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진주할 때 북한지역에서는 다수의 자치단체들이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다.(자위대, 보안대, 치안유지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지부 등의 이름으로 결성된 단체들이었다.) 이들 단체들은 주로 광복 직후 권력 공백 상태에서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겨난 것들이었다. 이 단체들은 참여하는 인물의 성향에 따라 대체적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의 단체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로서, 대체적으로 서북지방(西北地方 : 평안도 방면)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모임이 활발했던 반면에, 동북지방(東北地方 : 함경도 방면)에서는 공산계의 활동이 현저하였다.
이들 중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단체로는 평안남도 치안유지위원회가 대표적인 것이었는데, 이 위원회는 곧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이하 필요시 ‘건준’으로 약함)(위원회는 총무부, 치안부, 선전부, 교육부, 경제부, 재정부, 생활부, 지역업무부, 외교부 등 총 9개의 부로 구성되었다)로 개칭되었으며,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추대되었고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부위원장이 되었다. 평안북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요인으로서 민족주의자인 이유필(李裕弼)이 중심이 되어 ‘신의주치안유지회’가 결성되었다. 이와 별도로 황해도 해주에서는 김덕영(金德永)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황해지구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형택(李瀅澤)을 대장으로 하는 ‘해주보안대’, 김응순(金應珣)을 위원장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 황해도지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도청 내에서는 별도로 한국인 직원들의 단체도 생겼다.(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구판 제1권)』, p. 51.)
한편, 8월 16일 함경북도 함흥에서는 정치범으로 석방된 인물들이 모여서 ‘함경남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100여 명의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으로서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로 발전하였다. 흥남화학노동조합을 위시하여 각 공장에는 조합이 생기고 농촌에도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또한 ‘건국준비위원회 함경남도지부’가 결성되어 위원장에는 공산주의자인 도용호(都容浩)가 추대되었다.(위의 책.)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치스챠코프 장군이 8월 24일 평양의 도청사(道廳舍)에 사령부를 설치한 바로 다음날 참모를 데리고 급히 함흥으로 날아간 것도 이 지역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의 송성관(宋成寬), 건국준비위원회 도지부(道支部) 위원장 도용호와 부위원장 최명학(崔明鶴) 등 3명의 좌익계 인사들과 회합하고, 일본인 도지사를 비롯하여 행정, 산업, 경제, 교통, 신문사 등 각계의 대표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오늘 도용호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민족 함경남도집행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소련군의 명령하에 이 집행위원회는 함경남도의 치안․행정의 일체를 담당하며, 헌병 및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고, 관공서 기타 공공물은 이 위원회가 인수한다”라고 선언하였다. 소련군은 그들의 저의(底意)를 은폐하고 한국인 주도의 치안유지를 지원하는 듯
이 하면서 공산계열의 단체를 앞세우는 데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소련 지휘부는 궁극적으로 북한의 공산화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세력은 민족주의 계열에 비해 미약한 편이었으며, 더구나 소련과의 연계도 거의 없었으므로, 점령 초기단계에 북한정권의 구성을 지역공산주의자에 의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점령 초기 소련 군정 당국은 지역공산주의자들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친소(親蘇) 그룹을 만드는 한편, 권위 있는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를 도모하는 등 인위적으로 지지 세력을 형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광복 직후 북한에서 중요한 그리고 널리 알려진 민족주의자는 당시 ‘한국의 간디’로 불리던 조만식이었으며, 그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지방자치조직인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는 상당한 대중의 인기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그를 북한 정권의 책임자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공산주의 운동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당시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미미했던 상황을 고려하고,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권위를 활용하는 일이 매우 바람직하다는 판단하에서 그를 선택했던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다른 민족주의 인물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소련군 지휘부와 건준의 접촉은 일찍이 소련군 제25군 사령부가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평양에 들어온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8월 28일(또는 29일)의 회담에서 건준 대표들은 소련군 지도부에 당면 문제들의 해결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으며, 상호친선을 도모하였다. 당시의 회합에 치스챠코프가 직접 참가하여 건준 구성을 변경하고 거기에 공산주의자들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 주장에 대한 이견도 있다.
어떻든 이 과정에서 건준 평안남도 지부가 해체되고, 임원 구성에 있어서 민족주의 진영의 인물 16명,(조만식, 오유선, 이윤영, 홍기주, 김광진, 노진설, 한근조, 정기수, 박현숙, 최아립, 장이욱, 김병서, 이종현, 조명식, 김익진, 김병연.)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소속 인물 16명,(현준혁, 김용법, 박정애, 김유창, 장시우, 송창렴, 이주연, 장종식, 허의순, 문태영, 이성진, 김귀현, 이관엽, 최윤옥, 한재덕 외 1명.) 도합 32명을 임원으로 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같이 위원회가 민주․공산 양파의 동수 비율로 구성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동등하게 세력균형을 이루었으나, 사실은 우익측의 위원 중에서 좌익에 접근하는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점점 좌익측이 우세하게 되어 갔다.
소련군 당국은 조만식에 대한 북한 대중의 신망(信望)을 무시할 수 없고, 급격한 공산화정책이 그들의 과업수행에 예기치 않은 장해와 반발을 초래할 것을 두려워하여 좌익의 우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좌․우 양측을 안배하는 형식으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중요 부서를 정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안배로는 실제 문제에 있어서의 제반 난관이 극복되지 않았으므로, 매사에 있어서 양측의 대립과 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좌익측이 우익측을 꺾으면서 점차 득세하게 되었다.
황해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주에 들어온 소련군 정치장교들은 기독교도인 김용순을 위원장으로 하고, 민족진영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건국준비위원회 황해도지부를 이름만 ‘황해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고치게 한 다음, 이 기구에 행정권을 넘기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9월 13일 행정권 이양 절차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치는 우파 인사들을 격분시켰다. 그리하여 이형택을 대장으로 하는 해주보안대는 9월 16일 황해도 인민위원회 본부를 습격하였고, 곧 바로 시가전이 벌어졌다. 소련 점령군 치하에서 우파의 보안대쪽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간부들은 서울로 피난하게 되었다. 좌파의 인민위원회 쪽은 곧 자파 중 심의 치안대를 조직했다. 어떻든 황해도에서 벌어진 이 좌우익 유혈투쟁은 곧이어 북한 전역에서 발생할 좌우익의 유혈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북한 전역에 대한 점령을 강행하면서 남북한을 차단하는 여러 가지 조처들을 취하였다. 철도의 차단, 전화와 통신의 단절은 물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금지시켰다. 이로서 북한은 점점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하는 지역으로 변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