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초기 간부양성은 ‘평양학원’과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등 전문기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북한은 정규군의 건설을 준비하기 위하여 먼저 군과 정치 간부의 양성을 목적으로 학교의 창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김일성대학 전신인 평양학원이 1946년 2월 23일 정식으로 개교하였고, 그 1기생들이 이미 1월 3일에 입교하여 개교식에 대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 학원은 진남포(鎭南浦) 동쪽에 일제시 소화전공(昭和電工)회사가 있었던 곳인 도학리(島鶴里)에서 위치하여 강의실, 훈련장, 병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평양학원의 설립 목적은 김일성, 김책 등 빨치산파가 중심이 되어 이른바 제반 민주기지 구축 계획의 일환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는데 소요되는 정치 간부를 양성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개교식에서 김일성은 현대적 정규군을 창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간부가 필요하므로 학원을 창설하고 여기에 “정규무력의 핵심 골간이 될 군사 정치 간부들을 많이 키우라”고 지시한데서도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이리하여 북한의 정당 정치기관 민중단체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선발된 600여명으로 출발하였고, 이와 함께 군 간부의 양성과 계열 및 출신을 달리하는 소위 당․군․정 간부들에 대한 통일적 정치사상교육을 담당하였다. 교과과정은 국제정치, 조선문제, 당군정, 공작, 체조 등이었고 이 학원의 교육방침은 이론을 실천에 연계시키고 배우는 것을 실행에 연계시키자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중심구호가 “인민의 충실한 복무자가 되자”라고 한데서도 그 설치 목적이 정치 간부 양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학원의 초대 원장에는 김책, 부원장겸 교무주임에는 기석복(奇石福, 소련 타슈겐트주 중학교사 출신), 참모장에 김동수(소련 출신)를 임명하여 처음에는 4개월 코스의 단기과정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명예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창설 작업에 김일성 자신이 직접 관여하였고 항일유격대출신 안길(安吉)과 정치부교장 조정철, 교무주임 심태산, 김증동 등 30여명이 주동이 되었다.
그 외 김일성의 부관인 주도일도 평양학원 간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 때문에 지휘성원으로 차출되었다. 군의였던 류한종은 1940년대 초 항일유격대에서 의료를 담당했던 자로 해방 후 김일성과 다시 만나 평양학원에서 일하였다.
최용건(崔庸健)은 북만유격대 출신으로 평양학원의 기틀을 세우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뒷날 수산상과 부수상을 역임하였다. 평양학원 당 단체는 당 중앙본부에 직속하였다. 평양학원에서 당증 수여사업을 위해 구성된 반심사위원회는 기석복 외에 위원으로 조정철과 전창철 등 항일유격대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평양학원은 북한군 건설의 기초 작업으로 1945년 11월 17일부터 구체적으로 준비되었다. 김일성은 동년 12월 26일 직접 평양학원 건설장을 방문하고 각 도당에 파견했던 항일유격대집단을 통해 이른바 ‘혁명가 유자녀’들과 노동자 농민의 자녀 및 청년학교 학생들을 선발하여 학원에 보낼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평양학원은 개인에의 충성을 기준으로 맺어진 항일유격대집단이라는 조직에 의해 육성되었기 때문에 김일성에 대한 절대 지지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평양학원은 김일성 직계의 빨치산 출신들이 장악하고 그들 세력의 확장을 위한 저변확보를 위해 각 지방을 돌면서 각 인민위원회에서 핵심 분자들을 선발하여 입교시키고 소련군출신 한인 교관들이 정치교육을 군사훈련과 병행 실시하였다.
평양학원의 교육은 소련군 출신 한인과 소련군 교관에 의하여 노어를 비롯하여 정치학, 공산당사, 소련군 군사교리 등 전문 교육을 실시하였고, 군사교육보다는 정치 사상교육에 정점을 둔 정치군사학교라 할 수 있다. 군사훈련에 있어서는 신체단련, 사격술, 소련군 군사교리 등에 중점을 두었으며, 정치 분야에서는 정치학 노어․공산당사 등을 교육하되 사상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교육에 중점이 두어졌다.
그들은 해방직후에 각지에서 입북한 군 출신들을 입교시켜 단기적으로 공산주의 사상과 정치교육을 하여 사상통일에 주력하였고 이들을 보안간부와 당 간부 및 각급 임시인민위원회간부, 각 양성기관의 교관 등으로 배치하는 동시에 북한군의 창설 대행자로서 육성하였다. 1946년 6월초 단기교육을 마친 이들의 일부는 군 간부양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북조선 중앙보안간부학교의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일부는 철도경비대의 간부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개천(价川), 나남(羅南), 평양(平壤)에 위치한 보안훈련소에 배치되어 북한군 전신인 보안대원 양성에 진력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단기교육과 병행하여 정규과정으로서의 장기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당시 각 기관의 간부들을 순차적으로 입교시켜 단기교육을 함으로써 그들의 공산주의 사상통일은 물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휘체제를 수립하고 자 노력하였다. 평양학원의 초기편성을 보면 노어중대, 통신중대, 항공중대, 여성 중대와 대남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평양학원 편성
교관들은 주로 소련군 출신 한인으로 되어 있었으며 간부양성 기관의 교관 등으로 배치되어 북한 정부기관에 핵심 분자로서 등용되었다. 이러한 교육내용의 편성은 단순히 군 간부를 양성한다기보다는 북한 공산체제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빨치산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분야별 핵심요원의 양성에 중점을 둔 것이었으며, 장차 이러한 요원을 양산하기 위한 각급 학교와 기관을 증설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46년 6월 26일 15개월 코스의 정규과정을 신설하여 정규과정 제1기생 800여명을 선발하여 입교시켰다. 이들은 노어중대 200명, 통신중대 100명, 항공중대 100명, 여성중대 300명 그리고 대남반 100명으로서 도합 800명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선발된 20명은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관학교에 파견하여 소련 군사교육을 이수하게 하였다. 평양학원 정규과정 제1기생은 1947년10월 26일에 졸업하였다.
