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군정기간의 경제는 침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산업생산력이 80%까지 감축되었다. 예컨대, 탄광은 실질적으로 휴면상태였으며, 어업은 해방 당시 일본인이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선박과 어구를 가져갔으므로 크게 위축되었고 납세는 제반 경제활동의 무정부상태로 말미암아 고갈되었으며, 상품부족은 인플레를 낳아 물가가 급등하였다. 그리고 400만 명의 난민이 운집하여 주택난과 실업은 심각하였다. 거기에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측이 남한경제의 타격을 주기 위해 단전을 감행하여 남한은 전력난 타개를 위해 윤번제 송전을 실시하고 가정용 전등은 하루 1~2시간으로 줄여야 했다.(『서울신문』, 1950. 5. 21.)
따라서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정부는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동시에 경제적 토대를 확고히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성립 2년째인 1949년에도 여전히 정부 세출의 60%가 적자 세출이었고 통화량이 미 군정 말기보다 2배나 팽창함으로써 물가도 2배나 뛰었다. 서울 도매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 100으로 할 때, 1946년 470, 1948년 1,392, 1950년 2,974로 폭등하였다. 공업생산 실적은 일제말기(1944)의 18.6%에 지나지 않았다.(유광호외, 『현대한국경제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p. 86) 그러므로 제1공화국의 기본정책 중 국가안보태세의 강화에 못지않게 시급한 것이 국민경제의 안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자본이 미약하고 국가산업의 기반이 취약했다.
1949년 정부 예산 가운데, 인건비가 전 예산액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여순사건 이후 좌익들의 무장투쟁과 38선 무장충돌이 늘어나면서 국방비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그러므로 국가경제 자립의 근원이 되는 산업부흥자금이 약15% 밖에 되지 않는 형편이었다. 외국의 40% 또는 50%에 비할 때 크게 부족한 규모였다.(「산업인 좌담회:경제재건과 민간의 요」 , 『연합신문』, 1949. 12. 29; 김대래 외, 『한국경제사 강의』, 신지서원, 2003, pp. 299-300) 정부는 식민지잔재를 청산하고, 국민경제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귀속재산 불하와 농지개혁을 도모했다.
해방 당시 한국 내에 일본인이 축적해 놓은 공유 및 사유재산을 일컫는 귀속 재산은 1948년 9월, ‘한미정부간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에 따라 미 군정청에서 한국정부로 이관되어 국가재정의 주요한 세입원이 되었다. 정부가 인수한 귀속재산은 기업체 2,203건, 부동산 287,555건, 기타 2,151건 등 모두 291,909건이었다.
이는 국내 재산의 80%에 해당되는 것으로 시가로 따진다면 5억 달러 규모로 조선은행 발행고 700억 원에 200억 원을 더 해야 하는 막대한 규모였다.(『서울신문』, 1950. 1. 8) 전공업 생산시설면에서 70% 이상으로 추산되었고, 공업부문 전 종업원의 45%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귀속공업 사업체의 1948년도 생산실적은 공업 전 생산액의 35%에 불과하였으므로, 국가의 재원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필요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귀속사업체 처리가 시급하였다.(『국도신문』. 1949. 12. 25-26.)
194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귀속재산처리법을 공포하여 비료를 제외한 전 귀속재산을 경매방식에 의하여 일반에게 불하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나기 전까지 귀속재산의 처리는 전체의 1% 정도에 불과했으므로,(재무부, 『재정금융의 회고』, 1958, p. 167) 재정수입의 확대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 과제는 전후로 이관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많은 사람들은 농지개혁이 실시될 것으로 믿고 또 그렇게 희망했다. 더욱이, 북한에서 1946년 초에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아래 표에서처럼 해방 당시 농지소유관계는 총경지면적의 63.4%가 소작지이고, 36.6%가 자작지였다. 한국인 지주 가운데 5정보 이상을 소유한 규모는 24.6%이고, 이 가운데 논은 33.6%에 이르렀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는 거의 10%를 차지하였다. 1946년 미 군정 당시, 남한 전체 인구 1,960만 명 가운데 농민 수는 1,400만 명으로 전 인구의 약 70%였다. 농민 가운데 67%가 순 소작농이고, 또 1정보 미만의 자작농을 합하면 거의 90%가 소작농이었다.(『대구시보』, 1949. 1. 15) 그러므로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의 경제안정을 확립하지 않고는 국가재건, 산업재건을 도모할 수 없었다.
미 군정은 농촌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1947년2월 5일, 구 일본인 소유지를 조속한 시일 내에 농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계획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과도입원의원의 미온적이며 회피적인 태도 때문에 지연되었다가 1948년 3월 22일 귀속농지를 불하계획을 발표한 후, 20만 여 정보를 65만여 농가에 분배하였다. 당시 토지가격은 해당 토지의 주생산물의 연간생산량의 3배의 현물로 하고, 연간 생산량의 20%씩 15년간에 걸쳐 상환하도록 했다.(함한희, 「미 군정의 농지개혁과 한국 농민의 대응」, 『한국문화인류학』 31-2, 1998, pp. 429-430; 김성호 외, 『농지개혁사 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pp. 400-409) 정부수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8년 11월 23일, 농림부는 국회에 농지개혁법 초안을 제출했다. 그 목적은 농지를 농민에게 적정히 분배함으로써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타파하고 농가경제의 자립, 농민생활의 향상, 농업생산력을 증진하여 국민경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48. 11. 24.)

