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사위정사상과 개화사상
1. 척사위정사상
(1) 사상적 기반
리(理) 중심적 사상은 척사(斥邪) 또는 척화(斥和)와 같은 강한 현실관을 가지게 되어 척사위정사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척사위정론자들은 ‘리(理)’ 절대적 위치를 확보하는데 그 핵심이 있었다. 이것은 당시 지켜야 할 ‘바른 것(正)’이 무엇이며, 내다 버려야 할 ‘나쁜 것(邪)’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그들의 필요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또 이것은 리(理)는 선의 근원이며 기(氣)는 악의 근원이라는 주자학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무엇보다도 어느 것이 선하고 어느 것이 악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분명한 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그존의 주자학적 봉건 질서를 선한 것으로 파악한 반면,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세력을 악한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리(理) 중심론자들의 현실관은 주로 척사·척화의 반침략·반외세 사상으로 구체화 되었으며, 그들이 지켜야 할 ‘리(理)’의 세계는 당시의 봉건 체제였다. 이로 인하여 반봉건 의식이라든가 근대를 향한 전망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한계는 척사위정사상의 한계로 연결되었다.
(2) 척사위정운동
척사위정 사상은 병자호란 직후 화이관(華夷觀)을 바탕으로 한 소중화(小中華)론의 제기와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학에 대한 수차례의 탄압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개항기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척사위정 사상이 천주교의 전래에 따른 전통적 가치 질서의 혼란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시기에 싹튼 위기의식은 외압의 성격이 군사적·경제적인데다 직접적이고 강력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 대응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 척사위정 운동 형태로 발전해 갔으며, 아울러 반침략이라는 역사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① 첫 번째 단계 : 대원군의 쇄국 정책기
–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철저하게 지지하는 가운데 전개됨
–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이항로와 기정진의 상소를 들 수 있음
– 서양을 부모와 자식 사이, 임금과 신하간의 윤리, 태극과 같은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 없이 재화와 여색만을 중시하는 오랑캐로 여기고 있음
– 서양의 상품은 모두 사치품이라고 여김
– 대외적으로 국방력의 강화를 통한 척화를 주장함
② 두 번째 단계 :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은 시기
– 척사위정론이 일본과의 개국 통상과 관련하여 시기
– 척사의 주된 대상이 일본이 됨
– 서양과 일본은 같다는 ‘왜양일체론’을 내놓게 됨
③ 세 번째 단계 :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을 가져온 후의 시기
– 영남·경기·호서·호남 지방 등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됨
– 서구 열강과의 개항 통상을 반대함
– 당시 개항을 주도하던 개화파와 정면으로 맞서게 됨
※ 척사위정사상은 반침략·반외세의 특성이 두드러진 사상이었지만 봉건질서 유지라는 주자중심의 성리학적 사상적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사상이었기 때문에 민중의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척사위정사상은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사상적인 한계를 나타내며 더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2. 개화사상
(1) 온건개혁파와 변법개화파
개국 이후 정부의 소장관료층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층들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의 실정을 접하면서 서양문화를 단순한 이단의 문화가 아니라 또 하나의 보편 문화로 인식하여 서양문화의 수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그러한 개화를 구상하였다. 이때 그들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양식의 병기와 화륜선이었다. 그것은 개항이 일본의 서양식 병기와 화륜선의 위력에 조서이 굴복하는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훗날 개화파라소 불리는 이들은 당시 부국강병이라는 목적 위에서 ‘서기(西器)’ 수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① 온건개화파(동도서기파)
1880년 김홍집(金弘集, 1842~1896년) 일행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일은 조선 정부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국제 정세를 세롭게 인식하고 ‘서기’의 수용의 방법론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김홍집 일행은 일본에서 주일 청국 공사관의 하여장(何如障) 등에게 국제정세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조선 외교의 진로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또 황준헌(黃遵憲, 1848~1905년)은 김홍집에게 자신의 저서인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전달하였고 김홍집이 가지고 돌아온 『조선책략』의 사상은 당시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조선책략』은 ‘서양의 오랑캐’ 미국과의 수교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홍집은 동도(東道)는 정덕(正德)을 위한 것이고 서기는 이용후생을 위한 것이라고 하여 서기수용과 유교윤리의 보존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880년대 초의 이러한 서기수용 논리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개화파의 온건개화파(동도서기파)로 이어졌다.
* 조선책략: 원명은 《사의조선책략(私疑朝鮮策略)》이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일본·청국이 장차 펼쳐야 할 외교정책을 논술하였다. 조·일·청 3국은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 러시아의 남진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동양 3국이 수호(修好)하여야 하며, 미국과 연합하는 것(親中國 結日本 聯美邦)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동도서기’론의 입장을 갖는 온건개화파의 논리가 일단 국론으로 자리잡아갔다. 그래서 김윤식(金允植, 1835~1922년) · 어윤중(魚允中, 1848~1896년) 등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그 우수성과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신문화는 동양의 유교가 훨신 우월한 것으로 자부하였다.
② 변법개화파(문명개화론자)
김옥균(金玉均, 1851~1894년) · 박영효(朴泳孝, 1861~1939년) 등은 서양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에 대해서까지도 보편성과 우월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구래의 유교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운 시대의 보편문화가 될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로써 후자의 김옥균 등은 ‘동도서기’론의 틀을 벗어나 ‘변법개화파(문명개화론자)’의 범주로 이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조선은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 문명의 단계로 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변법개화파(문명개화론자)의 사상은 정부 내의 소수 관료층 외에 지지 세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법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급진적 개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변법개화파는 서양문화를 새로운 시대의 보편문화로 받아들이고 기독교까지 포함하는 서양문화의 전면적 수용을 통해 개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길만이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상각했다.
