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은 그의 일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안락하게, 그리고 아마도 부유하게 자라났다. 그는 아름답고 정력적인 청년이었다. 플라톤이라고 불린 것도 그의 어깨가 넓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병사로서도 뛰어났고, 이스토모스의 경기 대회에서도 두 번이나 상을 탔다. 이러한 청년기를 보낸 사람이 철학자가 되는 경우는드물다. 그러나 플라톤의 예리한 영혼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라는 게임에서 새로운 기쁨을 찾았다. 스승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독단을 물리치고 억측을 깨뜨리는 것을 보면 저절로 기쁨이 솟아났다. 플라톤은 레슬링 같은 거친 스포츠에 가담하듯 이 스포츠에 가담했다. 늙은 등에(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자처했다: 소크라테스는 비대하고 우둔한 말(馬)과 같은 아테네인의 양심을 쏘는 등에라고 자처했다.《변명》)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단순한 논쟁을 넘어서서 용의주도한 분석과 유익한 토론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는 지혜와 스승을 매우 정열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말했다.
‘나는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 사람으로,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으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
스승이 죽었을 때 그는 28세였다. 스승의 조용한 생애의 비극적 종말은 제자의 사상의 모든 차원에 자취를 남겼다. 그의 귀족적 혈통이나 교육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의 마음 속은 민주주의에 대한 조소와 대중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가장 현명하고 훌륭한 인물에 의한 통치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카토(로마의 장군, 정치가) 같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가장 현명하고 가장 훌륭한 인물을 찾아내서 그가 통치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고 또한 그를 설득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그가 생애를 통해 전념한 문제였다.
한편, 그는 소크라테스를 구해내려고 애쓰다가 민주파 지도자들의 의심을 샀다. 친구들은 그에게 아테네는 안전한 곳이 못 되며 세계를 돌아보기에는 절호의 계기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원전 399년에 그는 출발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우리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의 자세한 여정(旅程)에 대해서는 권위자들 사이에 즐거운 논쟁이 있다. 그는 우선 이집트로 간 듯하다. 그는 이 나라를 다스리는 승려계급으로부터 그리스는 안정된 전통이나 심원한 문화가 없는 유치한 나라이며, 따라서 나일강의 스핑크스적 현인들은그리스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충격은 가장 교육적이다. 조용한 농민을 신권정치(神權政治)로 다스리고 있는 이 유식계급에 대한 기억은 플라톤의 사상에 오랫 동안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그가 유토피아(《공화국》을 말함)를 그릴 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후 그는 배를 타고 시실리로 건너가 이탈리아로 갔다. 여기서 잠시 동안 위대한 피타고라스가 창설한 학파, 또는 종파에 가담했다. 그는 연구자와 통치자로 선발된 소수의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소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고 이 기억은 그의 예민한 마음에 다시금 자취를 남겼다. 그는 12년 동안 온갖 원천으로부터 지혜를 흡수하고 온갖 사원을 찾아보며 온갖 교리를 음미하면서 방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유태에 잠시 머물면서 거의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의 발길은 갠지스 강둑까지 미쳐 힌두교도들의 신비로운 명상을 배웠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진위는 가릴 수 없다.
기원전 387년, 그는 이제 40세의 장년으로 여러 종류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많은 고장의 지혜를 흡수해서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아테네로 돌아왔다. 청년 시절의 뜨거운 정열은 어느 정도 잃었지만 그는 모든 극단을 반진리(半眞理)로 보고 모든 문제의 많은 측면을 진리의 각 차원에 따라 공정히 분배하는 사고의 시야를 얻었다. 그에게는 지식과 예술이 있었다. 그의 영혼속에는 철학자와 시인이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아름다움과 참이 동시에 활동 무대를 갖는 표현 수단, 즉 〈대화〉편을 창작해 냈다(〈대화〉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공화국》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고르기아스》 《파르메니데스》 《정치가》 등이다). 이전에 철학이 이와 같이 찬란한 옷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없었다. 번역으로 읽어도 그의 문체는 빛나고 불꽃을 튀기며 생동한다. 그의 예찬자의 한 사람인 셸리는 말한다.
