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히틀러의 침공 8개월 후인 1942년 2월 23일 스탈린 지시 55호를 통하여 제창한 바 있는 ‘항상적(恒常的) 작전요인’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전후에도 계속하여 “전쟁은 지상군을 주축으로 하는 모든 군종 및 병과의 통합된 노력, 효율적인 전술 전략적 이용 및 엄정한 협조 하에서 수행될 것”이라는 기존의 소련 군사이론에 입각한 군사력의 재편과정이 진행되었다.128)
당시 소련의 군사력은 크게 육⋅해⋅공군의 3개 군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방공군과 공정군은 독자적인 조직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국가안전위원회(GPU) 소속 국경수비대와 내무부 소속 경비대가 소련 군사력의 일부를 점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은 완전한 기계화, 화력과 기동력의 강화, 전투 시 각급 부대의 독자적 작전능력 강화 등에 입각하여 건설되었다. 지상군의 최고 전술단위인 보병군단은 기계화사단과 수 개의 새로운 군단 포병대를 보유하게 됨에 따라 화력과 기동력이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각종 포와 박격포가 21%, 그리고 전차와 자주포가 20배 이상 증가하여 1953년 현재 보병군단의 일제 사격량은 전차, 고사포 및 자주포를 제외하고는 37톤을 상회하게 되었다. 이는 독⋅소 전쟁 말기 군단 일제(一齊) 사격량의 7배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당시 1개 군단의 일제 사격량은 약 5톤이었다. 또한 소련 군사전략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이시기 보병군단의 기동성은 독⋅소전 시기의 기갑군에 뒤지지 않았으며 전투임무를 담당할 수 있을 만큼 강화되었다고 한다.129)
한편 지상군의 기본 전술단위인 보병사단 조직도 대폭 개편되었다. 사단에 1개 자주 기갑 연대가, 그리고 각 보병연대에는 SUᐨ76포대(중대)가 편입되어 화력이 강화되었다. 그 결과 1946년의 경우 사단포병의 일제사격 화력은 3,500톤으로, 그리고 1분당 사격량은 65만 2천 발로 증가하였다. 또한 전차, 자주포, 일반차량, 견인차량, 장갑차량 등의 보급에 따라 보병사단의 기동력이 대폭 강화되어 일반 보병부대와 기계화부대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1948년 소련군 편제에 의하면, 1개 보병사단은 일반차량, 견인차량 및 장갑차를 포함하여 총 1,488대를 보유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130)
그러나 기동력과 화력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도 보병사단은 고사포, 공병장비, 통신장비 등의 면에 있어서는 취약성을 보이고 있었다. 기병은 그 효용성의 감소에 따라 지속적으로 감축된 끝에 1954년 마침내 해체되었고 기갑 및 기계화부대 역시 개편되었다. 우선 기갑군을 주축으로 기계화군이 새로이 창설되었다.
기계화부대는 통상 2개 전차사단과 2개 기계화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일반보병과 비교할 때 보다 많은 전차와 자주포, 강력한 일반포와 고사포 장비를 보유하였다. 전차군단과 기계화군단은 전차사단과 기계화사단으로 축소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 사단들은 2차대전시의 전차군단 및 기계화군단과 비교하여 보다 많은 전차와 포병 장비를 보유하였다.131)
포병은 일반포병뿐만 아니라 최고총사령부 예비포병의 화력도 강화되었다. 포병소속의 대전차부대와 로케포부대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으며, 지상군부대들이 보유하는 각종 포 및 포격유도장비가 급속하게 강화, 발전되었다. 즉, 먼저 포병부대와 박격포부대는 신형 85㎜ D-48 대전차포, 대전차무반동포, 122㎜ D-74포, 130㎜ M-46포, 152㎜ M-47포, 240㎜ 박격포, 육상목표물에 대한 탐색 및 측정을 위한 레이다기지, 파편축적기뢰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둘째, 1944년형 85㎜ 포와 100㎜ 야전포, 1938년형 122㎜ 유탄포, 120㎜와 160㎜ 박격포 등이 개량되었다. 셋째, 적 항공기에 대한 공격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낙후된 고사포들이 신형 57㎜와 100㎜ 고사포로 교체되었다. 넷째, 로켓무기의 성능이 향상되어 BM-14 및 BM-24체계의 도입으로 사거리, 정확성 등이 향상되어 카튜샤(M-8, M-13)의 효과적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화력의 강화와 함께 포병의 기동력도 크게 증강되었다. 즉, 이 시기 신형 견인장비의 도입으로 중포(重砲)장비까지도 시속 25ᐨ30㎞로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시속 6~10㎞를 넘지 못하였다. 공병, 화학 등 여타의 병과의 경우 새롭고 보다 현대화된 기술병기를 보유하게 됨에 따라 부대 화력이 강화되고 장비의 효율성이 증대되었다. 전쟁말기와 비교하여 1953년 보병군단 내 대포병중대의 수가 1.5배로 증가하였으며, 화학병과의 경우 핵무기의 사용가능성에 대비하여 방사능 방어임무를 담당하는 부대들도 강화되었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전략 폭격기 및 핵무기에 의한 공격능력이 강화되자 소련 방공군의 역할과 의미도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시기 소련지도부는 방공군의 강화에 상당히 주력하였다. 즉 서부전선, 남서부전선, 중앙전선, 자카프카즈전선 등의 방공군을 방공관구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1948년에는 마침내 방공군을 소련군의 독립 군종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전 국토를 국경에 연한 지역을 관할하는 국경대와 내부지역으로 다시 구획하였다. 국경대의 방위임무는 각 해당 관구사령관에게, 그리고 해군기지에 대한 방위임무는 각 해당 함대사령관에게 부여하였으며, 내부지역은 독립군종인 방공군으로 하여금 방위하게 하였다.
또한 방공군의 무장체제도 강화하였다. 이 시기 방공군의 강화는 우선적으로 고사포부대의 강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고사포부대들은 큰 구경과 빠른 발사속도를 지니는 고사포를 보다 많이 보유하게 되었다. 한편 방공군 항공이 강화되어 이 시기 소련 방공군은 최초로 초음속전투기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1952년에는 대공미사일을 실전 배치하게 된다.132)
방공군 체제의 강화와 아울러 공군도 대폭 강화되었다. 과거 소련공군은 전술항공과 전략(장거리)항공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이 시기 전술항공 소속의 강습항공이 전투폭격항공으로 교체되고 1946년 전략항공이 조직상 독립되었다. 또 같은 시기 공정군 소속의 수송항공이 창설됨에 따라 이후 소련공군의 편성체제는 전술항공, 전략항공, 수송항공 등 3개 분야로 크게 대별되었다.133)
각 항공부대의 편성체제는 독소전 시기와 비교할 때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공군은 조직적으로 강화되어 1945년과 비교할 때 1953년 말 현재 소련 군사력에서 공군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3배가량 증가하였다. 또한 이시기 제트기가 실전 배치됨에 따라 제트기 조종사로의 재교육을 위한 새로운 과정들이 개설되었으며, 그 결과 1947년 말에는 약 500명의 공군 조종사들이 제트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6월 공정군은 공군으로부터 독립하여 무력부에 직속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정사령관 직책이 도입되는 등 공정지휘부가 새롭게 조직되었으며 독립근위공정여단과 일부의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낙하산공수와 착륙공수부대들이 창설되었다.
공정군은 조직체계상의 개편과 함께 새로운 병기로 재무장하게 되었다. 즉 먼저 각 공정부대들은 ASUