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 초순 트루만 대통령은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육군 중장에게 2개월에 걸친 중국과 한국에 대한 현지 실정의 파악과 조사를 위한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주둔 미군 총사령관 겸 장개석(蔣介石)의 참모장을 역임했던 웨드마이어 장군은 국무부⋅전쟁부⋅해군부⋅재무부에서 파견된 그의 보좌관들과 함께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이 직면하고 있는 중국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1947년 7월 22일부터 8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중국에서 조사를 마친 후, 8월 25일 일본 동경에서 맥아더와의 회담을 위해 체류하였다. 8월 26일 오후에 서울에는 도착하여 한국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9월 3일 서울을 떠났다. 이 때 웨드마이어 조사단(Wedemeyer Mission)은 모두 9명으로, 여기에는 단장인 웨드마이어 장군을 비롯하여 전쟁부의 보일(James J. Boyle), 앵(Horace L. Eng) 대위, 허친(Claire E. Hutchin) 대령, 해군부 소속의 트렉설(Carl A. Trexel) 제독, 재무부 소속의 젠킨스(David R. Jenkins), 국무부 소속의 스프라우즈(Philp D. Sprouse), 워커(Melville H. Walker), 볼티모아 선(The Baltimore Sun)지의 왓슨(Mark S. Watson) 기자가 있었다.75)
웨드마이어 장군은 1947년 여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사태에 관하여 그 자신이 직접 조사 연구한 것을 1947년 9월 19일 트루만 대통령에게 비밀보고서로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웨드마이어 장군은 그의 보고서에서 소련이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한 미국은 남한에 부대를 계속 주둔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은 이데올로기적인 패배를 시인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미국의 군사적 입장은 극동에서뿐만 아니라 세계도처에서 쇠퇴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 아울러 가상적국이 한반도를 점령함으로써 부동항을 사용하게 되거나 또는 한반도에 강력한 해⋅공군 기지를 확보할 기회를 저지한다는 이유를 빼놓고서는 미국이 한국에 그 부대와 기지를 유지한다 하여도 군사상의 이점은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극동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에서 현재의 병력은 유지할 수 없으므로 하나의 군사적 부담이 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미국이 취할 군사행동에는 세 가지 방책이 있는데, 이중 최선의 방책은 소련군의 철수와 동시에 미군이 철수하는 방안이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은 되도록 소련과 협상을 해서 이에 따라 철수를 해야 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전에 북한에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에 필요한 원조와 한국인으로 편성된 방위부대를 창설하여 훈련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76)
75) William Whitney Stueck, Jr., The Wedemeyer Mission: American Politics and Foreign Policy during the Cold
War(Athens : The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4), pp. 11ᐨ15.
76) Albert C. Wedemeyer, “Report to the President : Korea”(Washington D. C. : U. 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51), p. 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