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간부 훈련대대부의 창설과 거의 때를 같이 한 1946년 9월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에 도착하여 각 훈련소와 군사학교에 배치되어 신병훈련과 간부교육을 지도하였다. 1947년 초에 소련의 무기와 군복을 북한으로 수송해 와서 훈련대대부 예하부대에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소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인 1947년 5월 17일에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북조선인민집단군사령부’(사령관 최용건)로 개편하였다.
지금까지 위장간판을 사용해 오던 보안간부훈련대대부의 명칭을 인민집단군이라는 정규군의 명칭으로 바꾸고 정규군화한 데는 당시 남북한간의 정치적 정세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3월 20일~5월 8일)의 결과와 앞으로의 전망, 그리고 스탈린의 대 북한 공산화정책 등의 정략적 배경이 내재되어 있었다. 소련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부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까지의 공백기(1946년 5월~1947년 5월) 동안 소련측이 기대하는 ‘민주임시정부’ 수립에 유리한 상황으로 전환되기를 기다리는 한편, 북한을 남한 공략의 기지로 조성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설치하여 군사 지휘 기구를 일원화하고 1947년 초에는 북한에 장비를 대량 지원하는 등 군사력을 확장해 오면서 군사력의 실체를 위장하여 왔다.
그러나 소련 군정당국은 ‘민주임시정부 수립’에 유리한 조건이 남한에서 조성되기보다는 오히려 불가능 쪽으로 기울어짐이 판단되자, 당초의 민주기지노선 정책방향으로 군사력을 확장하면서 1947년 5월 17일에는 ‘인민집단군’이라는 정규군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선인민군’ 창군을 선언(1948년 2월 8일)하기 전까지 인민집단군이라는 이름을 대외적으로는 노출시키지 않았고 대내적으로만 사용해 왔다.
1947년 9월 17일 미 국무장관 마셜은 유엔사무총장(트리그브․리)에게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1947년 9월 24일 유엔총회 운영위원회에서 46 : 6(기권 7)으로 한국문제를 의제로 다룰 것을 채택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년 9월 26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수석대표인 스티코프 대장은 “1948년 초에 미·소 양군이 한국으로부터 동시 철수하여 한국민 스스로가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미국은 한국 통일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해결하자는 주장이고, 소련은 한반도에서 미·소 양군이 철수하여 남북한 당사국간의 해결에 맡기자는 주장이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소련주장의 배경에는 1948년도에 소련군이 북한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고, 철수하기 이전에 강력한 북한군을 창설하여, 장차 미․소 외국군이 모두 철수한 후 여건이 성숙되면 ‘한반도 공산화통일’을 무력으로 단행하고자 하는 레닌의 혁명전술이 배태된 무장력 건설로 표출된 것이 바로 정규군 편성인 인민집단군이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본격적으로 군사력 강화와 군사원조의 획득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들 사단들은 소련군으로부터 76.2㎜ 야포, 82㎜ 박격포, 120㎜ 중박격포, 45㎜ 대전차포와 각종 기관총과 다발총, 소총 등을 장비하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생일인 1947년 4월 15일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소련군 제25군사령관에게 북한군 전력의 강화에 협조를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전문내용 가운데 알려진 것은 1946년 창설된 수상보안대 구성원의 해상업무에 대한 지식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강습소 조직 협조와 비행사와 항공기술자 120명의 비행훈련과 연구를 위한 비행기 양도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가 새롭게 도착한 것에 맞추어 북한 무력은 크게 확대되었고, 북한 당국은 ‘북조선인민집단군사령부’로 모든 군사력을 통합하였다.
이렇듯 병력과 무기가 증강됨에 따라 고위 간부들은 1947년 5월 17일을 기하여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예하 전 장병에게 일제히 계급장을 수여하였다. 지금까지는 상·하의 계급이 없이 다만 간부(장교)와 전사(병사), 그리고 직책으로만 상․하 구분이 있었다. 계급장 수여식이 거행되면서 보안간부훈련대대부의 위장은 완전히 걷히게 되었고 정규군으로서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때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북한 군대의 계급구조를 보면, 병과 하사관은 병, 전사, 하사, 중사, 상사, 특무장의 6개 계급으로 분류했고, 장교는 위관급, 좌관급, 장관급 장교로 구분하고, 위관급 장교는 소성 하나(소위), 소성 둘(중위), 소성 셋(상위), 소성 넷(대위) 등 네 계급, 좌관급 장교는 중성 하나(소좌), 중성 둘(중좌), 중성 셋(상좌), 중성 넷(대좌) 등 네 계급, 장관급 장교는 대성 하나(소장), 대성 둘(중장), 왕성 하나(대장) 등 세 계급으로 분류하였다.
이들 계급장(견장)의 모양은 아래에서와 같이 소련군 계급장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이고, 계급에 대한 호칭은 소위, 중위 등의 계급을 사용하지 않고 소대장(동무), 대대장(동무) 등 직책을 부르고 있었다. 다만 기록상에는 소성 1(3급) 등으로 기록하였는데, 괄호 속에 있는 급수는 봉급 지불의 기준이 되고 있었다. 새로운 계급장을 어깨에 달게 된 군관들은 계급장을 달기 전에 비해서 걸음걸이로부터 갖가지 행동에 대해서 제법 위엄을 갖추려는 모습이었다.

