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지도를 보면 그리스는 구부러진 다섯 손가락이 지중해를 향해 내밀고 있는 해골같은 손으로 보일 것이다. 그 남쪽에는 이 탐욕스러운 손가락들이 기원전 2천년에 문명과 문화를 발생시킨 커다란 크레타 섬이 있다. 동쪽에는 에게해를 지나서 지금은 조용하고 냉담하지만, 플라톤 이전의 시대에는 산업 · 상업, 그리고 투기로 들끓던 소(小)아시아가 있다. 서쪽에는 이오니아 해를 건너거 마치 바다 속의 사탑(斜塔) 같은 이탈리아와 시실리와 스페인이 있으며, 당시에는 이 지역에서 그리스 식민지가 번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고대의 선원들이 감히 통과하지 못했던 헤르클레스의 기동(우리는 지브로올터라고 부른다)이 있다. 복쪽에는 당시 테사리아 · 마케도니아라고 불리던 아직도 길들지 않은 반야만적인 지역이 있다. 이 지역으로부터 또는 이 지역을 거쳐서 호머나 페리클레스 시대 천재들의 선조된 정력적인 무리들이 들어왔다.

다시 지도를 보면, 해안의 무수한 굴곡과 육지의 기복을 볼 수 있다. 어디에나 크고 작은 항구가 있고,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지상에는 산과 언덕이 중첩되어 있다. 그리스는 바다와 육지의 장벽에 의해 고립된 여러 지역으로 갈라져 있다. 당시는 지금보다도 여행과 통신이 훨씬 어렵고 위험했다. 따라서 하천 유역마다 자급자족의 경제생활, 독립된 정치, 독자적 제도, 방언 · 종교 · 문화가 발달했다. 어느 유역에나 하나 또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고, 산 허리로 뻗친 각 도시 주변에는 농업에 알맞는 오지(奧地)가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이 에우보이아 · 로크리스 · 아이톨리아 · 포키스 · 보이오티아 · 아카이아 · 아르골리스 · 엘리스 · 아르카디아 · 메세니아 · 스파르타가 포함된 라코니아 · 아테네가 포함된 아티카 등의 도시국가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지도를 보고 아테네의 위치를 살펴보자.
아테네는 그리스의 대도시들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그리스 사람들이 소아시아의 번화한 도시로 나가는 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놓여 있었고, 아테네를 통해 소아시아의 오래된 도시들은 청년기의 그리스에 사치품과 문화를 수출했다. 아테네에는 피라이에우스라는 훌륭한 항구가 있어서 무수한 배들이 이 항구에서 바다의 거친 파도로부터 안식처를 찾았을 것이다. 또한 아테네에는 거대한 상선대(商船隊)가 있었다.

기원전 490년부터 470년까지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상호간의 적대감정을 버리고 힘을 합쳐, 그리스를 아시아 제국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 치하의 페르시아 사람들의 공격을 물리쳤다. 노쇠한 동방 대한 젊은 유럽의 이 항전에서 스파르타는 육군, 아테네는 해군을 동원했다.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는 군대는 해산했고, 이러한 과정에 따르기 마련인 경제적 불안을 겪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해군을 상선대로 전환하여 고대 세계의 가장 거대한 상업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스파르타는 폐쇄적이고 정체된 농업 도시로 되돌아갔으나 아테네는 번창하는 시장과 항구가 되었고, 여러 인종과 여러 가지 종파와 관습이 마주치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접촉과 적대 관계로 비교와 분석과 사상이 탄생했다.

