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은 1945년 8월 9일 대일선전포고와 동시에 소⋅만 국경선으로부터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태평양함대의 해군 항공기는 소련 국경에 가까운 한국의 나진․청진․웅기 등을 이미 폭격하고 있었다. 바로 그날 소련 극동군총사령관 바실리예프스키(A. M. Vasilevsky)가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소련 극동군총사령관의 호소문을 발표하여 소련군이 ‘조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반일투쟁(反日鬪爭)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대일전에 참전한 부대 중에서 장고봉(張鼓峰) 부근의 소련군 선발대는 두만강 방면으로부터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였고, 한편 8월 13일에는 1개 사단 병력이 청진에 상륙하였으며, 이들은 기갑부대를 증강시켜 점령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 무렵 미군은 일본의 오키나와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소련군은 미군의 선두부대가 한국에 도착하기 거의 1개월 전에 북한 지역에 진입한 셈이었다. 전차를 앞세운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체시키면서, 또 항복한 후에도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남하하였다.
북한에 진입한 소련군은 치스챠코프(Ivan M. Chistiakov)(치스챠코프는 1900년 농민의 아들로 출생하여 볼셰비키 혁명 때 적군 병사로 가담하였다. 독⋅소전쟁 때 제6군사령관이 되었으며, 북한점령군사령관으로 북한에 진주하였다.) 대장이 지휘하는 제1극동방면군 소속의 제25군으로서(당시 소련극동군은 제1극동방면군, 제2극동방면군, 자바이칼방면군, 태평양함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25군은 제1극동방면군의 동측방을 담당한 조공부대였는데, 동만주 일대의 일본군 방어지대를 돌파한 후 왕청(汪淸)⋅도문(圖門)⋅연길(延吉)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5개 사단, 1개 여단의 12만 명을 주축으로 하고 그 밖의 태평양함대의 해군 시설부대와 기타 부대 병력 3만 명을 합쳐서 약 15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War Department Intelligence Division, Intelligence Review, 1946. 6. 20.)
8월 15일, 당시 만주에 주재하고 있던 제25군사령부는 종전(終戰)과 동시에 해방된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소련 극동군 제1전선 제25군사령관 호소문 을 발표하였다. 소련군 제25군사령부는 만주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한국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이 호소문의 내용은 ‘조선은 자유국가가 되었으나 이것은 새로운 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 소련 군대는 조선 인민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업을 위하여 모든 조건을 조성해 줄 것이다. …… 조선 인민은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치스챠코프의 그 성명은 소련군이 아직 한반도의 어느 곳도 점령하기 이전에 소련군의 지휘부가 설치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한국인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 그는 한국에 진주할 때 내린 명령에서 ‘붉은 군대는 조선에서 우리 질서의 주입과 조선 영토의 획득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였다. 이때까지 공포된 소련군 당국의 포고문에서 읽을 수 있는 공통점은 그들이 북한 주민을 극진히 존대하고 북한의 자유와 자주적인 입장을 존중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1주일 전에야 참전함으로써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스스로의 입장을 의식하고, 소련군 및 공산당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호감을 유발하기 위해서 취해진 것이었다. 또 그들의 북한 점령정책과 의도는 어느 포고문에서도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실상은 곧 이어서 실시된 강력한 북한 통제와 정치권력 장악의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소련군의 북한 지역 진입은 8월 15〜17일 사이에 급속히 이루어졌다. 함경남도에 소련군이 최초로 도착한 시기는 8월 21일이었다. 동해안으로 흥남에 상륙한 소련군 선발대 1개 여단 병력은 전차를 앞세우고 다음날 함흥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제17방면군 참모부장과 무장해제에 관해 협의하였다. 이어서 24일에는 치스챠코프가 그의 참모들을 이끌고 비행기로 함흥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소련군 선발대가 처음 들어온 날은 8월 24일이었다. 치스챠코프는 평양 도착 연설에서 소련군은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해방자로서’ 한국에 왔으며, ‘우리의 질서를 당신들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과 당신들 인민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8월 26일에는 약 3〜4,000명의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였다. 그날 밤 치스챠코프 장군은 조만식(曺晩植)과 현준혁(玄俊赫), 그리고 일단의 일본인 현지 간부들을 모아놓고 ‘26일 오후 8시 부로 평안남도의 일본 행정은 소멸하며,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가 정권을 인수한다. 모든 기관들은 인민정치위원회에 의해 접수된다’라고 발표하였다. 이로서 평안남도의 도정(道政)이 조만식 주도의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넘겨졌다. 그리하여 8월 27일부터 이 기관이 도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정기관과 경찰관서, 경제기관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새로운 한국인 기관장과 간부들이 임명되었고, 여기에 실권을 행사하는 소련군 장교가 고문관의 이름으로 배치되었다.
