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협의대상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자, 미국은 미⋅영⋅중⋅소 4대국 회담으로 한국문제를 이관할 것을 제안했다. 영국과 중국은 4개 국 회담 초청을 받아들였으나 소련은 그 회담이 모스크바 협정을 벗어나는 것이라며 거부하였다.(한철호역, 『미국의 대한정책(19834-1950)』,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pp. 135-136.)

미국은 모스크바협정 노선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이미 1947년 초부터 트루만 행정부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에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기존의 방침을 점차 포기하고, 남한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1947년 2월, 민정합동위원회(JCAC)에서 한국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한다면 유엔에 이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7월 하순, 국무부⋅육군부⋅해군부 대표로 구성된 3부조정위원회(SWNCC)에 의해 설치된 한국문제특별위원회에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할 것이 제안되었다.(신복룡, 앞의 논문, pp. 252-253; 차상철, 『해방전후 미국의 한반도정책』, 지식산업사, 1991, pp.153-156) 9월 17일, 미국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유엔 제2차 총회에 제기하였다. 이는 ‘다자적 해결’ 방식으로 국제공조를 통해 소련과 타협하지 않고도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명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철군 후 남한의 안전보장도 가능한 방안이었다.(브루스커밍스 외(박의경 역), 『한국전쟁과 한미관계 1943-1953』, 청사, 1987, p. 36.)

미국안에 맞서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단은 한국문제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문제로 유엔은 관할권이 없다고 반대하면서, “조선인민이 자유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조선에서 미소 양국 군대를 동시 철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1947년 10월 유엔총회에서 미⋅소 양국 군대를 1948년 초 동시에 철거하자는 안으로 다시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유엔의 감시 하에 남북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만들고 그 통일정부 스스로 치안군을 편성한 후 그 치안군이 전 한국의 치안을 보장하기를 기다려 미⋅소 양군이 철퇴할 것을 주장하였다.(“Committee approves Korean Commission”, UN Weekly Bulletin, Nov. 11, 1947, 신복룡편, 『한국 해방 전후사 논저』 1, 선인문화사, 1998, p. 390.)

미⋅소의 이러한 제안에 대하여 남북협상을 앞두고 문화인 108인 성명에서 “미소양군은 동시에 철병하여 조선문제는 조선사람에게 맡기라고 한 소련의 제안은 대경대법(大經大法)이다. 작위가 아닌 한에서 반대가 있을 수 없겠거늘, 미국의 묵살하에서 소련의 일방적인 성명에 그치었고,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 통일정부의 수립을 기한다고 한 유엔의 경정도 명정언순(明正言順)이라 소련의 참가 하에서 이대로 추진되는 한 이의가 있을리 없겠거늘, 필경 소련의 불참으로 유엔 자신의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라고 평가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 29.) 그러므로 이는 방법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미⋅소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이었고, 국내에서도 정치세력이 그 이해관계에 따라 대응이 달랐다. 이 때문에 조소앙은 좌찬탁(左贊託) 우반탁(右反託)의 대립으로 좌철병(左撤兵) 우주병론(右駐兵論)의 미론(迷論)을 재연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경향신문』 1947. 10. 2.) 그러나 1947년 하반기부터 국내 세력은 유엔감시하의 총선과 선철군 총선론으로 대립하였다.

미 군정측은 소련안이 일제로부터 독립한 한국인의 자주적 정서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그 파급력을 우려하였지만 좌익세력을 제외하고는 일방적인 철수에 신중한 입장이었다.(조성훈, 「남북협상파의 철군론 연구」, 『군사』 40, 2000, pp. 82-83; “SD(Marshall) to USPOLAD(Mitchell), 9 Mar 1948(Summary of Comment about Korea)”, 『대한민국사자료집』 39, pp. 50-51.) 이승만, 김구, 한국민주당을 비롯하여 좌우합작위원회에서도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어 유엔 감시 하에 남북통일 총선거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지지하였다.(『동아일보』, 1947. 9. 2; 『조선일보』, 1947. 9. 12, 20;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pp. 541ᐨ545)

중간세력 가운데, 김규식(金奎植)은 주둔군의 철퇴가 원칙적인 것이지만 아무런 선결조건의 언명도 없이 철퇴만 하자는 것은 우롱이 아니냐고 반박하면서, 미국이 북한군대에 상응하는 군대를 양성하지 못하면 북한군대가 침입하여 공산화시킬 것을 우려하여 미국에 대한 국제적 책임을 충실히 할 것으로 요망하였다. 박건웅(朴建雄), 원세훈(元世勳) 등은 외국군 주둔이 진정한 완전독립이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무조건적인 외군철퇴를 주장하면서 철병 후 걱정은 민족내부의 결정이라는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근로인민당, 사회민주당 등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여 선철병(先撤兵) 후총선거를 주장하였다.(『경향신문』, 1947. 9. 28; 『조선일보』, 1947. 9. 29; 『독립신보』, 1947. 10. 21; 『조선중앙일보』, 1947. 11. 6.) 이러한 양상은 중간세력의 노선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좌익측은 소련안을 적극 지지하면서 유엔한국위원단이 “미국의 식민지가 될 남한 단독정부를 강제로 수립하기 위한 도구”라고 주장하였다. 북한도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 한국전역에 걸쳐 실시될 인민위원회 구성을 위한 총선”이라고 강조하였다.(『독립신보』, 1947. 11. 4; 허헌, 「연석회의축사」, 『북한관계사료집』 6, pp. 63ᐨ64; 김렬, 「북조선로도당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서 있다」, 『근로자』 18, 1948. 8, p. 32;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자료집』 1, 1987, pp. 69ᐨ70.)

