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은 구체적인 침략방식을 내부 투쟁에서 무력침략으로 방향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의 공포와 더불어 북한군총사령부를 민족보위성으로 격상시키고 작전국 등 11개국으로 편성하여 각 군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이날 김일성은 민족보위성 장관에 총사령관 최용건을 임명하였다.

이때 북한의 군사업무는 이원화 체제로 유지되어 북한군은 민족보위성에서, 보안대와 국경경비대는 내무성에서 각각 관장하였다. 어느 것을 막론하고 소련군의 철수 때까지 소련군 정치사령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후에는 소련군사사절단이 북한의 군사업무에 관여하였다. 민족보위성의 창설시 편성과 각 부서장은 아래와 같다.

 

민족보위성 편성

 

북한정권 수립 후 민족보위성이 조직되면서 북한군 전투서열은 민족보위상 최용건 대장, 부상겸 문화부 사령관 김일(金一) 중장, 포병부 사령관 무정 중장, 총참모장 강건 중장, 부총참모장 최인(崔仁, 왕자인) 소장 (황호림 : 黃虎林 후임), 전투훈련국장 김웅 소장, 총후방국장 최홍극(崔弘極) 소장,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 대좌, 정찰국장 최원 대좌, 통신국장 박영순 대좌, 공병국장 박길남 대좌, 간부국장 이림(李林) 대좌, 군의국장 이동화(李東華) 대좌, 문화부국장 김일(金日) 소장, 포병부국장 김봉률(金鳳律) 대좌, 전투경험연구부장 유신(柳新) 대좌, 정치보위처장 석산(石山) 대좌, 민족보위성 고문단장 스미르노프(Smirnov) 소장 등이었다.

민족보위성으로 승격하면서 부참모장과 작전국장도 바뀌었다. 부참모장 황호림 소장(소련군 대위 출신)은 강건 총참모장과 소련 고문관들과의 마찰로 소련으로 귀국 당하고 그 후임으로 최인 소장(조선의용군 출신)이 임명되었다. 작전국장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창설 시부터 류신 대좌가 작전부장에 보직되어 오다가 전투경험연구부장으로 전보되고 작전부장은 황호림 소장(부총참모장)이 겸직하고 있다가 소련으로 귀국함에 따라 겸직하고 있던 작전국장이 공석이 되자 당시 보안간부학교 군사부교장 겸 전술학부장 유성철 대좌가 1948년 9월 작전국장으로 보임되었다.

북한은 1948년 9월 10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석상에서 김일성은 정부의 시정방향인 소위 ‘정부의 정강’을 발표 하였는데 그 중 첫째 정강과 마지막(여덟 째) 정강이 주목된다. 즉, “그 첫째 정강(과업)으로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남북조선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수립된 중앙정부는 전 조선인민들을 정부 주위에 튼튼히 단결시켜 가지고 통일된 민주주의 자주 독립 국가를 급속히 건설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이며 국토 완정과 민족 통일을 보장하는 가장 절박한 조건으로 되는 양군 동시 철거에 대한 소련정부의 제의를 실천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입니다. 마지막 정강으로,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조국을 보위하기 위하여 북한군대를 백방으로 강화시키는 사업에 최대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김일성은 수상으로 취임 후 첫 과업으로 급속한 조국통일을 위하여 미 · 소 양군을 철수시킬 것과 북한군대를 최우선으로 강화 발전시키겠다는 정부의 시정 방향을 천명하였다. 이렇게 군사업무 체계를 정비한 북한은 소련점령군의 장비를 인수받고 이어 중․소의 군사지원을 받아 급속히 군비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소련은 전쟁물자와 장비의 지원은 물론 북한군 건설초기부터 군 수뇌부, 각 부대 및 학교기관을 지도하였으며 각 사단에는 대좌급 사단장 군사고문관을 비롯하여 중대급까지 150명을 배치하고 전차부대․항공부대에도 전문 고문관을 파견하여 전술훈련, 장비교환에서부터 정비 분야까지 담당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북한군은 소련 군사교리로 무장되어 갔고 사회 전반에걸쳐 소비에트화로 촉진되어 갔다. 소련 군사고문관은 1948년 말 2천명 정도까지 증강되었으나, 소련군 철수와 동시에 대대급까지만 고문관을 유지함으로써 1949년부터 군사고문관을 대폭 감소하였으며 그 대신 특별군사사절단이 파견되어 북한군의 전쟁준비를 직접 지도하였다. 이들 군사고문관들은 평양의 소련 대사관에서 각 부문사절단을 통제하며 본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북한 정책결정기구인 정치위원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북한의 무력증강과 전쟁 구상은 김일성 정권 수립과 때를 같이하여 김일성 · 스탈린 · 모택동 3자의 긴밀한 협의 하에 추진되었다. 이는 당초 군정을 실시하면서 북한을 공산기지화하고 이를 발판으로 남한의 민중봉기와 폭동 및 반란을 유발하여 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획책하였으나, 이러한 폭력적 방법으로는 목표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무력수단으로써 이를 달성하기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그 사전 단계로서 이루어진 것이 소련군 철수문제였다.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한 이래 1948년 말까지 3년 여간 북한의 소위 ‘사회주의 굳히기’ 내지 소비에트화 하고 친소(親蘇)정부를 수립하였으며, 특히 북한의 군사력을 7만 7천명 수준으로 확장하고 탱크, 자주포, 항공기 등 현대화된 장비를 지급해줌으로써 북한을 대남한 무력혁명 기지로서의 기초를 확고히 다져 놓고 북한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상 소련군은 1947년 9월을 전후하여 은밀히 철수하여 약 4만명 정도 유지하였으며, 북한주둔군사령관으로 치스차코프 대장에서 코르트코프(G.P Kortkov) 중장(1947. 4. 5), 메르쿠로프(Merkulov) 소장(1948. 6. 7)으로 각각 교대되었고, 1948년 9월 현재에는 증강된 1개 사단 정도가 잔류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초 소련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자 국립예술극장의 소련군 환송 기념식을 비롯하여 각종의 환송행사가 연말까지 이어졌다. 소련군의 철수 상황에 대해서는 다음의 회고담이 참고가 된다. 소련군 철수시 가장 마지막으로 철수한 소련 제25군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과 초대 제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간의 있었던 회고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치스챠코프 : 북한은 우리 소련군을 어떻게 환송했습니까?
레베데프 : 문자 그대로 모든 주민이 깃발과 꽃을 가지고 나와 소련군을 환송했습니다. 마지막 제대가 1948년 12월 1일 평양을 떠났습니다. 역 광장에 소련군을 환송하는 수 만명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환송대회는 다른 도시에서도 개최되었습니다. 1948년 12월 31일 마지막 제대는 한․소 국경도시인 홍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곳에 또 하나의 집회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12시 30분 공식적으로 국경을 닫는 마지막 동작만 남아 있었습니다. 두만강 위에 놓여 있는 다리의 중간에 나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 최용건이 서있었습니다. 우리는 차단기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한 편에는 우리 국경 수비대원들이, 맞은편에는 조선의 국경 수비대원들이 서 있었습니다. 나는 조선의 동지들이 꽃으로 가득 채운 차에 올라 조국의 강가를 향해 갔습니다.
치스챠코프 : 도로변에서도 우리 부대를 환송했습니까?
레베데프 : 수 천명의 주민들이 나오고 모든 것이 꽃에 묻혔습니다.

