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유사성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부분적 유사성
family resemblance
가족끼리는 닮았다. 나는 아버지의 코와 눈매가 닮았고, 큰아버지와는 눈매와 눈썹이 닮았다. 어머니와는 턱과 머리카락이 닮았고, 동생과는 입과 머리카락이 닮았다. 다른 가족들 모두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한 구석이라도 닮지 않은 가족은 없다. 두세 군데 이상 모두 닮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는 아버지와 입이 닮지 않았고, 큰아버지와는 머리카락이 딴판이다. 동생의 키와 전혀 닮지 않았고, 할머니의 눈매와도 다르다. 다른 가족들 모두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들 가족을 보며 모두들 “아하, 가족이구나!” 하며 인정한다.
이처럼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인 특성은 없지만, 부분적으로 유사한 특성들이 연결되어 가족구성원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유사성을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라고 말한다.
게임놀이은 가족유사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다. 개별적 게임들은 저마다 다른 규칙에 따라 수행된다. 가위바위보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지만 쥐불놀이와 강강술래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다. 말뚝박기를 하려면 4명 이상이 필요하지만 윷놀이는 2명만 있어도 된다. 농구와 축구에는 공이 필요하지만 탁구와 테니스엔 라켓이 필요하다. 이처럼 다양한 게임들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적인 특성은 없지만 우리는 이것들을 한데 묶어 게임이라고 칭한다. 이등 사이엔 가족유사성만 있을 뿐 게임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 특성은 없다.
참 싱거운 얘기다. 그러나 이싱거운 얘기가 현대철학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는 혁명적 역할을 한다. 비트겐슈타인L. Wittgensein이 그렇게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과 마찬가지로 모든 언어에 공통적인 본질이란 없다고 말한다. 언어는 게임처럼 가족유사성만 가질 뿐이다.
이러한 입장은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과거에 주장했던 내용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전반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를 비추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언어의 본질은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언어의 구조는 세계의 구조와 동일하다고 보았다. 모든 언어의 본질은 동일하며, 그 언어적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철학자의 임무라고 보았다. 따라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일체의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앙, 사랑, 믿음, 아름다움, 윤리 등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이므로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반기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세상사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과학적 탐구의 대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대상. 이 가운데 철학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을 뿐, 과학적 탐구의 대상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 침범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철학은 과학이 아니며 그렇다고 고매한 형이상학과 신비주의적인 영역에 대한 알쏭달쏭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주술도 아니다. 철학의 고유영역은 언어분석에 한정해야 한다.
그러나 후반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다물었던 입을 떼어도 좋다고 말한다. 모든 언어를 아우르는 보편적 특징은 없지만 각기의 언어들은 가족유사성을 지님으로써 모두 언어라고 불릴 자격을 갖추게 된다. 각기의 언어는 게임처럼 언어 내부의 규칙에 다라 운용되며, 그 규칙을 파악하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ㅁ누화와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에컨대 미국인들은 무언가 놀라운 일을 접할 때 “오 마이 갓!Oh, my God!“이라고 말한다. 전반기의 비트겐슈타인이었다면 이 표현은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신God은 말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반기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도 철학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오 마이 갓!”이라는 표현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도 내뱉는다. 그러한 표현은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에 다른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그러한 표현이 ‘놀라움’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규약이 있다. 철학은 개별적 언어들 내부의 규칙을 파악함으로써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분야이다. 언어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 원리는 없지만 개별적 언어에는 제각기 규칙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가족유사성 개념은 이후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분야가 예술이다. 예술은 참으로 정의내리기 힘든 분야이다.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 등을 통해 예술에 대한 보편적 정의가 시도되었지만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제기된 것이 예술의 가족유사성이다. 즉 예술 또한 게임이나 언어처럼 가족유사성만 있을 뿐 예술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 특징은 없다는 것이다.
영화와 문학은 복제가 가능하지만 연극과 음악은 복제되지 않는다. 미술과 연극은 시각예술이지만 음악은 청각예술이다. 돈을 받고 예술품을 파는 경우도 있지만 순수하게 작가정신에 입각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에술활동도 있다. 이들 예술분야를 모두 아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은 가족유사성 개념에 입각해 파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될 수 있다. 가족유사성 개념은 이처럼 다양한 현대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채석용, 『철학 개념어 사전』(서울: 소울메이트, 2010), 23–27.
1개의 댓글
Sweet web site, super design and style, very clean and utilize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