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은혜를 베푼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곤 하는데, 이는 베푼 쪽의 자존심과 받은 이의 자존심 사이에 무언가 계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에는 옳지 못한 면도 있으며, 그 깊은 곳에서는 이해관계가 작용할 때도 있다. 그러니까 감정이 아무리 온당하게 보이더라도 그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결점이 있으나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시당하는 사람도 있다.
겸손은 때로는 거짓 복종을 의미한다. 일단 밑으로 들어갔다가 훗날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겠다는 계략을 품고 있다. 자존심은 천태만상 자유자재로 변화가 가능한데, 겸손이라는 탈을 쓸 때만큼 멋지게 사람을 속일 때가 없다.
나태에 한번 빠져들면 열렬했던 추구도, 확고했던 결심도 순식간에 중단된다. 나태란 영혼의 중독과 비슷하다. 잃어버린 모든 행복과 모든 손실을 입어버리라고 유혹한다. 그리하여 나태는 그 어떤 큰 배라도 멈추게 할 수 있는 빨판상어와 같다. 암초와 폭풍보다도 위험한 잔잔함이다.
남의 일에 관여한다고 나쁠 것은 없다. 다만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야 하며 절대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남의 마음속에 지나치게 파고들어가지 않는 것이 예의다.
내 안에서 마음의 평온함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다른 데서 찾으려 해도 헛수고일 뿐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타이를 수 있는 결점을 타인에게서 발견하는 법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는 그 대부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로부터 생겨난다.
다시 맺어진 우정은 갈라져본 적이 없는 우정보다도 어딘지 모르게 손이 많이 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의 천성에 따르기를 거부한다. 결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보여질 수 없는데도 쓸떼없이 자신과 다른 인격체로 보이려고 애를 쓴다.
뛰어나지 못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렵다.
미덕의 조직 속에는 악덕이 포함되어 있다. 약을 조제할 때 독소가 들어가는 것처럼, 빈틈 없는 지혜는 양쪽을 적당히 섞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그것을 잘 사용한다.
부러움은 우리가 선망하는 사람의 행복보다 언제나 오래 지속된다. 시기하는 마음 또한 증오심보다 더 오래간다.
사람 중에는 꾸미는 데만 치중하여 타고난 모습을 버리려 애쓰는 부류가 있다. 인간이 흔히 다른 이에게 불쾌감을 주는 이유는 자기의 지금 얼굴에 외양과 태도를 일치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말투와 말쏨씨가 생각이나 감정과 별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이 너무 가까이에서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을 대부분의 경우에는 싫어한다. 누구나 특유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봐주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실제보다 높게 아니면 낮게 보기를 좋아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결과 수많은 거짓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마음속을 다른 이에게 내보이기를 꺼리며,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마음속을 누군가에게 간파당하는 것은 매우 싫어한다.
사람들은 허영심이나 우쭐하게 해주는 것들에 익숙해져 가벼운 기분으로 그것을 좇는다. 다른 사람들이 좇으니까 자기도 좇는 것이다.
사람이 악덕을 비난하고 미덕을 찬양하는 것은 모두 이해관계 때문이다.
사랑은 열병이다. 격렬함에서나,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나, 그 어느 쪽도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해도 너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지혜와 사랑은 양립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지혜는 반대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연애를 시작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있는데도 사랑을 포기하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사실 우리가 미덕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여러 종류의 행위와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한 군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행운 혹은 책략이 그런 것들을 그럴싸하게 미덕으로 포장해놓은 경우가 많다.
상대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보통 사랑은 점점 멀어지는 반면 커다란 사랑은 점점 커져간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지지만 화재의 불길은 더욱 거세지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권력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권력보다 더 크다.
성인군자들의 냉정이란 마음의 불안과 동요를 가슴속 깊이 숨기는 기술이 뛰어남을 말한다.
신뢰는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그것은 상대에게 바치는, 또한 상대의 성의에 맡기는 공물이기도 하다. 그에게 나에 대한 일정의 권리를 주고,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다만 신뢰에 한계를 두어 그 선을 깨끗하고 성실하게 지킬 필요가 있다.
실컷 게으름을 피운 자일수록 다른 이를 서둘러 족치는 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부지런한 듯이 보이려고 한다.
