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양국은 카이로선언의 ‘적당한 절차’를 구체화하는 방안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이미 1945년 10월 20일, 미 국무부 극동과장 빈센트(John C. Vincent)는 “조선이 다년간 일본에 예속되었던 관계로 지금 당장 자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미국은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하여 그 간 조선 민중의 독립한 통치를 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할 것”을 제안하였다.(『매일신보』 1945. 10. 23; 박찬표,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고려대출판부, 1997, pp. 67-71.)
이에 대해 우익정치세력은 물론 좌익세력도 반대했다. ‘각 정당 행동통일위원회’는 “조선민족은 4천년의 장구한 역사와 혁혁한 문화를 가졌고 완전한 독립국가를 유지하며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실력과 열의를 가진 것은 각 국이 충분히 인식할 줄 믿는다. 일본의 통치하에서도 우리는 해내외에서 수많은 동지가 혈전고투하여 해방에 노력해온 것을 그들이 시인하고 원조까지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운운함은 조선민족을 모욕하고 기만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신탁통치의 절대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 때, 조선공산당 정태식은 “신탁관리문제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선민족으로서는 절대로 찬성치 못하는 것”으로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매일신보』 1945. 10. 29.)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남북을 분할 점령한 상황에서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려는 국제적 노력의 일환으로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삼상회의를 열었다. 삼상회의에서 “조선 주재 미소 양국군사령관은 양국의 공동위원회를 설치, 조선임시민주정부 수립을 원조한다. 또 미⋅영⋅소⋅중 4국에 의한 신탁통치제를 실시하는 동시에 조선임정부를 수립케 하여 조선의 장래 독립 준비, 신탁통치기간은 최고 5년으로 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 각종 민주적 단체와 협력하여 정치적 경제적 발달을 촉진하고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을 강구한다”는(『매일신보』 1945. 10. 29.) 내용이 결정되었다. 이는 한국에 5년간의 신탁통치를 함으로써 통치능력을 향상시켜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신탁통치의 비보를 접한 서울의 유흥업체는 일제히 문을 닫았다”는 기사처럼 국내에서는 신탁통치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군정청에도 전 직원이 출근을 하지 않고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참가하였다.(『자유신문』 1945. 12. 30;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 고려대출판부, 1997, pp. 67-71.) ‘중경 임시정부’에서는 긴급히 회의를 열고, 신탁통치제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고수하는 한국민족의 총의에 절대로 위반된다”고 결의하였다.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탁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였다.(『동아일보』, 1945. 12. 30)
삼상회의 결정 직후에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 “조선신탁통치가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는 보도를 이제 막 읽고 너무나 의외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면서, “우리 조선은 어떠한 이유로도 신탁통치를 실시할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공산당에서도 탁치반대 전단을 살포하였다.(『서울신문』, 1945. 12. 29; 『중앙신문』, 1946. 1. 1.)
그런데 1946년 1월 초, 좌익세력은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세계 민주주의발전에 있어서 또 한 걸음 진보”라고 평가하면서, “신탁제도 역시 그 내용이 조선독립을 달성하는 순서, 과도적 방도인 한 충분히 진보적 역할을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 전진이다. 그것은 을사조약이나 위임통치와는 전연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신탁과도 아주 판이할 것”이라고 이를 지지하였다.(『중앙일보』, 1946. 1. 3.) 이러한 정책의 변화로 그들의 위신과 지지는 크게 추락하였다.(조병옥, 『나의 회고록』, 해동, 1986, p. 155)

신탁통치 결사반대 (1945.12)
좌익의 태도변화 후 국내 정치세력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좌우익이 각각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민주의원’으로 양분되어 정치세력은 완전히 나누어지게 되었다. 좌익은 한국의 해방이 스스로 획득하지 못한 현실을 인정하여 탁치안에 대해서 반대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성을 내세워 탁치안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이와는 달리 즉시 독립을 주장하여 왔던 한국민족의 열망을 바탕으로 한 김구(金九)와 이승만(李承晩) 등의 우익세력은 “신탁통치가 웬말이냐, 반탁운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해방직후의 정계 상층부만의 대립과 분열이 민족의 대립과 분열로 확대되었다.(심지연, 『미소공동위원회연구』, 청계연구소, 1989, p. 25)
국내세력의 양분 속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공동위원회는 미⋅소 양 주둔군 대표들이 삼상회의 결정에 입각하여 한반도의 남북통일과 경제 정상화를 위한 과도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신탁통치 실시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기구였다.
