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성경에 대하여
4.1.1 그리스도교의 성경과 계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시의 원천이다. 계시(Revelation)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고 알려주시는 것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하느님은 사람들이 당신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이끄신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과 무관한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며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고 인도하는 분임을 알려준다.
4.1.2 계시, 예언, 묵시
일부 사람들이 ‘계시’를 ‘미래의 사건을 미리 말하는 것'(흔히 말하는 예언)과 혼동하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 안에는 ‘예언’과 ‘계시’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예언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며, 하느님께로 마음 돌려 하느님의 백성다운 삶으로 나아오라는 초대’이다. 곧 예언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에 따른 회개로의 초대이다.
묵시(Apocalypse)는 계시나 예언과 다른 것이다. 묵시는 박해나 배교의 위험에 처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을 말하며, 그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권고의 말을, 박해자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신앙의 언어로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문학기법이다. 다니엘서의 일부와 요한묵시록이 대표적인 묵시문학이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묵시록”을 개신교에서 “계시록”이라고 부르며, 오해의 소지가 발생했다. 일부 사람들이 이 책을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예언서’라며, 현재에 벌어질 일에 대한 예고라고 주장하는 오류가 나타났다. 이러한 주장을 펴는 이들은 역사를 구약시대/ 신약시대/ ‘계시록 시대’라는 ‘시대 구분론’까지 만들어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론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그분이 세상의 구원자라는 것을 선포하는 “신약성경의 일부”이다.
4.2 근본주의
4.2.1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문자 하나하나가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문화–역사–언어적 해석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것이 오역이나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이라도, 그대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들은 특정한 구절이나 단어에 집착한다. 앞뒤의 문맥에는 관심이 없다. 특정 단어(본래의 의미는 상관없는 한글 번역)에 집중하여 그 의미를 과장하고 자신들의 논리를 펴는 데 이용한다. 이러한 이들을 만났을 때 앞뒤로 몇 장을 천천히 읽어보면 이들의 오류를 금세 찾을 수 있다.
4.2.2 성경은 긴 역사를 거치며 그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언어(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 역사–문화적 배경과 고대 언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바탕이 된다. 하지만 성경은 문맥 안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계획’이라는 큰 틀 안에서 ‘앞뒤의 단락과 더 큰 단위를 참고하며 읽으면’ 난해한 구절들도 이해할 수 있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4.3 종말론
유사종교들의 교주들은 대부분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앞선 사이비 지도자들의 저서나 강연, 그들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추종 등의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나름대로 변형 발전 시키며 이론화하고 있다.
4.3.1 시한부 종말론과 천년왕국설
유사종교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천년왕국설’이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성경을 거꾸로 거슬러 계산해보면, 6,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며, 제 칠 천년 기가 시작되면 새로운 천년, 안식의 때가 열린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날짜를 계산하면, 종말의 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등장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도 이 시한부종말론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성경은 구체적인 역사, 실제 역사(歷史)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그 하느님 앞의 인간은 누구인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인간과 이루시고 자 하는 바(구원)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성경의 관심은 정확한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 구원의 계획과 활동에 놓여 있다. 그래서 때로 역사적 사건을 말하지만, 전혀 역사와 무관한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시간을 계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4.3.2 조건부 종말론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날짜가 되어도 종말이 오지 않는다. 그러면 추종자들은 흔들리고, 집단은 와해된다. 그때 들고나오는 것이 바로 조건부 종말론이다. 조건부 종말론자들은 일정한 조건이 채워지면 종말이 온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주로 144,000 명설, 곧 자신들의 신도 수가 144,000이 되면 종말이 시작된다는 주장을 편다. 요호와의 증인과 신천지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신천지는 20만이 넘었다!) 신도들이 그 수를 넘어서면 새로운 이론들이 당장한다. 가령 ‘신실한 자 144,000명’ 또는 ‘흰 무리 이론'(묵시 7,9 참조) 등으로 그 반발을 누그러뜨리려 한다.
