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학사상
1. 실학사상의 대두(擡頭)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조선 후기에 들어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여러 방면에 변동이 일어나는데, 이 변동에 따른 여러 가지 체제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나가려는 운동이 일부 선각적인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다. 실학사상의 대두가 바로 그것이다. 실학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에 대두하여 영·정조 때에 전성을 이루었던 학술 사상(史上)의 한 경향을 말한다. 이 실학사상은 우연히 대두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사회 등 전반적인 변동에 따른 역사적 산물이다.
2. 실학사상의 배경
(1) 사상적 배경
조선 중기 성리학이 자리를 굳혀가던 시기에 이황이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면서 성리학은 주자학 일변도의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 뒤 송시열과 그 후예들은 경전 해석에서 주자와 다른 견해를 가진 윤휴와 박세당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감으로써 더욱 주자학적 입장을 강화시켜 갔다. 특히 이러한 의견 차이는 단순한 학문적 논의를 넘어서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당쟁으로 심화됨으로써 학문 연구의 진지성을 잃은 형해화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 주자학자들이 벌였던 예학, 인물성동이론 같은 논쟁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별로 찾을 수 없는 스콜라적 논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주자학 중심의 학문 풍토에 대한 반성은 현실로의 적극적인 참여를 모색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틀을 낳았고, 세력이 작기는 하였지만 주자학 일색의 학문 상황을 극복한 양명학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가 들어왔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면 민간에서도 전통사유체계인 유·불·도가 현실적인 힘을 잃었다는 인식에서 신흥민족 종교들을 만들어 낸다.
(2) 정치적 배경
조선조는 이후 많은 정치적 모순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특히 임병양란 이후 심화된 모습을 나타냈다.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이 집권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보수적 경향을 강화하면서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통한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서인정권은 실현 가능성 없는 북벌론을 가지고 양란 이후 지배 권력의 권위가 무너진 속에서 민심의 이반을 막는데 이용하였다. 북벌론은 왕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강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권 전복세력을 막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런 속에서 인조반정으로 숙청당한 북인들의 후예인 정희량 등은 영조 4년(1728) ‘무신란(戊申亂)’을 일으켜 서인-노론 정권에 반기를 들었고, 이 무신란을 통한 민중 봉기는 후일 평안도 농민 전쟁과 임술 농민항쟁, 갑오 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조 대에 조세와 토지 제도를 비롯한 전반적인 문물제도의 새로운 회복과 재정립을 요구하는 개혁정책이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에 의해 제시되었지만 순조 이후 집권 세력은 기득권을 유자하기에 급급한 세도정치를 펼쳤다.
이 같은 상황을 거친 19세기 말은 주자학이 국가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이미 상실한 시기였으며, 내용 없는 민본(民本) 정치사상과 대동(大同)세계에 대한 지향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조세제도와 토지제도는 지배계급의 기만과 탐욕으로 인해 파탄지경에 이르러 민중은 생존마저 위협 당하였다. 따라서 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었으며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3) 경제적 배경
인조반정 이후 서인-노론의 일당전제가 토지제도에서는 지주제를 확고히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익의 표현처럼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는 대다수의 민중’들은 강과 산으로 토지의 경계를 삼을 정도로 막강한 대지주에게 예속되어 소작농이나 머슴으로 전락하여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또한 중앙 문벌이나 지방 토호들과 결탁된 서리(胥吏) · 공인(貢人) ·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의 횡포는 더욱 빈부격차를 부채질하였다.
하지만 전체 경제규모는 생산의 직접 담당자인 민중에 의해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새로운 토지를 개간하고 재배를 강화했다. 영조 무렵에는 정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됨으로써 이모작과 넓은 땅의 경작이 가능해졌다. 또한 지대가 정액 지대인 도조(都祖)로 바뀌면서 어느 정도 소작 경영의 독립성을 확보해 낼 수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현상은 농민 계층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즉 경영형 부농이나 서민 지주가 생겨난 반면에 더 많은 수의 소작지를 잃은 농민들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농업 노동자나 광공웝 노동자, 장사꾼 등이 되거나 떠돌이 또는 도적이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수공업이나 광업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관 주도의 수공업이 민간 수요 및 민간 자본과 연결되어 자영 공업으로 바뀌어 갔다. 농촌 지역의 수공업도 자급자족에서 전문생산과 상품생산으로 바뀌어 갔다. 광업도 대규모 민간 자본의 참여로 관영에서 벗어나 물주가 덕대를 통해 광산 노동자를 지휘하는 경영방식이 보편화되었다. 상업도 농업 인구의 분화에 따라 시전 상인들의 막강한 금난전권(禁亂廛權)에도 불구하고 영세 상인들이 늘어갔으며, 상품유통의 길목을 장악한 지방 대도시 상인들과 밀무역을 통해 성당한 대상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자본축적을 바탕으로 새롭게 성장한 세력은 양반 토호나 지방 관리의 수탈에 맞설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힘을 갖게 되었고, 더욱 몰락한 피지배 계층은 사회변화를 수행할 수 있는 과격한 반항 세력을 형성해 갔다. 하지만 이 같은 토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부 구조는 경제성장을 통해 나오게 된 욕구나 심화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르고 막는 모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정치에서는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으로 대표되는 3정의 문란과 세도정치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많은 모순을 만들어내었다.
