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효용에 대하여

철학에는 즐거움이 있고 형이상학의 신기루에도 매력이 있다. 자연적 생존의 조잡한 필요 때문에 사상의 언덕으로부터 경제적 투쟁과 획득의 시장으로 끌려 내려올 때까지 모든 학생들이 느끼는 즐거움이고 매력인 것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철학이 실제로 플라톤이 말한, 이른바 귀중한 즐거움이었던 청년이라는 인생의 황금기를 알고 있다. 알 듯 모를 듯한 진리에의 사랑이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의 보잘것없는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럽게 여겨지던 때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청년 시절의 지혜에 대한 갈망의 아쉬운 자취가 언제나 남아있다.

우리는 브라우닝처럼 ‘인생의 의미 있는 것이며 이 의미를 찾는 것이 나의 양식이고 음료수’라고 느낀다. 우리들의 삶은 대체로 무의미하고 자아(自我) 말살적인 미혹(迷惑)이고 공허하다. 우리는 우리 주위와 우리 마음속의 혼돈과 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혼의 암호를 출 수 있다면 마음 속에서 싱싱하고 중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한결같이 믿고 있다.

‘삶은 우리의 모든 본질과 경험을 끊임없이 빛과 불꽃으로 바꿔 놓은 것을 의미한다’ (니체 《즐거운 지혜》 서문)는 사실을 우리들은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미차처럼 백만장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의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해 한 가지 대답을 구하는 사람들의 하나이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사물의 가치와 전망을 파악하고 일상적인 환경의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작은 일은 작고 큰 일은 크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제 사물을 영원의 빛에 비추어서 영원한 모습으로 보려고 한다. 우리는 불가피한 일에 직면에서도 웃고 죽음이 다가올 때에도 미소짓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완전하기를 바라고 여러 가지 욕망을 비판하고 조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정력을 조절하려고 한다. 정력의 조절은 윤리학확 정치학, 그리고 아마도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마지막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도로우는 말했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교묘한 사상을 갖거나 학파를 창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지혜의 가르침에 따라 단순하고 독립적이며 아량과 신뢰가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지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혜를 찾아내기만 하면 다른 것은 저절로 얻게 되리라고 확신해도 좋다.

베이컨은 우리들에게 권고한다.
‘우선 마음의 양식을 추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얻게 되거나 그 상실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학문의 진보》)

진리는 우리를 부자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자유인으로 만든다.

성급한 독자는 이쯤에서 말을 가로막고 철학은 장기(將棋)처럼 무익하고 무지(無知) 처럼 궁색하며 맞목처럼 정체된 것이라고 말하리라.

키케로는 말했다.
‘철학자의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리석음 뿐이다.’

확실히 어떤 철학자들은 상식을 제외하고는 온갖 지혜를 갖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철학적 비상(飛翔)은 희박한 공기의 상승력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 항해에서는 빛이 가득한 항구에만 머물고 형이상학의 탁류와 신학적 논쟁의 ‘요란한 바다’는 피하기로 하자. 그러나 철학은 정녕 침체했는가?

과학은 항상 진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철학은 언제나 근거를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이 보이는 것은 철학이 과학적 방법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 즉 선(善)과 악(惡), 아름다움과 추함, 질서와 자유, 삶과 죽음 같은 문제들을 다루는 어렵고 위험한 일을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탐구 분야든지 정확한 공식화가 가능한 지식을 산출하면 곧 과학이라고 일컬어진다. 모든 과학은 철학으로 시작되어 기술로 끝나고 가설(假說)로부터 기원(起源)하여 성취로 흘러들어간다. 철학은 (형이상학으로서는) 미지의 것에 대한, 또는(윤리학 또는 정치철학으로서는)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가설적 해석이다. 철학은 진리의 포위망 속에 있는 최전방 참호이다. 과학은 점령 지대이며 그 후방에는 지식과 기술이 우리의 불완전하지만 놀라운 세계를 건설하고 있는 안전 지대가 있다. 철학은 어쩔 줄 몰라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철학은 승리의 열매를 과학이라는 딸들에게 넘겨 주고 거룩한 불만을 느끼며, 아직도 탐구되지 않은 불확실한 지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좀 더 전문적으로 말하기로 할까? 과학은 분석적 기술(記述)이고 철학은 종합적 해석이다. 과학은 전체를 부분으로, 유기체를 기관(器官)으로, 애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분해하려고 한다. 과학은 사물의 가치나 이상적 가능성을 탐구하지 않으며 사물의 전체적인 궁극적 의미를 묻지 않는다. 과학은 사물의 현재의 실정과 작용을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고 현존하는 사물의 성질과 과정에 단호하게 시야를 국한시킨다.

