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제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은 8월 26일 평양에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북한 전역에 걸친 군정체계를 수립하는 한편, 군정실시 기관으로 로마넨코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민정관리총국을 설치하였다. 이 기관에는 정치⋅경제⋅교육⋅문화⋅보건⋅위생⋅출판⋅보도⋅사법 지도부 등 군정에 필요한 9개의 지도부가 있었으며 군사회의(정치사령부)의 별도 통제를 받았다.
소련군은 군정기구를 갖추어 나가면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실시하는 한편 38도선 일대에 초소를 설치하고 진지를 구축하여 남북을 왕래하는 통행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였다. 또한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경원선 등 주요 철도와 도로를 차단하고 교통⋅통신을 폐쇄하였다. 이렇게 장벽을 친 소련
군은 군정을 실시하기 위한 조치로 우선 인민위원회의 조직에 착수했다. 소련군은 가는 곳마다 같은 방법과 수단으로 각 도에 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그 곳에는 반드시 치스차코프 장군이 직접 나타났다. 8월 25일 소련군 선발대의 진남포 진주에 뒤이어 진남포 인민정치위원회가 결성되고(9월 2일), 소련군이 의주에 진주한 며칠 뒤인 30일에 치스챠코프 장군이 신의주 철도호텔에서 역시 같은 방법으로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지역에서도 도민(道民)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던 민족주의자 이유필(李裕弼)이 위원장으로 추대된 데 반하여, 부위원장에는 공산주의자가 임명되었다. 그후 치스챠코프가 해주에 나타난 것은 9월 8일이었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제1권)』, pp. 54.)
북한에 진주해 온 소련군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각 지방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자치위원회가 조직된 것처럼 가장하고, 한국인을 진심으로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준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고 애썼다. 각 지방마다 자치 단체의 명칭을 조금씩 달리하게 한 점이나 치스챠코프 장군이 반드시 참석하여 일본인 대표들에게 자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직접 소개한 점에서 그런 일면을 찾아볼 수있다.
북한 지역에는 해방과 동시에 이미 다수의 자치단체들(자위대, 보안대, 치안유지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지부 등이었다.)이 결성되었는가 하면, 국내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조직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제1권)』, pp. 55.) 그 중에서도 먼저 조만식(당시 63세, 평양 출생, 기독교인, 명치대학 법과 졸업, 오산중학교 교장, 숭실전문학교 교수, 신간회 평양지부장.)을 중심으로 평양에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가 결성되어 해방 이후 정부 수립에 대비하였으며, 각 도의 중심 도시에 속속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렇게 북한지역에서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치스챠코프 장군은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여 평안남도에 설치된 인민정치위원회를 승인하고, 이어서 각 도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제1권)』, pp. 51-52;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1964, 巖南堂書店, pp. 184-185) 이것은 소련 군정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기도를 숨긴 채, 한민족이 주인이 되는 조직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해방과 더불어 조직되기 시작한 여러 정치단체들이 통폐합되고 8월 24일부터 9월 말까지 도별(道別)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각 도별 인민위원회는 일본인 관료로부터 행정기관, 경찰관서, 경제기구 등 모든국가기관을 접수하고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소련군정 당국은 인민위원회 위원장 에는 한국인을 기용하였지만 소련군 장교를 고문역에 임명하였는데, 그들이 입북시 함께 들어온 소련계 한인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구는 외관상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 군정 당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민위원회 조직은 민족진영 세력이 점차 배제되면서 주로 소련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갔다.

북한 지역의 소련 군정 조직
소련 군정 당국은 10월 14일 평양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소련군 대위 김일성(金日成)을 북한 주민 앞에 내세웠으며,(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p. 24; EUSA, History of North Korean Army, p. 90) 이때부터 김일성이 권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소련 군정이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산당으로 하여금 민족주의자들을 말살하게 하려는 공작을 진행하자, 이에 분노한 조만식 등 북한 5도 민족주의 세력 대표자들은 북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이들은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 군정 당국은 11월 18일, 5도 인민위원회를 통괄하는 5도 행정국을 설치하고 산업⋅교통⋅체신⋅농림⋅사업⋅재정⋅교육⋅보건⋅사법⋅보안의 10개국으로 된 행정체제를 정비하여 조만식의 지도하에 두었다가, 그 후 12월 17일에는 김일성을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 앉힘으로써 그를 정점으로 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와 같이 소련의 군정이 실시된 지 약 4개월 만에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 군정의 하수인 역을 담당하는 김일성을 제1인자로 한 공산체제가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소련 군정 당국은 이 세력으로 하여금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게 하고 이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일반 대중에게 심어주려는 전략을 폈다. 이와 병행하여 북한의 공산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포섭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여기서 소련 군정에 협조하는 동조자는 포섭하고, 비협조자들에 대해서는 남한 탈출을 방조하거나 이들을 구금하는 방법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제거하는 숙청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경제문제와 북한으로부터 남하하는 피난민 문제를 협의하기를 원하는 미 군정 당국의 요구를 무시한 채 북한의 ‘소비에트화’에 진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