3. 실학의 개념
첫째, 실학이라는 용어는 송대 유학, 즉 신유학이 발흥한 이후 사용된 것으로서, 그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있어서 모두 유학의 범주 안에서 학문의 성격, 목적, 방법에 대한 자기 반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둘째, 조선 후기의 실학파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말하는 ‘실’과 그 이전의 성리학과 학자들이 말하는 ‘실’이 다 같은 의미의 실, 즉 허(虛)와 공(空)을 부정하는 ‘실’이면서, 다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의 성격이 달라지고, 도한 학문의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본(本) · 말(末)과 내(內) · 외(外)에 대한 치중점의 차이가 생긴데 불과하다.
셋째, 성리학과 실한은 모순·대립되는 것이 아닌 병행, 상보(相補)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4. 실학에 있어서 학파적 계통
(1)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파(성호학파), 농업중심
성호 이익을 대종(大宗)으로 하는 경세치용학파는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개혁에 치중하는 학파이다. 농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농촌생활의 안정을 토대로 한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2) 북학파(北學派)
①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 상공업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학파는 농업의 진흥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학파이다. 주로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연행(燕行)의 경험이 있는 노론과 낙론(洛論)의 계열에서 선도하였으며, 도시 경제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이 학파의 특징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화이(華夷)의식과 그에 근거를 둔 북벌론으로부터의 탈피를 들 수 있다. 배청(排淸)의식이 두터운 보루(堡壘)를 이루고 있던 그 당시 사회에서 화이관(華夷觀)의 극복 없이는 이적시(夷狄視)되던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나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처럼 북학파 학자들이 의식의 대전환을 이룩할 수 있었던 철학적 기저에는 낙론 계열의 인물성동론(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다는 주장 → 그래야 청나라를 인간으로 인정)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② 실사구시(實事求是)학파, 학문중시(화를 면하기 위해)
완당 김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실사구시학파는 경서(經書) 및 금석(金石) ·전고(典故) 등의 실증적인 고증을 위주로 하는, 북학파의 또 다른 학파이다. 연암학파 및 북학론자들과의 학문적으로 긴밀한 연관을 가지면서, 그들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대타(代打)로 부상한 학문 경향인데, 고증과 훈고로 특징 지워지는 청대 실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일파의 특색은 순수학문 그 자체가 추구하는 목적이며, 엄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써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자기의 정치·사회적 이념을 염두에 두고 고전을 주관적으로 인거(引據), 해석하던 종래 일군의 학자들과 다른 바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정치적 색채를 불식하고 이념성을 탈피하려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5. 실학의 이념적 · 학문적 특성
첫째, 비판적 정신이다. 종래의 권위적인 주자학의 세계의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을 지향하여, 자유로운 학문탐구의 기풍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기성의 폐쇄적인 권위나 폐습화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국학 연구의 기초가 되는 민족 주체의식이나 민중의 이익을 기초로 하는 민본주의의 외침 이전에 비해 부쩍 강력해진 것도 기성의 권위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적 정신은 한 걸음 나아가 개방적인 태도로 나타났으니, 주자학 일변도의 권위적으로 폐쇄적인 학풍에서 탈피하여, 학술·사상에 대해 폭넓은 관심과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둘째, 실용에 대한 관심이다. 실학파는 정덕론(正德論)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학문의 중심을 윤리·도덕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부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전환하여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 등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당면한 현실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서, 실제생활에 유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민생을 위한 학문과 생산의 증대를 강조하였던 것은 실학에서 또 하나의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셋째, 주체적 입장이다.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의 제반 현실문제가 시급하고 절실하게 제기되었던 상황에서 대두되었기 때문에,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발전적인 노력과 주체적 입장이 강하였다. 당시 사회현실에 기초한 실용주의적 관심은 정치·경제는 물론 역사·지리·언어·풍속 등 각 방면에 걸친 연구의 열기를 고조시켰으며, 여기에서 민족 주체의식 내지 독립적 자존의식이 구체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민족 주체의식의 고양’이라는 기운을 타고 국학에 관계된 많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은 실학의 주체적인 입장이 잘 반영된 한 증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