국 직급과 급수
계급장 수여식과 함께 예하 각부대도 고유명칭이 부여되고 확장 개편되었다. 즉, 인민집단군총사령부는 구 일본군 제97연대가 주둔하던 평양 해방산에 위치하고 인민집단군 제1경보병사단(개천 소재), 인민집단군 제2경보병사단(나남 소재), 인민집단군 제3혼성여단(원산 소재) 등을 확장 개편되었다. 제3독립혼성여단은 완전한 사단 규모였으나 증강된 장비 보충 없이 장비를 혼합 편성했기 때문에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각 사단의 병력은 1만 400명 정도이고 제3독립 혼성여단은 3천 400명 정도로 총 병력은 약 3만여 명 정도에 달하였으며, 그밖에 약 1만 7천명의 훈련병이 있었다.

북한군 사단의 편제표
그리고 경위대를 경위연대로, 위생소대를 중앙직속병원으로 개칭 확장하였다. 지금까지 평양학원에 배속되어 있었던 항공중대를 1947년 8월 20일 배속 해제시키고 정식 비행대로 독립 창설하여 집단군 총사령부 예하로 배속시켰다. 각 훈련소가 사단으로 개편됨에 따라 부족 병력의 보충을 위하여 민청원과 당원의 강제추천으로 대량 모병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간부양성기관도 군관학교로 개편하기 위해 제반 준비를 시작하였다. 진남포의 평양학원은 평양만경대로 이전하여 제2군관학교로 개편하기 위해 1947년 9월 10일 새로이 군관훈련교사를 신축하기 시작하였고 강서군 대안리에 있던 ‘북조선보안간부학교’를 평양 사동으로 이전하여 ‘제1군관학교’로 개편 확장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각 군 기관이 정규체제로 개편 확장하였다.
인민집단군 총사령관에 최용건이 유임되면서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사령부 간부진이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리고 사단에는 신임사단장이 각각 배치되었으며 인민집단군 제1경보병사단장에는 김웅(金雄) 소장, 제2사단장에 강건(姜健) 소장이 임명되었고, 제3독립혼성여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소장이 각각 임명되었다. 나아가 군의 주요간부는 항일유격부대, 소련군, 조선의용군 출신이었지만, 중대장과 소대장은 해방 후 양성된 사람들이 대부분 맡았다.

인민집단군 편성
인민집단군은 장비에 있어서는 종래에 사용하던 일제 무기를 전부 회수하여 보안대와 경비대에 주었고, 새로 소련군에서 지원해 준 장비로 편성하였다. 여기서 각 사단에 편성된 장비를 보면, 76.2㎜ 야포, 45㎜ 대전차포, 14.5㎜ 대전자포, 122㎜ 중박격포, 82㎜ 박격포, 그리고 각종 기관총과 다발총, 보병소총 등을 인수하여 각 사단의 장비를 일신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인민집단군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소련제 신무기를 갖게 되었고 그 신무기의 조작훈련을 소련군 고문관들의 지휘하에 실시하였다.
따라서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각 군관학교와 사단에 배치되어 약 3개월간에 걸쳐 소련식 제식훈련과 각개훈련, 소대․중대․대대의 전투훈련을 비롯해서 병기학, 전술학, 공산당사, 참모학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인 재훈련을 실시하였다. 북한은 공산제국의 청년절 기념일인 1947년 7월 27일 공산제국의 친선운동경기인 국제 민청대회에 파견하기 위해서 군관학교 선수들과 북한 대표선수들의 환송경기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북한군은 평양 시민들에게 정식 북한군 복장과 계급장을 부착하고 신식무기를 갖추고 정식 사열과 분열을 실시하였다. 북한 주민들은 이날 처음으로 군관학교와 북한군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북한 고위간부들은 군관양성과 병력증강을 비밀리에 강행해 왔다. 그들은 처음부터 군관학교의 명칭을 붙이지 않고 학원이니 보안학교, 훈련소 등으로 사칭하여 북한군을 은밀히 육성해 왔다. 북한은 인민집단군으로 개편한지 약 9개월 만에 완전히 북한군을 편성하였으며 보다 강력한 군대로 육성하기 위해서 1948년 2월 8일을 기해 소위 ‘조선인민군’ 창설을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