‘플라톤은 엄밀하고 정교한 논리와 예언적인 시적 정열의 진기한 결합을 보여주며, 그 시대의 광휘와 조화를 숨막힐 듯한 설득력을 가진 음악적 표현의 거슬릴 수 없는 흐름에 용해시킨다.’
젊은 철학자가 극작가로 변모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철학과 시, 과학과 예술의 도연한 결합 때문에 플라톤은 난해하다. 우리는 저자가 〈대화〉편의 어떠한 인물, 어떠한 형식을 통해 자기 사상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비유를 통해 말하는지, 또는 농담을 하는지, 진지한지 가려내기 어렵다. 그는 농담과 아이러니와 신화적 표현을 좋아하므로 우리는 때때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오직 비유를 비유를 통해서 가르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의 〈대화〉편에 나오는 프로타고라스는 묻고 있다.
‘나는 노인이므로 젊은 당신들에게 우화로 말할까 또는 신화로 말할까?’(《프로타고라스》)
이 〈대화〉편들은 플라톤이 당시의 일반 독자를 위해 쓴 것이라고 전한다. 〈대화〉편의 대화 방식, 찬반 양론의 활발한 싸움, 모든 중요 논의의 점진적 전개와 잦은 반복 때문에 가끔 사치삼아서 철학을 맞보거나 인생은 짧아서 겅둥겅둥 읽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대화〉편은 이해하기에 적합한 것이었다(오늘날 우리들의 눈에는 애매하지만).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편에서 허다한 익살과 비유에 마주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 시대의 사회와 문학을 자세히 알고 있는 학자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 오늘날의 안목으로는 엉뚱하고 기상천외한 것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적인 음식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화가 잘 안되는 사상이라는 요리를 먹기 쉽게 만들어주는 양념과 향료로서는 유익했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가 비난하던 여러 가지 성질을 듬뿍 갖고 있었다는 점도 시인하기로 하자. 그는 시인과 그들의 신화를 비난했으나 스스로 시인의 수효를 한 명 더 늘렸고, 수백 가지 신화를 첨가했다. 그는 성직자들에 대해 불평했지만(그들은 지옥에 대해 설교하고 돌아다니며 보수를 내면 구제해주겠다고 함, 《공화국》) 그 자신이 성직자요, 신학자이고, 전도사 · 도덕군자로서 예술을 비난하며 공허한 것은 불 속에 던져 버리라고 권유한 사보나롤라(15세기 후반의 이탈리아 종교 개혁자) 같은 사람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처럼 ‘비유는 교활하다’(《소피스트》)고 비난하면서도 첫째 비유에 둘째 비유를, 다시 셋째 비유를 연속시킨다. 그는 소피스트들을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논쟁가라고 비난하면서 스스로 대학 2학년생처럼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 파게는 그를 다음과 같이 풍자하고 있다.
‘전체는 부분보다 큰가? — 물론. — 그리고 전체는 부분보다 작은가? — 네……. 그러므로 확실히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 왜 그렇지요? — 자명한 일이다. 다시 한 번 되풀이 해 보자.’(《플라톤을 읽기 위하여》)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다. 이런 말을 하더라도, 〈대화〉편이 세계의 가장 값진 보배의 하나임에는 변함이 없다. 〈대화〉편 중에서 가장 훌륭한 《공화국》은 그 자체가 완전무결한 논문이며 플라톤의 사상 전체를 한 권에 집약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그의 형이상학 · 신학 · 윤리학 · 심리학 · 교육학 · 정치학 · 예술론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근대와 현대의 취향에 맞는 문제들, 즉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 산아제한과 우생학(優生學), 도덕과 귀족정치에 대한 니체의 문제들, 베르그송의 생의 약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문제가 이 책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인색하지 않은 주인이 베푼 엘리트를 위한 향연이다.
에머슨은 말한다.
‘플라톤이 철학이고 철학은 플라톤이다.’
그리고 ‘도서관을 태원 버려라. 이 책 안에는 도서관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라는 오마르(11~12세기에 활약한 페르시아 시인)의 코란에 대한 찬사는 바로 《공화국》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이제 《공화국》을 검토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