유엔에서 선(先)정부수립⋅후(後)외국군철수를 주장한 미국과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소련이 크게 대립하였다. 미 군정은 이제 좌익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 드골, 중국에서 장개석(蔣介石) 등과 같은 우익지도자들과 함께 남한만의 정권이라도 세우려고 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미⋅소 양국군을 1948년 1월 1일까지 철수시키자는 소련안을 부결시키고, 유엔총회는 한국독립의 절차를 규정하는 미국의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주요 내용은 ① 정부수립 문제의 토의에 참가하도록 정당한 한국대표를 초청하고, 이를 위하여 9개국으로 구성되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The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UNTCOK)’을 설치하며, ② 대표자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수립을 위하여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선거를 실시하며, ③ 수립된 정부는 위원단과 협의하여 자체의 국방군을 조직하고, 점령당국의 군대 철수를 위하여 점령국가와 협의하며, ④ 위원단은 사태진전에 따라 유엔 소총회와 협의할 수 있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점령군이 양 지역에서 동시에 철수함으로써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결의안에 반대하였다.(『조신일보』, 1947, 11. 14; 『동아일보』, 1947, 11. 15, 12. 8; 차상철, 『해방전후 미국의 한반도정책』, 지식산업사, 1991, pp. 175-176.) 한반도에서 국회를 구성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선거를 실시하는 데에 소련의 협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동맹관계에서 완전히 멀어져 갔다.

유엔은 총회의 결의에 따라 총선을 감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파견함으로써 한국문제에 대한 유엔의 개입을 본격화했다. 위원단은 오스트렐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
나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48년 1월 초부터 서울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8년 1월 8일, 공산진영의 우크라이나공화국을 제외한 8개국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12일부터 덕수궁 석조전에서 동 위원회를 열고 인도대표 메논(Crishna Menon)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서 13일에는 한국인대표들과 협의할 것을 결의하고, 19일에는 3개 분과위원회와 특별위원회, 그리고 감시단을 설치하고 남북을 통한 전 한국의 총선거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메논 의장은 하지 중장을 요담하고,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에게도 면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사령관이 소련점령하의 북한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위원단은 남한에서만 총회의 계획을 실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소총회와 협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1947년 11월 14일의 총회결의에 설정된 계획은 실시되어야 하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전 한국을 통한 선거 감시에 임하여야 하며,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 감시에 임하여야 한다”는 미국의 결의안이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이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임시위원단 중 캐나다와 시리아, 오스트렐리아 대표들은 남한만의 선거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결국 유엔소총회의 결의안을 실행하기로 하였다.(김계동, 앞의 책, p. 143) 1948년 2월 28일, 유엔위원단은 5월 9일 이전 선거시행을 발표했다.

1948년 5월 10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위원단은 총선거에 대해 그들이 접근할 수 있고 전체 한국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주민을 가진 한국내 지역에서 유권자들의 자유의지의 정당한 표현이었다고 평가하였다.(강성천, 1947-1948년 ‘유엔조선 임시위원단’과 ‘통일정부논쟁’, 『한국사론』 35, 1996. 6, 서울대 국사학과, p. 248.)

유엔한국위원단은 남한에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가 수립되자 한국을 떠났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양대 진영이 날로 대립되어 가는 정세 속에서 자유진영은 한국에 대한 대책으로 유엔한국위원단을 재조직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은 남한에서 위원단이 남한 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의 남한 전복활동을 억제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미국은 미군의 철군 후 유엔을 남한방어의 최소한의 기제로 간주하였다.(강성천, 앞의 논문, p. 263)

19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의 반대를 일축하고 48 대 6이라는 압도적 다수로 한국정부를 승인하는 동시에 ‘유엔신한국위원단’을 설치하였다. 신한국위원단(新韓國委員團)은 7개국으로 결성되었다. 이전 ‘임시한국위원단’ 가운데 캐나다와 우크라이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국가는 동일하였다. 다만, 일부 대표만 달라졌다. 이 위원단의 역할은 1949년 1월 31일자 신한국위원단 공보 제1호에 따르면, ① 한국의 통일을 달성하고자 1947년 11월 14일자 총회 결의에 규정된 조항에 준하여 모든 한국의 국방군을 통일하도록 조력한다. ② 남북한의 물자교류, ③ 대표정부의 발전을 위한 감시와 협의, ④ 점령군의 실지철퇴를 감시하며, 또는 이미 실현되어 있을 때에 철퇴사실을 확증할 것 등이었다.(「남북통일의 구체적 방안」, 1949. 3, 『안재홍 선집』 2, 지식산업사, 1981, pp. 423-424) 그 후, 1949년 11월 유엔 제4차 총회의 결의로 중국, 필리핀, 오스트렐리아, 인도, 프랑스, 엘살바도르, 터키 등으로 새로 구성된 위원단은 전쟁직전까지도 한국 내에 군사충돌 사태를 감시하고, 한국통일과 남북 교역장벽 제거방안을 계속 강구하였다.(「국련한위의 신사명」, 『한성일보』, 1950년 2월 14일자 사설 ; 『서울신문』, 1950. 6. 23)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이 유엔에 의하여 창립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내의 많은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유엔에 기대하였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통일의 길은 조선인민 자체의 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인민의 길”을 강조하였으므로 이전 한국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였듯이 신한국위원단의 활동을 부인하였다.(「소위 ‘유엔신조선위원단’의 괴뢰극은 개막되었다」 (『순간통신』, 1949년 3월 중순호 No. 15), 『북한관계사료집』 28, pp. 279-283) 위원단의 보고처럼 전 세계에 걸친 미⋅소간의 대립은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근본 원인이었다.(『국제연합한국위원단보고서』, 1949. 9. 10, pp. 8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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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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