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통적인 방어전략을 이어받아서 모택동은 “타국이 침범하지 않으면, 이를 치지 않고, 타국이 침범하면 반드시 친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는 방어전략을 기본 방침으로 정하였다. 또한,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한반도통일문제가 한반도 내부 사안이므로, 어떤 방식으로 어느 시기에 통일을 실현하든지 이는 모두 남북한 인민들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며 외부세력은 한반도에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314) 그러나 이와 모순되게 그들은 북한정부가 남침하려는 계획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1945년부터 전쟁시기까지 북한은 대외관계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소련 중심이었다. 그러나 중공의 역할도 중요한 변수였다. 중공 정권이 수립되자 1949년 10월 6일, 북한은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북한은 대표단을 파견하여 국군이 북한으로 귀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유격대에 참가하고 있어서 중국인민이 미국을 몰아내듯이 조선에서도 그들을 쫓아 낼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미 1949년 5월, 김일과의 회담에서부터 모택동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물론, 그는 그 해 남한에 대한 공격은 삼가하도록 권했고, 다음 해라면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중국이 국내문제로 매우 바쁘고 어수선한 상태이므로 북한에 대해 성실한 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중국의 중요 작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모택동이 한인 병사를 인도하는데 동의하였고, 그들의 ‘중요한 작전’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조언은 김일성의 남침의사에 대해 아직 확실한 지지를 나타내지 않았던 스탈린보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것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 후에도 모택동은 “북한이 한국 전체를 해방하고자 하는 염원을 지지했으며, 또한 중국 혁명이 완성되면 군사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북한을 돕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이러한 지지는 중국이 전쟁 이후 참전 명분으로 사회주의적 연대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가장 큰 요인으로 미군이 북한영토를 침범한다면 중국안보와 동아시아에서 전략적으로 불리하게 될 것을 우려한 것과는 달리 적극적인 전략의 표현으로 보인다.

이는 모택동의 독자적인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1949년 8월 진해에서 열린 이승만·장개석 회담에 근거하여 국민당 정부에 공군 혹은 해군기지를 제공할것이나 협약설이나 극동지역에서 반공기구로서 태평양동맹의 추진이 구체화되는 시점 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이러한 모택동의 지지 약속은 남침을 계획하는 김일성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1950년 1월 17일, 북한 외상 박헌영이 주최한 소련과 중국대표와의 만찬석상에서 김일성은 남침문제를 제기하면서 모택동이 중국에서 전쟁이 끝나면 북한을 지원하겠다는 점을 강조하였다.319) 1950년 3~4월에 스탈린도 김일성과 대담에서 중국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해방되어 조선문제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고, 긴급사태 때에는 군대도 지원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북한의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이 때 스탈린은 남측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하려면 중공지도부의 지지 확보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웠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면 반드시 모택동과 상의하고 지지를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강조하였다.

1950년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하여 모택동에게 스탈린과 회담 내용을 보고하면서 남측에 대한 침공계획을 알렸다. 비록 모택동은 이에 대해 다소 놀라움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14일 김일성에게 지지의사를 표시하였다. 다음날인 15일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김일성은 제1단계로 군사력을 증강하며, 2단계로 평화통일에 대한 대남제의를 하며, 3단계로 남한측의 평화통일 거부 후 전투행위를 개시한다는 3단계 계획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북한군이 속전속결로 행동해야 하며, 주요 도시를 포위하되 이를 점령하기 위해 지체해서는 안되며, 각 사령관과 병사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시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대도시를 우회하지 말고 군사력을 집중하여 적군을 신속하게 궤멸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는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여 해방시킨 이후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면, 중국은 북한에 대해 충분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이 지금 당장 전쟁을 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중국과 북한 양국의 공동의 혁명 임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동의하며 아울러 필요한 협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모택동은 만약 미군이 직접 참전을 하게 된다면 중국은 북한에 대해 지원부대를 파견하여 도울 것이라고 말하면서 중국과 북한 국경지대에 중공군을 배치하는 것과 무기와 탄약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모택동의 의견에 대해서 사의를 표명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김일성은 모스크바가 이미 모든 필요한 원조를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북경에 온 것은 단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모택동에게 사전에 알리는 것으로 충분한 것으로 여겼다. 김일성은 북경을 떠난 이후 모택동과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원조 물자가 중국 동북철로를 통해 북한으로 운송되지 않았고, 중공 측에 전쟁의 시작 시간마저 알리지 않아 심지어 모택동은 외국 신문을 통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5월 회담에서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동북부에 군사력을 증강시킴으로써 미군이 개입시 군대를 보내 북한을 돕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미 1950년 초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담하고 있을 때, 모택동은 중공군 제4군 산하 10만 명의 병력을 동북지역으로 서둘러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2월과 4월에 각각 중국의 남부지역과 해남도의 점령임무를 완료한 제4야전군 산하 제42군단 6만 명과 제5기갑사단 1만 명을 중국 동북부지역으로 배치하였다. 1950년 4월 동북지역을 순시하면서 주덕이 “장병들에게 경계를 결코 늦추지 말라, 여러분들은 항상 침략자들을 쓸어버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월 중순부터 7월초까지 다시 6만 명의 병력이 동북부지역으로 이동하여 이 지역에 40만 명의 병력이 집결하였다.

이러한 병력증강은 표면적으로는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경우를 대비해 북한과의 국경선을 지키려는 데 있었으나 중공이 죽한이나 소련에게 북한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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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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