4.3.3 파괴적 종말론
시한부나 조건부나 사이비 종말론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을 말한다. 살아남는 자들은 오로자 자신들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일종의 공포감을 심어 자신들을 따라오게 만든다.
파괴적 환난의 때에 특정한 장소로 도피해야 한다거나 특별한 물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들도 이런 부류다. 피지로 이주시킨 신옥주의 은혜로 교회, 미국에서 온 베이사이드파(로사리오의 성모회)가 이런 부류다.
4.3.4 그리스도교의 종말론
마지막 때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주님이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 (마태 24,36; 마르 13,32) ‘주님의 날’, ‘마지막 때’, ‘심판의 날’ 등의 언사로 성경에 등장하는 이 날은,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 당신을 보여주시는 날이다. 이날은 주님 앞에서 모든 부정적이고 악한 것들이 사라지는 날이며, 동시에 미완성의 것들이 완성되고 부족한 것들이 채워지는 날이다. 이 날은 주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날이다.
우리의 종말론은 이처럼 구원론에 바탕한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 피 흘려 목숨을 바치심으로 써 이루신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바로 마지막 날이며, 예수님 재림의 날이다. 곧 종말은 파멸의 날이 아니라 완성과 구원의 날이다.
덧불여서, 성경에서 말하는 파괴적 종말에 대한 말씀은 회개로 이끌기 위한 경고, 곧 구원으로 초대하는 말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4.4 무속 신앙과 민간 신앙의 결합(종교혼합주의)
4.4.1 한국에서의 유사종교들은 무속과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신령한 세계와 접촉한다.’ 는 ‘특정 인물(교주)’과 만나서 그를 통해 ‘치유나 은사, 축복을 받는다.’ 말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 경우, 교주가 영매나 무당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교주의 입신체험(성령체험, ‘피가름’, 두루마리 사건과 같은 환시적 체험), 망아(忘我)나 황홀경에의 도달, 현세적 복락의 약속, 기성종교 교리의 수용과 변형, 범신론적 세계관, 치유–방언–예언 등을 그가 신과 소통하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경을 펼쳐들고 이야기하지만, 마치 무당이나 점쟁이나 불상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무속에다 그리스도교를 뒤섞은 것일 뿐이다(이런 것을 종교혼합주의 syncretism라고 한다). 예수님을 말하고 성경을 펼친다고 다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나자렛 예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이끌지,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을 신격화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4.4.2 한국인들이 민간–무속적인 것에 익숙하다는 점이 이러한 이들이 폭넓게 활동할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미신적 행위들'(사주, 관상, 손금, 궁합, 별자리, 이사나 결혼에 좋은 날(손 없는 날), 점, 철학관, 타로, 운세, 토정비결,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행동, 해나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 등)이나 ‘미신적 금기 사항들'(다리를 떨면 복 나간다,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지 마라, 밤에 휘파람 불지 마라, 문지방을 밟지 마라, 밥상 모서리에 앉지 마라, 밥그릇에 숟가락을 꽂지 마라), ‘일상의 언어 습관'(전생에 무슨 죄가 있다고, 귀신은 다 뭐하나, 다시 태어나면 ~하리라), 또는 유행이라고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좋다며 ‘남 따라 하는 것들'(기가 나온다는 돌이나 재료, 인도식 요가와 명상, 심신을 건강하게 해준다는 특별한 음악, 우주의 기운이나 자연의 기 등 뉴에이지에 속하는 것들)에 우리가 너무 쉽게 끌리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4.4.3 건강하든, 병들었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 산앙의 핵심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점쟁이나 무당이 말하듯이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사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고백과 사례를 통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자들,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자들로, 하느님의 계획 안에 사는 이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운명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4.4.4 다른 한편, 우리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미신과 불교의 영향에서 형성된 문화와 생활습관, 일상 언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무심하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눈으로, 신앙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부합하거나 신앙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수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어야겠지만, 반대로, 우리의 신앙에 저해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수정하고 변화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도전해야 한다. 언어도, 삶의 형태도, 문화도 다 복음화의 대상이다.
