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는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된 후 1946년 5월 1일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태릉에 설치한 사관학교이다. 조선경비사관학교의 당시 명칭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Korean Constabulary Academy)였다. 그러나 1946년 6월 15일 국방부의 명칭에 대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 소련 대표가 미국 대표에게 항의함에 따라 ‘국방’이란 용어를 배제하고 조선경비사관학교(朝鮮警備士官學校)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조선경비사관학교는 정부가 수립된 한 달 후인 1948년 9월 5일 학교 명칭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Korea Military Academy)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경비학교 정경

 

한국전쟁 이전 조선경비사관학교 및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출된 장교는 10개 기(期)에 총 4,962명이 임관하였다. 이중 조선경비사관학교로 임관한 자는 제1기부터 제6기까지 6개기에 총 1,254명이었고, 육군사관학교로 임관한 기수는 제7기에서10기까지로 총 3,708명이었다.

경비사관학교 입교자의 성분을 보면, 제1기부터 제4기까지는 대체적으로 군사경력자 출신으로써 귀국을 늦게 하여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제5기부터 제8기까지는 대부분 단신으로 월남한 이북 출신 반공 청년들이었다. 제5기는 초기 순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력이 5년제 중학졸업 이상인 자로 자격을 규정하였는데도 이북 출신이 대거 입교하였다. 제6기는 각 연대 우수하사관 및 병을 대상으로 모집하였는데도 대부분이 월남한 이북 청년들이었다. 제7기도 절반을 민간인을 모집하였는데도 많은 인원이 북한 출신 청년들이었다. 제8기도 3/4를 민간인으로 모집하였는데도 절반이 남한의 우익 단체에 속했던 청년이었고, 그 나머지 절반은 북한출신 청년들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입교했던 제7기 특별반과 제8기 특별반은 군사영어학교와 제1기 및 제2기에 입교하지 못했던 군사경력자들이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군 창설을 계기로 대거 입교하였다.

 

초대 육군사관학교 교장
참령(參領) 이형근

 

사관학교 교육기간은 제1기생은 45일, 제2기부터 제6기생까지는 3개월, 그리고 제7기부터 제9기까지는 6개월, 그리고 제10기는 1년이었다. 교육내용도 제1기부터 제7기까지는 군사교육 위주였으나, 제8기부터 일반학을 병행하여 교육하였다. 제1기는 1946년 5월 1일 88명이 입교하여 40일간의 단기교육을 받고 그 해 6월 15일 40명이 참위로 임관하였다.82) 입교생 중 60여명은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다가 학교가 폐쇄된 관계로 뒤늦게 들어왔고, 나머지 20여명은 각 도의 8개 연대 하사관 중에서 2∼3명씩 추천을 받아 면접시험을 거쳐 선발된 자들이었다. 당시 교장은 이형근 참령이었다.

 

초창기의 조선경비사관학교 전경: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가 해체된 후 그 해 5월 1일 현 육사가 위치한 태릉에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로 개교하였다. 경비사관학교는 군사영어학교에서 남조선국방경비대사관학교로 그리고 1948년 9월 5일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군사영어학교에서 제1기로 들어온 사람은 이상근(李尙根), 예관수(芮琯壽), 우병규(禹炳圭), 김학림(金鶴林), 남철(南鐵), 안영길(安永吉), 이창정(李昌禎), 황엽(黃燁) 등이었고, 연대하사관으로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는 임부택(林富澤), 김종원(金宗元), 임충식(任忠植), 서종철(徐鍾喆), 김용주(金龍周) 등이었다. 이중 20여명은 해군으로 갔는데, 남철, 김교식, 김세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전쟁시 제1기생은 대부분 중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 또는 사단 참모장 등으로 군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제2기는 1946년 9월 23일 263명이 입교하여 80일간의 교육을 받고 그해 12월 14일 196명이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2기생은 각 연대의 우수사병과 민간인을 대상으로 처음으로 공개 모집하였다. 전국의 8개 연대와 군사경력을 가진 민간인 등 500여명이 추천을 받아 지원하였다. 이들은 국사, 영어 등 필기시험과 면접 및 신체검사를 거쳐 최종 선발되었다. 제2기생으로는 박정희(朴正熙), 한신(韓信), 석주암(石柱岩), 문형태(文亨泰), 이세호(李世鎬), 심흥선(沈興善), 송호성(宋虎聲), 서정철(徐廷哲), 김희덕(金熙德) 등이 있었다. 한국전쟁시 제2기생은 소령 및 중령으로 대대장 또는 사단참모로 활약하였다. 특히 제2기생부터 1946년 12월 1일부로 시행된 계급 호칭을 사용하였다. 다DMA은 1946년 12월 1일부로 시행된 계급 호칭이다.