졸업생들은 군의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노어중대 출신은 소련고문관들의 통역관과 각 군 조직에서 정치부를 담당하였고 통신중대 출신은 통신기술 및 시설 등을 담당하였다. 항공중대 출신은 비행기 조종과 정비교육을 받은 후 북한군 공군 창설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초 작업을 담당하였다. 여성중대는 정치교육만을 하였으며 당과 각 지방 인민위원회 및 여성단체에 등용될 여성 간부들을 육성하여 배치하는데 주력하였다.
대남반은 주로 남한출신인 남로당원들을 상대로 공산주의 정치교육과 유격전술을 훈련하여 대남간첩과 유격대원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후 1949년 초에 표문이, 육남오, 강철 등 남로당원이 주동이 되어 유격대 양성학교인 ‘강동정치학원’을 신설하였다. 동 학원은 남한에서 입북한 남로당원들을 입학시켜 남한에 대한 적화공작 방책과 유격 훈련을 6개월간 실시한 다음 남한에 다시 침투시켜 입산공비와 합류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자들은 무려 10차에 걸쳐 총원 2,385명을 양성하여 남파하였다.
그 후 평양학원의 일부인 대남반(對南班)은 강동정치학원으로 흡수되었으며 항공중대는 평양 미림비행장으로 이동하여 북한 공군의 모체가 되었다. 평양학원은 1949년 1월 북한군 제2군관학교로 개칭하여 평양 만경대로 이전하였다. 만경대는 김일성의 출생지이며 소위 ‘혁명군’ 유가족 자녀들의 특수교육을 위하여 ‘만경대(萬鏡臺) 학원’을 세운 곳이다.
그들은 제2군관학교로 발족하면서 주로 정치군관 양성을 위한 군사부 훈련과 정치부 훈련을 병행해서 실시했는데 정치부에서는 마르크스, 레닌의 정치사상과 민족해방사, 김일성의 민족해방투쟁사 등을 교육하였으며 군사부에서는 분대에 서 대대에 이르는 전술훈련과 지휘관훈련 등을 실시하여 소위 문화부 정치군관을 양성하였다.
제2군관학교를 졸업한 군관들은 인민집단군사령부 인사처로부터 보직을 받았다. 그들은 주로 개천과 나남 훈련소 등에 많이 배치되었다. 그들은 문화부 대대장, 중대장으로 보직되었으며 각 부대 내에서 당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대내에서 민족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숙청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평양학원은 1948년 초까지 제1, 2기생을 배출했으며 ‘제2군관학교’로 개칭된 후 1950년 6월 남침직전까지 제3, 제4, 제5기생을 배출하여 총 2천 5백명을 양성하였다. 평양학원의 제2대 교장에는 안길이 취임하였고 만경대로 이전하여 1949년 1월 제2군관학교로 개칭된 후 제3대 교장에는 기석복이 임명되어 남침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평양학원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군대 양성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은 시점에서는 군대 성격을 띠지 않고 진남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개교하였고, 학원이라는 명칭하에 비밀리에 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창설 되었다. 또한 김일성을 위시한 항일유격대 출신들은 당시 정치적 실권 장악 문제로 국내파, 소련파, 연안파 등으로 알력이 있을 때였으므로 이들을 전부 동 학원에 입교시켜 사상통일은 물론 지도체계까지 확립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창설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평양학원 출신들은 이후 북한군의 핵심이 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인민군 창립 2주년 경축대회’에서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김일성 장군 빨치산부대에서 일생을 반일유격투쟁을 바쳐 온 진정한 애국자, 혁명자들은 우리 인민군대 창건의 골간으로 되었으며 그들의 고귀한 혁명전통과 투쟁경험과 애국정신은 인민군대 창건의 토대가 되었습니다”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김일성은 ‘김일성정치대학과 강건종합군관학교 창립 30돌에 즈음하여’라는 연설에서 평양학원이 북한에 있어 최초의 정규 군사정치학교라고 하였다.
또한 평양학원은 “정규의 혁명무력 창건을 위한 당의 독창적 건군사상과 (중략) 새로운 군사정치 간부로 훌륭히 육성함으로써 당의 혁명적 무장력인 조선인 민군을 적시에 창건하였다”라고 밝힌 것을 통해 볼 때 평양학원은 창군의 간부들을 양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북한군이 형성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