평안북도의 경우 신의주에 소련군 선발대가 도착한 날은 8월 27일이었고, 치스챠코프는 8월 30일 이곳에 들어왔다. 다음날 그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유력자 및 한국인 유력자들을 함께 모은 자리에서 일본인들에게 ‘평안북도의 행정 기타 일체를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에 넘길 것’을 명령했다.(평안북도에서도 역시 8월 26일에 결성된 ‘평북자치위원회’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평북임시인민정치위원회’로 바뀌었다.)
한편, 소련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실시하면서 본대가 평양에 도착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8월 25일에는 38도선을 넘어 개성까지 진출하였다.(개성에 침입한 북한군은 은행에서 현금(9,000만圓)을 강탈, 개성인삼(2,000만圓 상당)을 비롯하여 기타 물자를 강제 징발하는 등 이 지역에 미군이 진주할 때(9월 10일)까지 횡포를 자행하였다.) 또 26~28일에는 해주⋅신막⋅복계⋅김화⋅화천⋅양양까지 이르러 38도선 이북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제1권)』, pp. 55ᐨ56.) 이때 소련군의 1개 소대 병력은 38도선 이남인 춘천에까지 침입하였고, 이 지역 주민들이 환영회를 베푸는 등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도정 이양 공작을 하기까지 했다. 또 평강 및 화천에 진주한 소련군은 미군이 춘천에 들어오기(9월 20일)까지 매일 이곳에 내려오곤 하였다.
38도선에 이른 소련군은 이 선 요소요소에 진지를 구축하고 기관총을 설치하여 남북으로 오가는 통행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한편 남행 열차 운행을 제한 또는 정지시키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38도선 북부의 남단인 금교와 신막에 서 경의선 운행을 정지시킨 날은 8월 25일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남북을 잇는 경원선 등 철도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남북으로 통하는 교통 및 통신을 제한 및 정지시켰는데,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
경원선(서울-원산) : 원산ᐨ금곡까지 운행 제한(8월 24일)
경의선(서울-신의주) : 신의주ᐨ신막까지 운행 제한(8월 25일)
토해선(토성-해주) : 운행 정지(8월 26일)
사리원선(사리원-해주) : 운행 정지(8월 26일)
이러한 조치는 한국에 있어서 남북 간의 교통이 차단되는 발단이 되었는데, 광복으로부터 38도선 폐쇄까지는 1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미군이 아직 한반도에 진주하기 이전에 전격적으로 북한 지역 일대에 진출한 소련군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 지방으로 진출하고, 그들의 영향 하에 자치단체를 조직케 하여 그 지방의 행정권을 행사하였다. 한편 로마넨코(A. A. Romanenko) 정치사령부는 은밀히 그들 단체를 감시 또는 조종함으로서 이 때부터 그들의 본색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북한에 진주할 때 소련측은 한국인 2세를 대동하였으며, 그들을 이용하여 북한 내의 세력 교체를 점진적으로 추진해 갔다. 이런 기미를 탐지한 북한의 유력 인사들은 이때부터 38도선 이남으로 피신하기 시작하였다.
소련군의 북한 점령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대가 진주하였는지 그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전투부대가 왔고, 그 다음으로는 군사위원들이 왔으며, 세 번째는 각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는 이들을 뒷받침할 소련계 한인 집단이 들어왔다. 4단계 점령이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기도했던 바는 북한에 진주한 직후 치스챠코프 소련군사령관의 이름으로 공포된 다음과 같은 포고문에서 읽을 수 있다.
조선인민에게
조선인들이여! 소련 군대와 동맹군대는 조선에서 일본 침략자를 구축하였습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으며 이것은 다만 조선역사의 제1페이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행복도, 조선인민의 영웅적인 투쟁도 근면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되는 것입니다. 일본 통치하에서 살아온 고통의 시일을 추억합시다.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를 위하여 당신들은 일하였습니까.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습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은 잘 압니다.
(중략)
조선노동자들이여! 노력에 의한 영웅심과 창조적 노력을 발휘합시다. 조선인의 훌륭한 민족성의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합시다. 진정한 사업에 의해 서 조선의 경제적 및 문화적 발전을 계획하는 자만이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인이 됩니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제1권)』, pp. 54-55.)
도처에 나붙은 이러한 포고문은 당시의 북한 주민에게는 달콤하고 그럴듯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선전⋅선동 술수가 그러하듯이, 이 포고문은 그들의 본 의도를 은폐하려는 한낱 선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북한을 조직적으로 적화하려는 소련의 계획은 애초부터 고도의 방법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 실상이 곧 표면화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