남한의 토지소유 현황(1945년 말)
그러나 농림부안이 농지보상액과 농민상환액 사이의 차액을 정부재정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 지가보상율이 낮다는 점 등을 이유로 반대에 부딪쳤다. 새로 정부 기획처안과 국회 산업위원회안을 절충하여 1949년 6월, 지주보상율을 농림부안의 경우처럼 150%로 낮추었고, 농민상환율은 125%로 낮추었으며, 농지강매를 금지한 규정을 신설한 법안이 통과되었다.(신병식, 「제1공화국 토지개혁의 정치경제」, 『한국정치학회보』 31-3, 1997, pp. 37-38.)
그 후 1950년 3월, 정부는 재정부담을 이유로 개정안을 제출하여 지주보상과 농민상환율을 150%로 동일하게 관철시켰다. 결국, 지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농토에 한하여 정부가 유상으로 취득하여 농민에게 분배해 주고, 농민으로부터 매년 30%씩 5년 동안에 농산물로써 정부에 상환하는 유상몰수⋅유상분배의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농지개혁의 실시 시기는 ‘농지분배예정지통지서’가 분배대상 농가에 발부되는 1950년 4월이었다. 경남지역에서는 1950년 4월, 분배농지예정지통지서가 발부되어 분배농지일람표 작성은 1950년 3월 15일까지, 일람표의 농민확인작업은 3월 20일부터 4월 4일까지, 농지분배예정통지서 발송은 4월 5일부터 18일까지 이루어졌다. 그리고 6월 22~23일에는 농지위원회에서 농지분배의 이의 신청에 대한 2차 심의까지 하였다.(장상환,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발전」, 『경제발전연구』 6-1, p. 146)
농지개혁의 결과, 실제로 분배된 농지면적은 32만 정보로 1949년 6월 당시의 분배대상 면적 60만 정보 중 55.2%에 불과하였다. 1945년 12월 남한 총소작지와 비교하면 39.8%에 지나지 않았다.(『남선경제신문』, 1950. 5. 19) 또한, 지가보상을 통한 지주의 산업자본가로 전환도 인플레이션과 불투명한 정치정세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토지를 매수당한 지주의 경우, 총 지주 17만 명 가운데 84%에 해당하는 14만여 명이 겨우 50석 미만의 지가보상을 받은 군소지주여서 지가보상만으로 다른 직업으로 전환이 어려웠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받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30% 정도의 헐값으로 매각 처분하여 소비자금화한 경우가 많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지가증권의 발행이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인플레의 심화로 대부분의지주들은 자본가계급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하였다.(장상환, 「한국전쟁과 경제구조의 변화」, 『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백산서당, 1999, pp. 152-153; 이대근, 앞의 책, pp. 185-186)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1950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대상농지의 70~80% 정도에 대한 분배가 단행되면서 전쟁 당시 점령한 지역에서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완충작용을 했다. 북한은 전쟁 중 자신들의 주도 아래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남한 농민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였으나, 남한의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신병식, 「1992 한국의 토지개혁에 관한 정치경제적 연구」,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논문, pp. 41-42; 김성호, 「남북한의 농지개혁 비교 연구」, 홍성찬 편, 『농지개혁 연구』, 연세대출판부, 2001, pp. 268-269.)
국내경제가 불안정한 가운데 미국의 경제원조는 한국경제의 버팀목이었다. 미국이 계속 원조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빠른 속도로 붕괴와 혼돈이 일어날 형편이었다.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가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므로 신중하게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48년 12월 10일, ‘한⋅미경제원조협정(ECA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민생문제의 해결과 전반적인 경제운영을 개선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왜냐하면, 미 군정하의 경조원조가 긴급구호용이라면, ECA원조는 한국경제의 자립과 부흥이라는 장기적인 목적아래 소비재 뿐만 아니라, 기계시설이나 원자재 등 다양한 물자로 구성되었다. 즉 1948년 12월 1일, 정부가 원조물자 사무취급을 개시한 이래 1949년 11월 30일까지 1년 간 비료 71.5만 톤(총 입하량의 34.7%), 석탄 62.9만 톤(30.5%), 석유류 22.3만 톤 (10.8%), 소금 17.7만 톤(8.5%), 식량 8.1만 톤(3.9%), 시멘트 7.6만 톤(3.7%) 등이었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1억 1,103만 8,000달러이며, 월평균 1,057만 7,000달러로 이를 원화로 계산하면 534억 6,493만 원으로 월평균 약 50억 9,189만 원이었다.(『경향신문』, 1949. 12. 22; 한국은행, 『경제통계연보』, 1970, p. 122.) 이를 토대로 기획처에서 는 ‘산업부흥 5개년계획’과 ‘5개년 물동계획’이 수립되었고, 정부 각 부처는 중장기 증산계획을 수립하였다.(이대근, 『해방 후⋅1950년대의 경제』, 삼성경제연구소, 2002, pp. 170-174)
그 후 1950년 2월 23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경제안정 15원칙’은 미국측이 제시한 일본 경제안정을 위해 시행 중이던 닷지 라인(Dodge Line)으로 알려진 ‘경제안정 9원칙’을 참고하여 재정 및 금융의 균형화와 건전화를 위한 통화최고발행제, 조세체계의 합리화, 정부관리기업의 경영합리화와 독립채산제, 수송능력의 정비 강화, 노동생산성제고 등이었다.
이 원칙이 시행되면서 물가가 점차 안정되고 사회혼란이 수습되어 갔다.(「이승만과 1950년대를 다시 본다 : 송인상 부흥부장관 증언」, 『월간조선』, 2000. 11; 이대근, 앞의책, pp. 196-198) 그러나, 정부예산의 균형, 통화량 수축, 물가안정, 소비재 공업부문의 생산 증진 등이 구체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