야심이나 사랑처럼 강렬한 감정만이 모든 감정을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전혀 대단치 않게 보이던 귀찮음이 때론 모든 감정의 우두머리를 차지한다. 귀찮음은 삶의 중요한 야망과 실천을 침식해버린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모든 열정과 미덕을 파괴하고 좀먹게 한다.
야유를 당하고도 반박할 만한 재치가 없는 사람이나, 아픈 데를 질리고도 얼굴만 붉히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패배를 당한 것처럼 불끈 화를 내기 마련이다.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사람보다 휠씬 불행하다.
어떤 사람들은 ‘불멸의 고뇌’라는 영광을 동경해 비탄에 빠진다. 시간이 고통을 희미하게 만들어줬는데도 여전히 눈물이나 한숨, 불평을 끈질기게 보여주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것이다. 슬픈 역할을 도맡아 온갖 제스처로 연기를 하며, 자신의 아픔이야말로 죽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호소한다.
우리가 남의 장점을 크게 떠들어대는 것은,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들 자신의 식견을 돋보이려는 의도에서다. 타인을 칭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이 칭찬받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진실한 가치에 의해 뜻있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운에 의해 세상의 인정을 받는다.
우리는 자기와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만을 ‘양식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보다는 행복하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렇게 믿어달라고 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우리들이 새로 사귄 친구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옛 친구에게 싫증이 났다든가 변화를 즐기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접 받기 위해 새로운 친구를 원한다.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우리를 판단한다.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 바치는 경의를 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보다 오리혀 나쁜 짓을 해주는 편이 덜 위험하다.
이해타산은 모든 죄악의 근원으로 비난받고 있으나, 동시에 모든 선행의 근원으로서 찬양받을 자격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은혜나 모욕을 망각하기만 하는게 아니다. 은인을 미워하는가 하면, 더없는 모욕을 안겨준 상대를 감싸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존심에서 나오는 가장 위험한 것이다. 자존심은 날이 갈수록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불은을 명예로 삼는다. 자기는 가혹한 운명의 포로가 될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타인에게 자랑하며 자신 또한 타이른다.
정의란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지나 않을까?’하는 의구심이다. 이웃 사람의 이해관계를 존중하며 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결국은 이런 생각에서 나온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의와 교모하게 꾸며진 속임수를 식별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질투는 모든 고통 가운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렇기에 질투심을 안겨준 장본인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연민의 정을 일으기게 하지 않는 것이다.
첫사랑에서 여자는 연인을 사랑한다. 두 번째 사랑부터는 연애를 사랑한다.
충고를 구하거나 해주는 것만큼 엉터리 짓이 없다. 구하는 쪽은 제법 진지하게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셈은 다르다. 상대로 하여금 같은 의견을 갖도록 만들어 자시의 증인으로 삼겠다는 생각밖에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충고를 해주는 족도 나름의 속셈을 갖고 있다. 충고를 부탁해온 기대에 보답하는 정도의 성의를 표시하면 그만이다. 충고를 해주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올 명예나 이익 혹은 손해를 따지느라 분주하다.
친구가 역경에 처하면 우리는 언제나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친구가 행복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선량함도 아니고 우정 때문도 아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행복하게 될 차례가 왔다든가, 또는 친구의 행운 덕으로 뭔가 좋은 일이 있겠지 하고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자기애 때문이다.
친하게 지내려면 상댕게 당연히 신경을 써주어야 겠지만 그 경계는 분명히 해야 한다. 즐겁게 해주려고 맞춰주는 것이 도가 넘으면 추종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담만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고선 의미가 없다. 내켜서 맞춰주고 있다는 점을 상대가 느껴야 한다.
큰 도랑이라는 것은 자존심의 눈물겨운 노력이 주는 선물이다. 이 노력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큰 죄를 범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좀처럼 상상도 하지 못한다.
타고난 잔인성도, 자기애가 만들어내는 것만큼 잔인한 인간을 만들지는 못한다.
타인에 대해서 자신을 속이는 행위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드디어는 자신에게마저 자기를 속이는 지경에 이른다.
허영이라는 길벗이 없다면 미덕은 그렇게 멀리까지는 가지 못할 것이다.
후회한다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뉘어쳐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내게 돌려줄 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힘에서, 그것을 보존하고 싶은 욕망과 잃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빈 껍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