과학자는 투르게네프의 시에 나오는 ‘자연’처럼 공평무사하다. 과학자는 천재의 창조적 전통에 흥미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벼룩의 다리에도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철학자는 사실의 기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철학자는 사실과 경험 일반의 관계를 확정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내려고 한다. 철학자는 사물을 결합하여 종합적 해석을 한다. 철학자는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분석적으로 분해해 놓은 우주라는 거대한 시계를 전보다도 더 훌륭하게 조립하려고 애쓴다. 과학은 치료술(治療術)과 동시에 살해술(殺害術)도 가르쳐 준다. 과학은 사망률을 조금 낮추는가 하면 전쟁으로 인간을 대규모로 살해한다. 다만 지혜, 즉 모든 경험에 비추어 조절된 욕구만이 언제 고치고 언제 죽여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과정을 관찰하고 수단을 안출해 내는 것이 과학이라면 여러 가지 목적을 비판하고 조절하는 것은 철학이다.

오늘날은 우리의 수단과 도구가 우리의 이념과 목적에 대한 해석과 종합을 넘어서서 다양해졌기 때문에 우리들의 생활은 소란하고 어지러우며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 욕망과 관련되지 않은 경우에는 사실은 아무 소용도 없기 때문이다. 목적 및 전체와 관련되지 않는 한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철학이 없는 과학, 전망과 평가가 없는 사실은 우리들을 황폐와 절망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다. 과학은 인간에게 지식을 제공하지만 오직 철학만이 지혜를 줄 수 있다.

 

 

세분해서 말하면 철학에는 다섯 가지 탐구 분야, 즉 논리학 · 미학 · 윤리학 · 정치철학 · 형이상학이 있다.

논리학은 사고와 탐구의 이상적 방법에 대한 연구이다. 관찰과 내성(內省), 연역법(演繹法)과 귀납법(歸納法), 가설과 실험, 분석과 종합 등이 논리학이 이해하고 안내하고자 하는 인간 활동의 형태들이다. 이것은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지루한 연구이지만 사상사상(思想史上)의 위대한 사건들은 인간의 사고와 탐구 방법을 개선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미학은 이상적 형식, 즉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로서 예술철학이다.

윤리학은 이상적 행위에 대한 연구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최고의 지식은 선(善)과 악(惡)에 대한 지식, 인생의 지혜에 대한 지식이다.

정치철학은 이상적 사회 조직에 대한 연구이다(흔히 생각하듯이 지위의 획득 및 유지에 대한 기술이나 학문은 아니다). 군주정치 · 귀족정치 · 민주주의 · 사회주의 · 무정부주의 · 여성해방론 등 이러한 것들이 정치철학의 등장인물들이다.

끝으로 형이상학은 모든 사물의 궁극적(窮極的) 실재(實在)에 대한 연구, 즉 물질의 참된 궁극적 본성에 대한 연구(존재론)이고, 정신의 참된 궁극적 본성에 대한 연구(철학적 심리학)이며, 지각(知覺) 및 인식 과정에 있어서의 ‘정신’과 ‘물질’의 상호 관계에 대한 연구(인식론)이다(형이상학은 철학의 다른 형태와는 달라서 이상의 빛에 비추어서 현실을 조절하려는 조력이 아니므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러한 것들이 철학의 여러 분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체하면 철학의 아름다움과 매력은 사라진다. 우리는 시들어버린 추상성이나 형식성이 아니라 천재의 생생한 옷을 입고 있는 형태에서 철학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찾기로 하자. 우리는 단지 철학만이 아니라 철학자들도 연구하기로 하자. 사상의 성자와 순교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빛나는 정신에 젖어보기로 하자. 그러면 아마 우리들도 어느 정도는 레오나르도가 말한 가장 고상한 즐거움, 즉 이해(理解)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접근한다면 이 철학자들은 각기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줄 것이다.

에머슨은 말한다.
‘당신은 진정한 학자의 비밀을 아는가? 모든 사람에게는 배울 만한 점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의 학생이다.’

그렇다. 확실히 우리는 역사상의 위인들에 대해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고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천재들이 우리들에게 말할 때, 우리는 아득한 젊은 시절에 천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사상을 막연하게나마 스스로 생각한 적이 있다. 단지 이 사상을 정리해 형식과 표현이라는 옷을 입히는 재주, 또는 용기가 없었을 뿐이라는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고 에머슨은 말했거니와, 우리는 이 말에 영합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위인들은 우리들에게 그들의 말을 들을 중 아는 귀와 영혼이 있을 때에만, 적어도 우리들의 마음 속에 그들이 꽃피게 한 사상의 뿌리가 간직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위인들과 같은 경험을 했으나 우리는 이러한 경험에 간직된 비밀과 미묘한 의미를 남김없이 흡수하지 못했다. 우리는 주위에서 윙윙거리는 실재의 배음(倍音)을 들을 만큼 민감하지 못했다. 천재는 실재의 배음과 천체(天體)의 음악을 듣는다. 천재는 피타고라스가 철학을 최고의 음악이라고 말한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자. 그들의 하찮은 잘못은 잊기로 하고 그들이 가르친 교훈을 열심히 배우자. 노경(老境)의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이렇게 말했다.

“철학 교사들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문제는 개의치 말고 오직 철학 자체만을 생각하라. 철학 자체를 충분히 충실하게 검토해 보라. 그래서 철학이 나쁘거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을 외면하게 하라. 그러나 철학이 내가 믿고 있는 바와 같은 것이라면, 철학에 따르고 철학에 이바지하며 기운을 내라.”

 

 

About Author

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