미군 병력은 약 77,600명이었으며, 그 편성은 다음과 같다.

 

주한 미 육군사령부 기구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에 대한 지휘계통은 맥아더 장군(맥아더 장군은 연합군사령관의 직위를 갖고 있었으며, 1947년 1월 1일에 공표된 통합군사령부 계획에 의거 극동군사령관(CINCFE)과 극동미육군사령관(CGUSAFFE)의 직위를 겸무하고 있었다.)을 거쳐 워싱턴의 육군본부와 합동참모본부에 연결되었으며, 한국 군정에 관한 정책지침은 원칙적 으로 국무⋅육군⋅해군 조정위원회로부터 합동참모본부를 경유하여 하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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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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