4.5 교주의 신격화
신흥 유사종교들은 자신들의 지도자(교주)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4.5.1 교주는 특별한 사람
첫째 유형은 교주가 선택받은 자라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직접 계시를 받는다거나, 하느님의 대전에 갔다 왔다거나, 예수님을 만났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죄에 물든 피를 빼내고 예수님의 피로 바꾸어 주셨다(피가름)거나, 예수님이 자신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전달해주었다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성경) 두루마리를 받아먹고 성경을 통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4.5.2 재림 예수
다른 유형은 교주가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한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표현들, ‘황금 등잔 사이에 서 있는 자, 하느님의 아들, 쌍날칼을 가진 자, 일급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자, 승리하는 이(이긴 자), 어린 양, 하느님의 인장을 지닌 자, 흰 말을 탄 이, 쇠 지팡이를 지닌 자, 동방의 의인’을 교주에게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은 ‘한국인 누구’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4.5.3 교주 신격화와 그 이유
교주를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를 신격화, 최소한 예수님과 동급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아니, 이러한 신격화의 더 깊은 배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을 부정하고 실패한 일로 치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밀어내고 새로운 구원자–자신들의 교주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4.5.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1코린 1,22-23) 우리 신앙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이다. 주일마다 고백하듯이,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곧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사건을 통해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미 예수님께서 ‘속이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셨다.
제자들이 따로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다. “저희에게 일러 주십시오.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스승님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표징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마태 24,3-5; 참조 마르 13,4-6; 루카 21,7-8)
이러한 유혹자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이들을 이기는 힘은 기도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4.6 기성 교회 비판
4.6.1 유사종교들은 기존 교회의 문제들 – 성 추문, 물질 관련 비리, 교회 내 권력 다툼, 교회 세습이나 집단 이기주의 등을 강조하며, 현재의 교회가 부패했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교회를 ‘탕녀 바빌론’이라고까지 부른다. 일부 유사종교 짐단에서는 교회의 투문들과 비판의 목소리를 자료로 정리(신문 스크랩, 인터넷을 통한 검색 자료 등)해서 보여주기까지 한다.
4.6.2 사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교회 안에도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정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드러난다. 범법 행위만이 아니라, 반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문제까지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신앙을 찾아온 이들은 자신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이러한 추문 앞에서 실망한다.
4.6.3 이러한 비판은 일면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목적이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 비판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집단이 기존의 교회와는 다르며, 소위 ‘성경적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 주장은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실망한 이들을 유혹하기 위한 발판이다.
4.6.4 반면,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에 대한 공격이라고 판단되는 여러 문제 제기들(교리. 사회 윤리적 문제, 가정문제, 재산문제, 성범죄 등)에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소송이나 시위 등을 감행한다. TV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방영이 예고되면, 법원의 가처분 신청을 넣어 방송을 못 하게 하기도 하고, 신문사나 방송국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하거나 시설의 점거가지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반강제적인 집단행동은, 자신들의 비리가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신도들에게 자신들의 집단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이것이 열성을 드러내는 길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집단에 제기되는 문제들로 인해 흔들리지 않게 유도하며, 탈퇴를 막는 효과를 먿기 위한 것이다.
4.6.5 교회는 순수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는 이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한 이들이 모인 곳이다. 죄인이며 부족한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을 찾아와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순명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그래서 교부들은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에 머물지 않는다. 끊임없이 쇄신하고 변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또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주님은 이러한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를 베푸시고 다양한 성인들을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교회가 성장하고 하느님 나라의 증인이 되도록 이끄신다.