(2) 사회진화론의 한국적 수용
서구에서는 사회진화론이 강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약자의 패배를 당연시하는 논리로 작용하였다.
* 서구가 들어와야 조선이 근대화(서구화)된다.
* 조선은 야만족이다. 석가 들어와야 한다.
* 우리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서구가 들어오는 건 당연하다. → 사회진화론 식민지걸설 옹호
*범아시아주의→서구의 사회진화론을 일본이 자기화시켜 만든 말(야심의 상징)
그런데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강국이 되기 위한 사상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즉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문명개화(文明開化)를 추진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19세기에 사회진화론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여 사회진화론적 사상을 기록에 남긴 것은 1882년경 『경쟁론』을 저술한 유길준이었다. 유길준은 1881년 일본에 건너갔다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년)가 설립한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당시 일본에 도입되었던 서양의 사회진화론을 접하게 되었다.
사회진화론은 약자의 강자에 대한 투장을 합리화 시키는 동시에 강자의 약자에 대한 찾취와 수탈도 역시 합리화 시킨다. 그러므로 많은 개화파 지식인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참략을 불의로 규탄하기보다는 우리의 허약함을 자책하는 것으로 그쳤다. 우리의 주권을 빼앗고자 하는 제국주의 열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막고 나아가 탁구을 침탈할 만한 힘이 없는 우리가 잘못된 것이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들은 본래 생존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다라서 개화파는 오직 힘만이 진리라는 인식하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미화(美化)시켜버렸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우리의 실력을 양성할 것을 말하면서도 실력이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국이 독립할 자격이 없다든가 또는 일제의 보호 하에서 실력을 길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 실력양성운동(선 실력양성 후 독립)
1. 자강운동 등
2. 문화운동(이광수, 민족개조론: 우리민족은 일본민족으로 개조되어야 한다)
3. 자치운동
* 여기서 실력이란, 서구중심의 실력, 학문을 말함
* 외적으로는 식민지하의 일본 이익, 내적으로는 자본자계층의 이익
한말에서부터 일제하에 이르기까지의 자강운동론·실력양성운동론·문화운동·자치운동 등은 모두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그 노선을 설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주창자들은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약자는 강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불가피하며, 따라서 한국 민족의 경우에도 독립할 수 있는 자체 역량이 없다면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때 자체 역량이란 흔히 부국강병으로 표현되는 서구의 근대문화, 즉 자본주의적 문명의 수립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 자본주의 문화를 갖지 못한 한국문화는 열등한 문화이며 그러한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한 한국민족은 열등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논리들은 본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주의(植民主義) 이론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그것이 비판적으로 극복되지 못한 채 내재화되어 개화파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3) 개화파의 활동과 영향
개화파 지식인들은 서양 근대문화의 기저에 흐르는 속성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지 못했으며,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서양문화는 오로지 ‘부국강병’을 중심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부국강병’의 이면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속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였다. 또한 그들은 외세에 의존해서라도 정권을 장악하고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했던 외세, 일본은 진정으로 개화파를 지원하여 조선의 개화를 돕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본은 청불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청국의 관심이 다소 이완된 틈을 타 조선에 친일적인 정권을 세워 일본세력이 한반도에 본격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지국주의 정책을 펴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일본의 지원만을 믿고 봉기한 개화파는 실패하였고, 그로인해 청나라의 간섭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개화운동·근대화운동 발전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일본을 지나치게 신뢰하면서 민중들을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특히 개화파는 근대 개혁의 관건이 되는 봉건적 토지 소유 문제에 대하여 지주제를 그대로 인정한 위에서 세제개혁 차원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지주의 입장에 섰던 개회파는 종래의 지주적 토지소유를 유지하면서 이를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키려 했기 때문에 반봉건 투쟁에 철저하였던 민중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 농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지주제 존속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식민지화를 꾀하던 외세와 이해가 일치하였다. 개화파는 외세에 철저하게 대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성을 간과하고 침략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근대주의의 성향을 띠었다. 개화파의 이러한 한계는 정권 탈취와 개혁에 일본을 이용하려던 자신들의 주관적 의도와는 달리침략자를 원조자로 잘못 파악하여 일본에 이용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개화파의 사상은 온전한 근대 개혁 사상의 성격보다 서세동점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대응하여 개국을 통한 부국강병을 사회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한 권력 핵심이나 주변부의 외세의 창구 역할을 했던 지식인 중심의 사상이었다. 그들은 봉건적 소유제은 지주제를 그대로 두고 세제 개혁의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으므로 민중을 끌어들이지 못해서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것은 개혁의 주체가 지주제에 기반을 둔 봉건 지배계급의 개명관료였고, 이들은 세도정권의 핵심 가문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실무관료로 발탁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 외래 사조의 기능적 실용성에 대하여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개화파는 대부분 후에 친일파로 전락하거나 이들에 동화된다. 이들은 주로 서울과 근기 지방의 세도정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개화기 서구 문물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자들에게 있어서는 근대화 또는 문명화가 결국 서구를 모방하는 것이고, 자기 전통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곧 문명화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유길준의 『서유견문』에 보면 이러한 태도를 ‘개화의 병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일제시대와 해방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자기 상실의 원인이 되고 있다. 더불어 권력에 대한 애착과 기득권의 보호와 유지를 바라던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오히려 현실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결국 강자인 외세를 추종하거나 흡수되어 민족사의 전면에서 긍정적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