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남․북한간의 군사관계는 1949년 전반기를 넘어서서 38도 선상에서의 무력충돌에 의한 국지도발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었다. 국군은 정규군으로 편성된 8개 사단 중에서 무기와 전투장비가 크게 제한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절반에 가까운 3개 사단은 후방작전으로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49년 1월경에 이미 태백산․옹진․지리산 등에서 제 3 · 제5 · 제7사단 등 3개의 사단이 공비소탕을 위한 게릴라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므로 1949년 말 영남 및 호남지역에서 암약하던 공비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와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전개한 공비소탕작전으로 대부분 섬멸되었지만, 그러한 작전으로 국군은 정규작전 능력을 배양할 교육훈련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교육각서(敎育覺書) (제1호)가 하달되어 8개 사단의 육군부대는 분대전술로부터 시작하여 대대전술훈련을 그해 3월까지 마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전에 전군에 대한 군사훈련이 모두 실시되지 못했다. 당시 보병 8개 사단 약 9만 8천명의 병력 가운데 6만 5천명이 소부대훈련을 마쳤을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 군은 38도선과 후방에서 동시에 북한군과 공비들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서 각 연대에서는 산을 이용하여 1개 대대씩 훈련을 실시했다.
교육각서(敎育覺書) (제1호)의 교육계획에 별다른 진전이 없게 되자, 1950년 3월 14일 육군본부는 교육각서(敎育覺書) 제2호를 하달하게 되었다. 교육각서 제2호에 의하면, 각 부대는 6월 1일까지 대대훈련을 완료하고 9월까지는 연대훈련을 완료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6월 15일에 가서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3개 연대와 제7사단 2개 연대 제8사단의 1개 대대만이 대대훈련을 완료하였다. 다른 연대의 30개 대대는 중대훈련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17개 대대와 5개 연대의 참모들은 대대지휘연습을 실시했고, 다른 14개 대대는 1주일간의 기동훈련을, 그리고 6개 대대가 57㎜ 대전차포훈련을 실시하였다.
한편 정부 수립 이후 국군의 군사교육과 훈련은 주로 미 군사고문단이 담당했다. 고문단들은 정부 수립 당시 100명 정도였으나 그해 말에는 약 240명으로 증원되었고, 그 이듬해 1월 미 제24군단이 철수하고, 이어 마지막까지 잔류하던 미제5연대전투단이 6월 29일 떠나게 되자 1949년 7월 1일을 기해 임시 군사고문단은 그 명칭을 바꾸고 500명 정도에 해당되는 규모의 공식기구로 출범하게 되었다.
고문단은 정보전문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단 수준의 교육 내용으로 한 군사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전투정보학교를 1949년 6월 25일 설치하였는데, 이는 남산정보학교로 개칭하여 6개월 기간의 교육과정으로 개설하였다. 정보국에 있던 미 군사고문단은 한국의 요청에 의해 한국군에게 정보업무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정보교육을 받은 한국군 정보장교들은 각 사단에 배치되어 군에 침투한 좌익을 파악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국방부는 고급지휘관과 사단급 이상의 참모들을 위해 참모학교를 설치하였다. 참모학교는 1949년 7월 1일 미 군사고문단측의 계획에 의하여 설치된 일종의 지휘참모대학(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이었다. 교육 내용은 지휘관과 참모를 8주간의 단기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졌는데, 최초 3주간은 보병학교의 고급간부반에서 미 보병학교 과정의 미국식 전술과 화기학을 배우고, 나머지 5주간은 참모학교로 돌아와 전술교리 및 참모업무 교육을 받았다.
국군 장교의 해외 군사교육을 위한 유학은 미 군사고문단이 주선하여 이루어졌다. 1948년 8월 6명의 영관급 장교가 미국의 포트 베닝(Fort Benning)에 있는 보병학교의 고급과정에 입학한 것이 시초였다. 이들은 이형근 대령을 선임으로 한 민기식, 이한림, 임선하, 김동영, 장창국 중령이었다. 1949년 6명의 영 · 위관급 장교가 포트 릴리(Fort Riley)에 있는 지상군학교(Ground Forces School)의 6개월 과정을 마치고 포트 베닝의 기초과정을 교육받았다. 최덕신 대령과 최홍희 대령을 비롯하여 심흥선(沈興善) 중령, 장은산 소령, 강관용 대위, 이승호 중위가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심흥선 등 5명은 다시 포트 실(Fort Sill)에 위치한 미 포병학교 고급과정에 곧바로 입학하였다.
미국 국방부는 1950년대 들어와서 상호방위원조에 의해 보병, 포병, 일반 참모 대학 등 총 27개 군사교육기관에 한국군 유학생에 대해 할당제를 적용하였고, 미 점령군의 행정, 훈련방법 등의 숙지를 위해 옵저버 자격으로 일본에 있는 미군부대에 33명을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유학팀은 1950년 4월 1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일본 주둔 미군 4개 사단에 배치되어 3개월간의 활동에 들어갔다. 그밖에도 병과학교로서 육군보병학교를 비롯하여 포병 · 병기 · 병참 · 통신 · 헌병 · 군의 · 정보 · 수색 · 군악학교에서 병과교육을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