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회적 원인
신흥종교들이 발생하는 시기를 살펴보면 유사한 사회현상들이 나타난다.

급격한 사회의 변동과 불안이 증가할 때 나타난다.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 6·25 전쟁기와 그 직후 등,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을 구원해주겠다며 자신을 따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고, 그들을 숭배하는 이들이 모여들어 종교를 형성했다.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 물량주의(더 많이 더 크게), 개인주의의 팽배와 무한 경쟁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실패한 이들, 패배한 자아를 찾고 삶의 의미를 되찾고자 한다. 유사종교들은 소규모 집단이라는 특성으로 강한 집단의식을 강조한다. 거기서 소외를 겪던 이들은 위로를 얻으며, 비록 그 논리나 행태가 이상하다 해도 일정의 ‘행복감’을 느끼며 그 안에 빠져드는 것이다.

기존 권위의 약화도 그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다원화이다. 다원화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게 해주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단번에 결정하고 방향을 정해 이끌어가는 강력한 권위를 사라지게 했다. 이 속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하는 교주는 권위 있는 모습으로 보여 의지할 곳, 나아갈 방향을 찾는 사람들을 현혹하게 한다.

가치관의 변화도 한 몫을 한다. 예전에 절대적인 것들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면, 지금은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 이는 개인의 취향이나 주장에 대한 존중이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때로 아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체적 판단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거나 자아의식이 완전히 형성되지 못한 이들은 방향성을 잃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다. 유사종교들이 파고드는 틈이 바로 이곳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꼽기도 한다. 경제 성장과 발전은 사회를 번영하게 하는 것 같지만 언제나 그늘을 동반한다. 그 그늘에 있는 이들은 성장과 발전의 혜택에서 멀어지고 더 많은 박탈감을 갖는다. 그 박탈감을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을 유사종교들이 파고든다.

이러한 사회적 원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소외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감에 찬 이들, 유행하는 말로 ‘인싸'(insider)는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지만, 약한 이등은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바란다.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주고 인정해주길 바란다. 그러한 심리를 파고들고, 그러한 마음을 키우도록 유도해 유사종교들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드러난다. 바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야학 이,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득의 벗이 되엊고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2 종교적 원인
사회의 문제만이 신흥유사종교현상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 교회 내부의 문제도 이러한 현상에 신자들이 빠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① 신자들의 증가와 대형교회의 출현은 교회 안의 익명화와 소외를 가져왔다. 굳이 내 이름을 밝히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교회에 다닐 수 있다(익명화). 그런데 교회에 나와 보면,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인사하고 함께 하고 있다. 그런 자리에 끼지 못하는 이들(냉담했던 이, 이사 온 이, 신 영세자, 소심한 사람 등등)은 교회 안에서 배타적인 문위기를 느낀다. 함께 앉아 있지만 홀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소외). 복음에 따른 삶을 꿈꾸며 행복을 느끼겠다고 왔는데 반대로 불행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에게 유사종교로 끌고 가려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교회가 커지다 보니 많은 재정이 요구된다. 화려함과 편리함, 확실한 냉난방 등, 신자들은 집에서 누리는 것을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교회 지출의 상당 부분이 교회 내적인 수요를 위해 쓰인다. 한편, 주간 평일의 모임이나 모임 이후의 식사 등은 여유가 있는 이들이 아니면 힘들다. 신앙도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자연히 여러 이유로 시간이나 물질의 여유가 없는 이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신앙 교육의 부재 : 첫영성체 준비자, 세례 예비자, 견진 준비자가 아니면 교리를 배우는 시간이 없다. 예비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배우다 보니 세례 이후에 대부분의 교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견진 때도 비슷하다. 교리지식이 신앙의 전ㅂ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교리마저 모른 채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엉뚱한 교리를 들고 접근하면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구분할 수 있겠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교리교육이 제대로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교리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구세주)께 대한 고백이다. 주 그리스도님께 대한 신앙고백–믿음에 이르지 못한 채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주님을 부정하며 새로운 구세주를 내세우는 유사종교의 논리에 이끌려 신앙에서 멀어지고 있다.

기복적 현세적 신앙 : 신앙교육의 부족함은 신앙을 잘못 이해하게 이끈다. 대표적인 것이 현세적 복락이다. 그리스도교는 현세적인 복락을 말하는 종교가 아니다. 물론 은총(!)은 그 모든 것을 허락하지만. 우리 신앙은 나의 욕구 해소를 위한 것, 곧 ‘나를 위한 종교’, ‘나 중심’이 아니다. 우리 신앙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중심이시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현세적인 복락을 얻고자 한다. 마음의 평화가 가장 대표적인 표현 중 하나일 것이다. 구원–하느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한 희망이 우리 신앙인데, 그것을 놓치면, 현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는 소리가 좋은 말로 들리기 마련이다.

종교인들에 대한 실망 : 김수환 추기경, 이태석 신부 등은 신앙인들에게 자랑이며 모범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런 모델로서의 성직자, ‘교회의 어른’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추문과 관련된 이, 구태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려 하는 이, 고압적인 태도로 신자들을 대하는 이 등을 지적하며, 성직자나 수도자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실망은 교회를 떠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원인이 된다. 신흥유사종교들은 이러한 단면들을 들어 ‘교회가 부패했다’, ‘복음이 없다’는 말로 교회를 공격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마치 순수한 양인 것처럼 가장한다.

신앙과 삶의 분리 : 주일 교중미사가 끝나고 성당 마당을 벗어나면, 좀 전의 신심 깊은 이는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과 주장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뛰어다니는 이로 ‘변신’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신앙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고, 울타리 밖은 다른 논리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이중적인 삶의 모습, 그것이 신앙을 자꾸만 변형시키는 원인이 된다. 복음에 따른 삶은 교회 울타리 안과 밖 어디서든 추구해야 한다.

신앙의 열성과 갈망 : 신앙에 대해 좀 더 알고 더 느끼고 더 확실하게 체험하고 싶은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미사에 참여하고 피정이나 교육에 참가하고, 성지 순례도 가고, 강연과 도서와 영상을 통해 배우기도 한다. 그런데도 기존의 교회 안에서 그 갈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는다. 이런 이들에게 ‘쉽게 알 수 있다.’ ‘쉽게 체험할 수 있다.’ 또는 ‘더 자극적이다.’ ‘더 뜨겁다.’ ‘거기서만 이루어진다.’ ‘이 사람을 통하면 된다.’는 말은 큰 유혹이 된다.
또는 갈망은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밋밋한 신앙’, 또는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묵시 3,16)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그래도 그 안에는 ‘나도 무언가 신앙인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깊은 갈망이 있다. 그 갈망을 건드리며 유사종교가 파고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나 스스로 하는’ 기도와 침묵, 삶에 대한 깊은 반성, 하느님의 뜻을 찾는 묵상이 없으면, 다 흩어지는 말일 뿐이다.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그것은 나의 신앙, 나의 체험이 아닌 남의 것일 뿐이다. 신앙의 갈증이 있다면, 어딘가를 또는 누군가를 쫓아갈 것이 아니라, 멈추고 내려놓고 나 스스로 주님 앞에 나가야 한다. 내가 일어나 주님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지적은 교회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신앙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야 하는지 자주 놓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신앙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분을 통해 얻는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를 위해 성사가 있고, 축제와 전례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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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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