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병
이상화
목적도 없는 동경에서 酩酊명정하던 하루이었다.
어느 날 한낮에 나는 나의 ‘에덴’이라는 솔숲 속에
그날
고요히 생각에 까무러지면서 누워 있었다.
잠도 아니요 죽음도 아닌 침울이 쏟아지며 그 뒤를 이어선 신비로운 변화가 나의 심령 위로 덮쳐 왔다.
나의 생각은 넓은 벌판에서 깊은 구렁으로 ─ 다시 아침 광명이
춤추는 절정으로 ─ 또다시 끝도 없는 검은 바다에서 낯선 산 피안으로
구름과 저녁놀이 흐느끼는 그 피안에서 두려움 없는 躊躇주저에 나른하여
눈을 감고 주저앉았다.
오래지 않아 내 마음의 길바닥 위로 어떤 검은 안개같은 요정이 소리도 없이 방만한 보조로 무엇을 찾는 듯이 돌아다녔다. 그는 모두 검은 의상을 입었는가 ─ 한 億觸억촉이 나기도 하였다. 그때 나의 몸은 갑자기 열병 든 이의 숨결을 지었다. 온몸에 있던 맥박이 한꺼번에 몰려 가슴을 부술 듯이뛰놀았다.
그리하자 보고저워 번개불같이 일어나는 생각으로 두 눈을
부비면서 그를 보려 하였으나, 아 ─ 그는 누군지 ─ 무엇인지
형적조차 언제 있었더냐 하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애닯게도 사라져 버렸다.
다만 나의 기억에는 얼굴에까지 흑색 면사를 쓴 것과 그 면사 너머에서 햇살 쪼인 석탄과 눈알 두 개의 깜작이던 것뿐이었다.
아무리 보고자 하여도 구름 덮인 겨울과 같은 帷帳유장이 眼界안계로 전개될 뿐이었다. 발자국 소리나 옷자락 소리조차 남기지 않았다.
갈피도 ─ 까닭도 못 잡을 그리움이 내 몸과 안과 밖 어느 모퉁이에서나
그칠 줄 모르는 눈물과 같이 흘러 내렸다 ─ 흘러 내렸다.
숨가쁜 그리움이었다 ─ 못 참을 것이었다.
아, 요정은 전설과 같이 갑자기 顯現현현하였다. 그는 하얀 의상을 입었다. 그는 우상과 같이 방그레 웃을 뿐이었다. 뽀얀 얼굴에!
새까만 눈으로 연붉은 입술로 ─ 소리도 없이 웃을 뿐이었다. 나는 청맹과니 모양으로 바라보았다 ─ 들여다보았다.
오! 그 얼굴이었다 ─ 그의 얼굴이었다 ─ 잊혀지지 않는 그의 얼굴이었다. 내가 항상 만들어 보던 것이었다.
목이 메이고 청이 잠겨서 가슴 속에 끓는 마음이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불김 같은 숨결이 켜질 뿐이었다. 손도 들리지 않고 발도 떨어지지 않고
가슴 위에 쌓인 바윗돌을 떼밀려고 애쓸 뿐이었다.
그는 검은 머리를 홑을고 한 걸음 ─ 한 걸음 ─ 걸어왔다. 나는 놀라운 생각으로 자세히 보았다. 그의 발이 나를 향하고 그의 눈이 나를 부르고 한 자국 한 자국 내게로 와 섰다. 무엇을 말할 듯한 입술로 내게로 ─ 내게로 오던 것이다. 나는 눈이야 찢어져라고 크게만 떠 보았다. 눈초리도 이빨도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고 나를 보았다. 들여다보았다. 아, 그 눈이 다른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 눈을 뚫을 듯한 무서운 눈이었다. 아, 그 눈에서 빗발 같은 눈물이 흘렀다. 까닭 모를 눈물이었다. 답답한 설움이었다.
여름 새벽 잔디풀 잎사귀에 맺혀서 떨어지는 이슬과 같이 그의 검고도 가는 속눈썹마다에 수은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달려 있었다. 아깝고 애처로운 그 눈물은 그의 두 볼 ─ 그의 손등에서 반짝이며 다시 고운 때묻은 모시치마를 적시었다. 아! 입을 벌리고 받아 먹고 ─ 저운 귀여운 눈물이었다. 뼈 속에 감추어 두고 저운 보배로운 눈물이었다.
그는 어깨를 한두 번 비슥하다가 나를 등지고 돌아섰다. 홑은 머리숱이 온통 덮은 듯하였다. 나는 능수버들같은 그 머리카락을 안으려 하였다 ─ 하다못해 어루만져라도 보고저웠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 두 걸음 저리로 갔다. 어쩔 줄 모르는 설움만을 나의 가슴에 남겨다 두고 한 번이나마 돌아 볼 바도 없이 찬찬히 가고만 있었다. 잡을래야 잡을 수 없이 가다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눈알이 빠진 듯한 어둠뿐이었다. 행여나 하는 맘으로 두 발을 꼬으고 기다렸었다. 하나 그것은 헛일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가고 오지 않았다.
나의 생각엔 困憊곤비한 밤의 단꿈 뒤와 같은 追考추고 ─ 가상의 영감이 떠돌 뿐이었다. 보담 더 야릇한 것은 그 요정이 나오던 그때부터는 사라진 뒤 오래도록 마음이 미온수에 잠긴 어둠 조각처럼 부류가 되며 解弛해이가 되나 그래도 무정방으로 욕념에도 없는 무엇을 찾는 듯하였다.
그때 눈과 마음의‘렌즈’에 영화된 것은 다만 장님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혼란뿐이요, 영혼과 입술에는 훈향에 비친 나비의 넋빠진 침묵이 흐를 따름이었다. 그 밖엔 오직 망각이 이제야 뗀 입 속에서 자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기억으로 거닐을 뿐이었다.
나는 저물어 가는 하늘에 조으는 별을 보고 눈물 젖은 소리로
‘날은 저물고
밤이 오도다
흐릿한 꿈만 안고
나는 살도다’고 하였다.
아! 한낮에 눈을 뜨고도 이렇던 것은 나의 병인가 청춘의 병인가.
하늘이 부끄러운 듯이 새빨개지고 바람이 이상스러운지 속삭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