1946년 1월 16일부터 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이 소련측 위원으로 스티코프(Terentii F. Shtykov) 중장, 로마넹코 등과 미국측 대표로 하지(John R. Hodge) 중장, 아놀드(Archibold V. Arnold) 소장 등이 참가하여 1개월 안에 미⋅소 양군으로 조직된 공동위원회를 서울에 두고, 위원회는 미군측 5명, 소군측 5명으로 조직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조선일보』, 1946. 2. 6.)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당시 한 언론은 “동회의가 조선의 진로를 좌우하는 중대한 관건을 쥐고 있는 만큼 그 추이는 자못 3천만 민중의 주목의 집점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3천만의 감격과 흥분은 격앙되고 있다”고(『서울신문』, 1946. 3. 21.) 공동위원회에 대한 한국민의 관심을 전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회의가 진행되면서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와 협의할 조건, 순서와 실천에 관한 순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기구와 조직원칙 등 제안, 장래 임시정부의 정강, 법규문제에 관한 준비토의 등을 위한 3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여(『서울신문』, 1946. 3. 31.) 미⋅소가 협조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회담에 임하는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한반도에서 배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회담의 진행절차에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결렬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제5호 공동성명의 해석을 둘러싸고 드러났다.(심지연, 『미소공동위원회연구』, 청계연구소, 1989, p. 11;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출판부, 2003, pp. 222-226.)
1946년 4월 18일 발표된 제5호 공동성명에서 공동위원회 사업의 첫 순서인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할 조건에 대해,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과도정권으로서의 조선림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원조대책을 강구하고자 구체안을 작성함에 있어서 협의의 대상을 삼는 조선민주주의 정당급 사회단체는 진실로 민주주의적이며 이번 결의문에 포함된 선언서를 시인하여야 한다. 선언서에는 막부삼상회의결의문중 조선에 관한 제1절의 목적을 지지하고, 제2절의 협의에 대한 공동위원회의 결의를 고수하며, 제3절 정치적 경제적 진보에 대한 원조(신탁)방책에 관한 제안을 작성함에 협력한다는데 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46. 4. 19.) 즉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는 삼상회의 결정을 전적으로 수락해야 하였다.
이는 소련측 대표 스티코프 중장이 공동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공동위원회의 과업은 조선인민들이 국내의 부흥과 민족민주주의화 실천사업을 능히 실행할 그런 민주주의적 조선림시정부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각 민주주의적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대중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할 것”(『서울신문』, 1946. 3. 21.)이라고 연설한 내용과 같은 취지로 소련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러한 방침에 대해 좌우익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은 이를 적극 지지하고 서명하였다.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는 ‘제5호 성명’ 속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 후 하지 장군이 선언서에 서명하는 정당과 사회단체에게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할 수 있는 의사표시를 보장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한 후, 우익세력의 집결체인 비상국민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되 탁치를 전제로 한 일체 문제는 절대 배격한다”고 결정하였다.(『조선일보』, 1946. 5. 3; 이동현, 『한국신탁통치연구』, 평민사, 1990, pp. 125-127.) 그러나 소련은 탁치반대세력의 공동위원회의 참가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휴회되고 말았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한 후 1946년 가을,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가 사실상 합법정부이며 모든 한국 사람들은 여기에 복종하고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이승만에게 제의하였고, 1947년 초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기반으로 신정부수립운동을 추진하였으나 미 군정의 제지로 중단되었다.(로버트 T. 올리버(박일영역), 『이승만비록』, 한국문화출판사, 1982, pp. 90-91.) 이미1946년 6월 초, 이승만은 정읍에서 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연기된 여건에 비추어, 소련을 한국에서 물러나도록 세계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임시적 정부조직을 수립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서울신문』, 1946. 6. 4; “Summary of Conditions in Korea”, 1946. 6. 1-15,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자료집』 20, p. 8) 1946년 12월초,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신탁통치의 폐기와 유엔이 한국문제를 떠맡아 한국의 즉시 독립을 미국정부와 여론에 호소하였다.(로버트 T. 올리버(박일영역), 『이승만비록』, 한국문화출판사, 1982, pp. 90-91, 97, 113; 정용욱, 『미 군정기 이승만의 ‘방미외교’와 미국의 대응』, 『역사비평』 30, 1995 가을, pp. 310-312, 319-320. 로버트 T. 올리버(박일영역), 『이승만비록』, 한국문화출판사, 1982, pp. 93-94, 97-98, 105-106.)
한편, 미국과 소련은 휴회되었던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하기 위해 교섭을 계속하였다. 공동위원회의 재개 조건으로 소련 주둔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중장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은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고, 하지 중장은 공동위원회 제5호 성명에 서명한 단체는 협의대상에서 참가시키도록 하자고 했다.
