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온우주를 구성하는 과학적·윤리적 물질이면서 에너지
氣
기氣는 물질과 에너지를 동시에 의미한다. ‘우주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는 ‘우주가 물질로 가득 차 있으며 에너지로 인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동아시아인들은 물질과 에너지를 구분하지 않고 한꺼번에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기의 물질적 측면은 질質, 혹은 형形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기질氣質과 형기形氣는 구체적 사물들이 물질과 형태로 구성되어 있음을 설명해 준다. 구체적 물질과 형태는 사물들마다 모두 다르다. 기질과 형기는 사물들마다 다르다.
이런 물질적 측면과 별도로 기氣가 또 다른 협의의 개념으로 사용될 경우 에너지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기가 빠졌다’라거나 ‘기가 느껴진다’고 할 때의 기氣란 에너지만을 의미하는 협의의 기氣이다. 일상적인 용법에서 이처럼 에너지의 의미만이 부각되어 물질과 기氣가 별개인 것인 것처럼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기고 기氣가 가진 에너지의 특면을 부각시킬 경우 기공氣功이라든가 음양오행陰陽五行 등의 신비주의적인 주장으로 빠질 염려가 크다.
기氣의 물질적 측면은 설명할 여지가 별로 없다. 그냥 사물과 사람들마다 기질과 형기가 다르다고 하면 끝이다. 반면에 기氣의 에너지적 측면은 설명할 여지가 많다. 과학적 사고가 성숙하지 못했던 중국 고대인들은 에너지로서의 기氣를 설명하면서 오로지 창의력과 직관에만 의존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기氣라는 에너지를 운동과 양태의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운동의 측면은 취산聚散, 즉 모이고 흩어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우주의 물질들은 모두 모이고 흩어지는 운동을 통해 변화무쌍하게 생성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음양陰陽, 즉 어두움과 밝음이라는 두 가지 양태를 갖는다. 기氣를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 개념은 취산과 음양이다.
기氣의 양태를 설명하는 음양이라는 개념은 다시 오행五行으로 분화된다. 오행이란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 등의 다섯 가지 성질을 일컫는다. 오행 개념을 통해 기氣의 에너지로서의 측면이 다시금 물질적 측면과 연결된다. 동아시아인들은 만물의 변화를 오행의 상생相生과 상극相克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기氣를 음양오행陰陽五行 측면에서 설명할 경우 신비주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실제로 기氣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 설명방식은 송나라 이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채 전통의학 등에서만 명맥을 유지한다.
철학적 측면에서 기氣의 의미를 획기적으로 부각시킨 사람은 장재張載이다. 장재는 우주의 태초 모습을 태허太虛라 일컬으며, 그것을 곧 기氣라고 말했다. 우주의 시발은 태허라는 기氣에서 발견되며, 이 기氣가 흩어지고 모이는 변화무쌍한 운동을 통해 만물이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장자莊子의 생각에서 빌려온 것으로서 오늘날 빅뱅Big Bang이론에서 설명하는 우주의 태초 모습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빅뱅이론이나 장자와는 달리 장재는 기氣의 취산작용을 단지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기氣를 통해 인간의 윤리적 측면까지 설명하고자 한다. 간단히 말해 좋은 기氣와 나쁜 기氣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재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거대한 우주론과 윤리학 체계를 수립한 사람이 주희朱熹이다. 그는 장재가 애매하게 남겨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理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장재는 태초의 시작과 그 이후의 변화과정을 모두 기氣만 가지고 설명한다. 그러나 기氣만으로 이런 모든 측면을 설명할 경우 난감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태초의 발생은 아름답고 선한 것인데 어떻게 그런 아름답고 선한 태허로부터 악한 기氣가 나오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희는 태허로서의 기氣 대신 주돈이周敦頤가 중시한 태극太極으로서의 이理를 도입해 우주의 선한 본질을 설명하고, 선과 악의 뒤섞인 현상은 기氣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理는 태초로부터 영원토록 선한 우주의 본질이며 원리 그 자체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선하다. 그러나 기氣는 다르다. 기氣가 흩어지고 모이는 작용 과정 중에 더러운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기氣는 악한 윤리적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 주희는 기氣 가체에 이미 선과 악의 근원이 있다고 가치론적으로 해석했다. 기氣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기도 하다.
주돈이는 태극을 통해 음양오행이 빚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어떻게 태극이라는 원리에서 음양오행이라는 구체적 기氣가 발생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장재는 태허를 통해 기氣가 흩어지고 모이면서 만물이 생성한다고 일원론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어떻게 선한 기氣에서 악한 기氣가 나오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주희는 주돈이와 장재 사상의 핵심을 받아들여 절충하면서 이 두 가지 이론들이 가지는 결점을 절묘하게 극복한다.
우주의 과학적·도덕적 원리理로서의 이理와 우주를 이루는 물질이자 도덕적 가치의 근원인 기氣는 늘 함께 있다. 물질 없이 원리만 덩그러니 있을 수 없으며 원리 없는 물질도 있을 수 없다. 이理와 기氣는 늘 함께 하면서 우주의 근원과 인간행태의 윤리적 양상을 결정한다.
기氣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처럼 기氣가 과학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윤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기氣의 윤리적 측면으로 발생한 철학적 문제들을 논했던 것이 바로 조선철학의 역사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조선의 철학자들은 기氣의 윤리적 측면만을 논했을 뿐 기氣의 과학적 측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이런 점은 조선 후기 몇몇 실학자들에 의해 비판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최한기崔漢綺는 기氣에서 완전히 윤리적 의미를 벗어버리자고 주장하기에까지 이른다. 이로써 과학과 윤리를 일관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성리학의 기나긴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