4.6.6 교회 내부에 문제들이 생겨나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죄에 대한 인식이며, 이는 회개와 쇄신의 기회이기도 하다. 기꺼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며 겸손하게 새로운 변화의 길을 찾아가는 교회, 그것이 진정 ‘주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의 모습이다. 비판은 성장을 위한 것이어야지 파괴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4.7 소규모 집단
유사종교들은 수십만에 이르는 집단도 있지만, 대부분 100–200명 내외의 소규모 집단이다. 이러한 규모의 특징은 깊은 인격적 만남과 상호 이해에 바탕 한 강한 상호결집력으로 이어진다. 규모가 커진 집단들도 지역마다 작은 단위의 소집단을 만들어 초기의 초기의 운영 방식을 이어가게 한다. 그 안에서 신도들은 이 집단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일종의 ‘행복감’ (집단 소속감을 통한 안정감)마저 얻는다. 그래서 일부는 이 집단이 사이비라는 것을 알지만, 이러한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대로 머물러 있다. 신앙의 이유가 아닌 인간적 관계에 얽혀, 인생을 망치는 그물에 스스로 갇혀 있는 것이다. 단호하게 결단을 내리고 관계를 끊어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
4.8 비밀주의
이러한 집단들은 그 교리나 실천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쇼규모라는 이유도 있지만, 비의적인 교리나 실천, 헌금과 재산의 활용, (비)윤리적인 부분 등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일종의 ‘비밀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비밀주의는 의문을 품거나 탈퇴하는 이들이 등장할 때 문제가 된다. 짐단의 비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들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부드러운 방법부터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까지 사용한다. 이른바 ‘악에 물든’ 이들을 감금하거나 폭행을 가하기도 하고, 탈퇴한 이들의 집까지 찾아가 협박하기도 한다. 미국의 ‘인민사원(Peoples Temple of the Disciples of Christ 1953-1978)’, 한국의 ‘오대양'(1987) 등은 집단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간 대표적인 예이다.
4.9 민족주의
—유사종교들은 ‘선민의식'(뽑힌 사람들)을 강조한다. 한반도가 세계 변화의 중심이 되고, 한민족이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인데, 뽑힌 이들이 그 중심이 될 것(임금이 되어 다스린다)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다른 나라의 유사종교들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국의 ‘전능신교’는 중국 한족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새로 서로 선택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선민사상의 바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스라엘이 실패해서 한(韓)민족이 선택되었다는 주장과 동학에서 출발한 ‘후천개벽’ 사상과 연결되는 주장이다. 민족주의적 선민의식이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이나 특정 교주 추종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지는 몰라도, 성경이나 그리스도교 전통과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주님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마태 28,19).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민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가가 핵심이다.
4.10 성경과 신앙고백
그리스도교는 나자렛 예수님, 복음과 역사가 증언하는, 심자게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기초한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읽고 교회의 가르침을 들으며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구세주)라는 고백에 이르고 그를 통해 구원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성경을 펼치고 그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교는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거리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듣고 보는, 또는 직접적인 만남으로 마주치는 많은 유사종교 추종자들은 성경을 들고 있지만, (우리의)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만일 누군가 다가와 성경을 펼치고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믿는 그 예수님’ 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유사종교에 빠진 이들은 ‘우리 신앙의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도자(회장, 목자, 선생 등의 호칭으로 불리는 이들, 흔히 교주)를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영을 받았다기도 하고, 성령의 화신이라고도 하고, 성경이 말한’오실 분’이라고도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 신앙의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도자가 현 세상에 나타난 구원자라는 것을 주장하려 그런 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우리 신앙의 예수님이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은 그분이 그리스도(=메시아=구원자)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기에 그들의 종교 예식에서, 많은 경우,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신앙고백 –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유사(!)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논리(교리)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본적인 ‘하느님의 자기 계시’ (당신이 누구신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것)는 성경에 담겨 있다. 이렇게 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활동, 곧 말씀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에 대한 앎을 체계적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교리이며 신학이다. 곧 교리와 신학의 출발점은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유사종교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 지도자(교주)의 체험과 삶에서 나온 것, 곧 (인간) 교주에게서 나온 것을 성경을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그가 깨달은 것이 성경에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주변에서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고 그들이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체험하고 있다. 책에서, 강단에서, TV나 영화에서, 스님의 설법에서도(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거나 강조하기 위해)그렇게 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나자렛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이들이다. 이 믿음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아야 한다. 그 길은 성경, 특히 복음을 자주 읽고 묵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때 우리는 어떤 개념이나 상상의 주님이 아니라, 계시된 말씀,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구체적인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