여러 가지 전통과 교리는 이 다양한 교류의 중심지에서 서로 마찰을 일으켰으나 최소한에 그쳤다. 여러 가지 신앙이 있는 곳에서는 최초의 회의주의자였으리라. 그들은 열렬한 신앙을 갖기에는 너무나 견문의 폭이 넓었다. 모든 인간을 인간을 바보가 아니면 악한이라고 분류하는 상인들의 일반적인 기질은 모든 신앙을 의심하게 했다. 또한 그들은 서서히 과학을 발달시켰다. 교역이 점점 복잡해지자 수학이 발달했고, 항해가 더욱 대담해짐에 따라 천문학이 발달했다. 부(富)의 축적은 연구와 사색의 필요조건인 한가와 안전을 초래했다. 이제 사람들은 해상에서 방향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별을 연구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사람들은 그들의 업적을 자랑하며 더욱 멀리 진출했다. 그들은 온갖 지식을 수입하고 더욱 광범위하게 학문을 연구했다.'(《정치학》)

사람들은 매우 대담해져서 어떤 변화나 사건을 초자연적 섭리나 힘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연적 설명을 시도하게 되었다. 마술과 제사는 점차 과학과 관리에 굴복하고 철학이 탄생했다.

철학은 처음에는 자연학이었다. 이 철학은 물질 세계에 주목하고 사물의 궁극적 · 불가분적 요소는 무엇인가를 문제로 삼았다. 이러한 사상 계열의 자연적 종착점은 ‘사실상 원자(原子)와 공간(空間)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 데모크리토스(BC 460~360)의 유물론(唯物論)이었다. 이것은 그리스 사상의 주류의 하나였다. 이 사상은 플라톤 시대에는 잠시 잠적했으나 에피쿠로스(BC 342~270)에 의해 재등장하고, 루크레티우스(BC 98~55)에 이르러 도도한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의 가장 특색있고 풍요한 발전은 방랑하는 지혜의 교사인 소피스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은 본성(本性)을 주시했다. 그들은 모두 현인(賢人)들이었으며(예컨데 고르기아스와 히피아스), 그들의 대부분은 심원한 사상가였다(프로타고라스 · 프로디코스). 정신과 행위에 대한 현대 철학의 문제, 또는 해결로서 그들이 알지 못했거나 논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문제삼았고, 종교적 또는 정치적 금기에 부딪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담하게 모든 신앙과 제도를 이성의 법정에 출두시켰다. 그들은 정치학에서는 두 학파로 갈라졌다.

한 학파는 루소와 마찬가지로 자연은 선이고 문화는 악이며 만인은 본래 평등하지만 오직 계급을 구분하는 제도 때문에 불평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파는 니체처럼 자연은 선악을 초월해 있고 만인은 본래 불평등하며 도덕은 강자를 제약하고 저지하려는 약자의 발명품이고, 권력은 최고의 덕이며, 인간의 최고 욕망이고, 모든 통치 형태 중 귀족 정치가 가장 현명하고 가장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아테네에 과두정치파(寡頭政治派)라고 자칭하며 민주주의를 무능한 속임수라고 비난하는 소수의 부유층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40만의 아테네 주민 중에서 25만 명은 어떠한 정치적 권력도 갖지 못한 노예들이었고, 15만 명의 자유민(自由民), 또는 시민 중에서 국가의 정책을 토의, 결정하는 에클레시아(Ecclesia), 즉 인민회의(人民會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시한 민주주의는 유례가 없을 만큼 철저했다. 인민회의는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었고 최고의 관청은 디카스테리아(Dikasteria), 즉 최고재판소는 전시민의 명부로부터 알파벳 순으로 기계적으로 선발된 1천 명 이상으로 구성되었다(매수하려면 돈이 많이 들게 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민주적인 제도는 없을 것이다. 비록 반대자들은 더 불합리한 제도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스파르타의 육군이 아테네의 해군과 싸워 마침내 승리를 거둔, 한 세대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0~400) 중 크리티아스가 영도하는 아테네의 과두정치파는 전시에는 비능률적이라는 이유로 민주주의 폐지를 주장하고 은근히 스파르타의 귀족정치(貴族政治)를 찬양했다. 그 결과 많은 정치파 지도자들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아테네가 항복했을 때, 스파르타가 강요한 강화 조건의 하나는 추방된 귀족주의자들의 복귀였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크리티아스를 영도자로 삼고 전쟁 중 통치해 온 민주정치파에 대해 부유층의 혁명을 선언했다. 이 혁명은 실패했고 츠리티아스는 싸움터에서 쓰러졌다.

그런데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의 저자였고 플라톤의 숙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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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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