이와 같은 소련군의 북한 철수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즉, 북한은 남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남북한 당사자들끼리 통일문제에 대한 처리에서 북한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으로 확신했다는 점이다. 소련군의 철수는 북한이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여 무력통일에 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소련군의 공식 철수는 1948년 10월 19일부터 시작되어 12월말까지 이루어졌는데, 이때 소련군의 장비를 북한군에게 이양함으로써 북한군은 급격히 강화되기 시작했다. 1948년 2월 8일 북한군 창군 당시 2개 사단, 1개 여단, 항공대대를 보유했었는데, 1948년 12월말까지 10개월 사이에 북한군은 소련군 철수시 인수한 장비로써 제3독립혼성여단이 제3사단으로 증편되고 제4독립혼성여단이 창설되었으며, 항공대대가 항공연대로 증편되는 등 전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북한군의 전력증강은 소련의 사회주의 구축 또는 소비에트화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동시에 직접적으로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즉, 1948년 12월초 김일성은 소련군 완전철수를 앞두고 북한 군비를 본격적으로 확장할 여건이 조성된 것으로 보고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스티코프 대사는 동년 12월 9일 김일성의 요청 내용을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 기존 1개 보병여단은 1만명 병력 수준의 사단으로 확충.
2) 경비여단을 토대로 6천명 병력 수준의 보병사단 신설.
3) 38선 경비여단을 각 3천 6백명 수준의 2개 보병여단으로 재편.
4) 정원에 맞춰 독립 탱크 및 자주포연대와 혼성비행연대에 물자 보충.
5) 북한 해안(동해와 황해) 경비부대 편성지원, 이를 위해 필요한 물자와 경험이 풍부한 소련 해안 경비군관 배정.

 

북한군 지상군 배치 (1948. 10 현재)

 

이 밖에도 김일성은 “당신에게 보내는 친서를 통해 북한군에서 복무중인 217명의 소련 군사고문과 기술 인력을 잔류시키고, 새로 확충될 부대준비를 위해 182명을 추가로 증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김일성은 확대, 재편되는 부대의 보충에 필요한 무기 탄약 차령 기술 및 통신장비 마필 짐마차와 개인장비에 대한 유상양도를 요청했다.

위의 스티코프 보고서에는, “현재 남한정권의 결정으로 가까운 시일 내 남조선군 수를 10만명으로 확충하기 위한 추가 군대소집이 진행 중이며, 남한은 해군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수와 무기에 대한 상세 자료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또한 “김일성 수상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북한군 부대를 위해 요구되는 무기와 동산에 대한 세부자료와 결산은 소련군 총참모부에 보유하고 있으며, 이 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결정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문에 스탈린이 여단급 부대를 사단으로 확대할 것을 염두에 둔 듯한 간단한 자필메모도 확인된다. 즉, 그는 소련군 총참모장 쉬체멘코 대장에게 “1개 여단을 사단으로 확대하고 추가로 1개 여단을 편성하며 자주포연대, 탱크연대, 비행연대를 각각 보충하고 이에 필요한 무기를 제공하기로 결정한다”고 지시하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군사지원 요청을 대부분 수용했으며, 쉬쩨멘코 총참모장이 즉각 이 지시의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지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주요 사안의 경우 차후에 소련공산당 정치국 이나 내각회의에서 추인 혹은 결정문을 채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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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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