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 영화에서 배우는 공존의 기술
진보성
국립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
몇 년 전부터 멀티버스(Multiverse) 영화가 인기다. 멀티버스란 ‘멀티’와 ‘유니버스’의 합성어로 천체물리학에서 다중우주를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우주가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여러 우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적 개념이다. 다차원적 우주를 가정한 영화들은 주로 미국의 마블 스튜디오에서 많이 제작하였다. 슈퍼맨 같은 만화 속 영웅들이 동일 시공간에 모여 활약하는 시나리오를 위해 가상의 공유 세계관을 설정한 것이 제작 배경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가상의 악한 적에 대항하는 선한 영웅이 등장한다. 공존・공생하기 어려운 대상을 선한 주인공이 깨부수는 권선징악 액션의 전형이다.
물론 멀티버스 영화에 액션 장르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22년 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다소 코믹한 액션이 가미된 영화로 다중우주가 배경이지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중국계 이민자 가족을 배경에 둔 이 영화는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면서 개인 자아의 성찰에서 시작하여 나와 타인의 관계를 고찰하고 우리들의 화해로까지 나아간다. ‘우리의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는 또 하나의 다중우주 개념이 등장한다. 이 우주가 단일한 우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또 다른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나와 유사한 다양한 존재가 다른 우주에 있을 수 있으며 ‘또 다른 나’의 존재끼리 서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가설이다. 다른 우주에 ‘또 다른 나’가 살아 있고 공존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블린(양자경 분)은 이 영화 속에서 수많은 ‘또 다른 에블린’을 체험한다. 어떤 세계에서는 영화배우가 되었다가 요리사가 되기도 하고, 중국무술고수, 소시지 손가락을 가진 인간, 심지어 광야 위의 돌이 되기도 한다. 마치 ‘전생’체험과 비슷한 얘기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남편과 딸, 아버지가 다중우주에서 영웅이나 악당, 또는 간혹 찌질이가 되는, 수없이 다양한 존재로 혼재되어 나타남을 경험하면서 자신은 물론 단일하게 여겨지던 내 주변의 친숙한 인물들이 그렇게 단일한 존재가 아님을 절감한다. 주인공 에블린의 다중세계 모험은 일상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이해의 지평으로 나아가 나와 너, 나와 여러 타인의 관계를 지금 여기서 다시 돌아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던 경계의 담을 뛰어넘어 새로운 소통의 장을 제시한다.
이 영화는 다중우주를 배경하고 있으나 우리 삶과 동떨어진 얘기를 담지 않았다. 영화 속 다중우주와 다중세계는 곧 내 안에 있으나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다양한 내 삶의 가능성을 말한다. 사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지만,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택으로 우리는 현재 우리의 자리에 서서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고 살아간다. 이런 삶의 경로를 누구나 겪었기에 이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내가 선택한 현재 삶이 단일우주라면, 내가 실현치 못한 수많은 삶은 다중우주의 무한한 또 다른 나의 삶과 같다. 우리가 하나의 우주에 묶여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다양한 또 다른 나를 가진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우주가 광대한 만큼 내 안의 나 역시 무한하고 광대하기에, 서로가 그렇게 다른 모든 것이기에 나의 다양성을 안다면 상대의 다양성을 알아서 서로가 다름을 잘 이해할 길이 열릴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잘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우리말 공식 제목은 ‘더 모든 날 모든 순간’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직역이 더 좋다. 우리가 공존하는 이 세계를 표현하기에는 ‘모든 것, 모든 곳, 한꺼번에’가 더 잘 와 닫는다.
게시: KNOU위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