 

국군 계급 현황

 

제3기는 1947년 1월 13일 338명이 입교하여 그 해 4월 19일 296명이 임관하였다. 전쟁 발발시 이들은 소령으로 진급하여 대부분 대대장이나 사단 또는 연대참모로 활동하였다. 제3기에는 군사경력자로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출신인 박시창(朴始昌), 박기성(朴基成), 최덕신(崔德新), 그리고 일본군 출신인 김진위(金振暐) 등이 있었고, 전쟁 중 활약한 분으로는 김종수(金鍾洙), 노재현(蘆載鉉), 고광도(高光道), 송호림(宋虎林), 송대후(宋大厚) 등이 있었다.

제4기는 1947년 5월 16일 120명이 입교하여 그해 9월 10일 107명이 임관하였다. 전쟁 발발시 중대장이나 연대 참모로 활동하였다. 제4기의 대표로는 김종환과 이병형이 있다.

제5기는 1947년 10월 23일 420명이 입교하여 1948년 4월 6일 380명이 임관하였다. 전쟁 발발시 이들은 대위로 중대장 또는 대대참모로 활동하였다. 제5기생으로는 정승화(鄭昇和), 채명신(蔡命新), 이용(李龍), 최대명(崔大明), 김용배(金龍培), 김학원(金學洹), 장경석(張庚石), 장철부(張哲夫), 손관도 등과 육군항공대 창설요원으로 왔다가 공군으로 간 박원석(朴元錫)과 장지량(張志良)이 있다.

제6기는 각 연대 우수 하사관과 사병 가운데서 선발되었다. 이들은 1948년 5월 5일 282명이 입교하여 그 해 7월 28일 235명이 임관하였다. 전쟁 발발시 이들은 중대장 또는 대대참모로 활동하였다. 제6기에는 박경원(朴敬遠), 박현식, 김판규, 박태준, 박정인 등이 있다.

제7기는 정기(正期)와 특별 및 후기로 구분하여 총 1,096명이 임관하였다. 정기는 1948년 8월 9일 602명이 입교하여 561명이 임관하였고, 특별은 이주일(李周一), 윤태일(尹泰日), 방희(方熙), 김풍익, 고정훈, 문중섭, 유양수, 유병현, 조문환, 이기건(李奇建), 안동준, 홍국선, 김관오, 김국주, 김묵(金黙) 등 군사경력자 190명이 1948년 10월 12일 임관하였고, 후기는 각 연대 하사관 중에서 유능한 사람과 의무, 법무, 통신 등 각 특과 분야의 우수학생들을 선발하여 1948년 12월 21일 345명을 임관시켰는데, 여기에는 김태청(金泰淸), 박영수 등이 있다. 전쟁 발발시 이들은 중대장 또는 연대참모로 활동하였다. 제7기에는 이대용, 이훈섭, 김영선, 이건영 등이 있다. 한편 정부가 수립된 후 뒤늦게 귀국한 군사경력자를 위하여 정부는 특별임관 형식을 빌어 장교로 임관시켰는데, 김홍일, 이종찬, 신응균(申應均), 이형석(李炯錫), 박승훈(朴勝薰), 이용문(李龍文), 이선근(李瑄根), 김동수(金東洙), 김응조(金應祚), 박창암(朴蒼岩), 손성겸(孫聖兼), 이호(李澔) 등이 있었다.

제8기는 정기와 특별 제1․2․3․4기로 구분하여 총 1,848명이 임관하였다. 이 중 정기는 1949년 5월 23일에 1,264명이 임관하였고, 특별기수는 4개기로 구분하여 임관하였는데, 이때 특별 1차로 임관한 사람은 김석원, 유승렬(劉升烈), 안병범(安秉範), 백홍석(白洪錫) 등 일본군 출신과 안춘생(安椿生), 이준식(李俊植), 오광선(吳光鮮), 권준(權畯), 전성호(全盛鎬) 등 광복군 출신의 군사경력자들이 있었다. 특별 제4차에는 백석주(白石柱), 박임항(朴林恒), 강태민, 박영준(朴英俊), 신학진, 장호강, 엄주명, 안광호, 이대영(李大永), 유원식(柳原植) 등이 있었다. 제8기에는 김종필, 차규헌, 진종채, 유학성, 윤흥정, 이재전, 이희성 등이 있다.

제9기는 1949년 7월 15일 674명이 입교하여 1950년 1월 14일 580명이 임관하였다. 전쟁 발발시 이들은 중위로 소대장이었다. 제9기에는 윤성민, 문홍구, 정병주, 천주원 등이 있다.

제10기는 2년제 과정으로 모집되었으나, 입교 후에 다시 1년으로 교육과정이 단축되었다. 제10기생은 생도 제1기생으로 1949년 7월 15일 313명이 입교하여 전쟁 발발시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1950년 7월 10일에 134명이 임관하였고, 7월 15일에 50명이 임관하였다. 생도1기에는 황영시, 김윤호, 채항석 등이 있다. 생도 제2기는 4년제 정규과정으로 모집되어 1950년 6월 1일 330명이 입교하여 교육을 받던 중 전쟁을 맞이하였다. 이들은 입교한지 20여 일에 밖에 안된 생도 2기생들은 1950년 8월 15일 경남 동래에 설치된 육군종합학교에 175명이 편입되어 종합 1기 혹은 종합 2기로 임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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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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