이러한 조건이 알려지자, 우익세력은 크게 반발하였다. 1947년 1월 24일, 우익진영 30여 개 단체는 반탁투쟁방침을 통일하고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은 김구, 부위원장에 조성환(曺成煥), 조소앙(趙素昻), 김성수 등이었다.(『조선일보』, 1947. 1. 16; 『동아일보』, 1947. 1. 28) 이에 맞서, ‘민주주의민족전선’⋅남조선로동당을 위시한 좌익 30개 단체는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관한 미⋅소간의 교환서한에 대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해온 정당 단체 개인을 공동위원회에서 협의의 상대로 끝까지 배제시켜야 한다고 성명하였다.(『경향신문』, 1947. 1. 17.)
이러한 갈등 속에 과거에 반탁운동을 하였지만 앞으로 공동위원회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단체를 임시정부에 포함시킬 용의가 있다는 선까지 소련이 양보하면서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6월 7일, 미국과 소련은 공동위원회에게 참여하고자 하는 각 정당 사회단체에게 ①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고 조선임시정부 조직에 대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의를 고수하며 신탁통치(후견)에 관한 제안을 작성하는 데 협력한다는 ‘선언문’을 첨부한 청원서, ② 임시정부의 조직과 그 원칙에 관한 자문서와 임시정부 정강에 대한 답신서를 제출하는데 합의하여, 11일 공동성명 제11호를 발표하였다. 공동위원회는 선언문과 자문서 등을 정당 사회단체에게 배포하였다.(『동아일보』, 1947. 5. 22 ; 정용욱, 앞의 책, p. 404.)
이에 따라, 남한에서 425개, 북한에서 38개 등 모두 463개의 정당사회단체가 협의를 신청하였다. 이를 정파별로 구분하면, 우익 158개(51.3%), 좌익 108개(35.1%), 중간파 42개(13.6%)였다. 북한에서 제출한 단체는 전부 좌익이었다. 각 단체들의 회원 수를 살펴보면 모두 7,50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남북한 총인구 3,000만 명을 훨씬 넘어서 과장과 중복이 심하였음을 드러냈다. 이를 재정리한 소련측 분석에 따르더라도 좌익 1,445만 명, 우익 1,248만 명, 중간세력은 1,151만 명에 이르렀다.(『서울신문』, 1947. 8. 2; 주한 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미군정정보보고서』 14, 일월서각, 1986, p. 319; 정용욱, 앞의 책, pp. 404-408.)
그러나, 여전히 미⋅소 양측은 협의대상이 될 정당사회 단체의 조건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였음을 자문단체의 명부작성에서 드러냈다. 소련은 정당사회 단체 가운데 삼상회의 결정에 규정된 사회단체라는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 단체와 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하기 위해 특별히 조직된 정당이나 단체는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6월 27일 회의에서 300만 명의 회원을 가졌다는 8개 우익 정당을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28일에는 1947년 1월에 조직된 반탁위원회에 속한 35개 단체를 협의대상에서 제외시킬 것을 다시 주장하였다. 7월 12일에도 반탁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우익정당의 배제를 요구하였다.(서용선, 「미소공동위원회 연구」, 『군사』, pp. 207-208; 김계동,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서울대출판부, 2000, p. 131.) 이는 앞으로 구성될 임시정부에서 좌익주도를 확실히 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만일 우익을 배제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들어주게 되면 한반도에 좌익정권이 수립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였다.(심지연, 앞의 책, p. 19) 1947년 9월, 하지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 Jacobs)는 국무장관 마샬(George Marshall)에게 “한국에 좌익정부가 수립되지 않는 한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진척시킬 의지가 없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만약 미국이 유엔전략에 실패한 채 남한의 정부수립을 추진한다면 우리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미국의 대소봉쇄정책에 긴요할 경우 모스크바협정을 포기하고 남한의 발전을 위한 계획에 착수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신복룡,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이관 : 1948-49」, 『한국정치외교사논총』 21-1, pp. 239-240.) 즉 미국입장에서는 소련안으로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없었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과도정부를 과연 어떠한 형태로 구성할지 제대로 논의도 하기 전에 협의대상 선정문제로 결렬되었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미⋅소 협조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어느 한 편의 이익도 침해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기존의 ‘분할 통치’에 의한 세력균형을 선택하였다.(김계동, 「한반도 분단⋅전쟁에 대한 주변국의 정책」 , 『한국정치학회보』 35-1, 2001. 6, p. 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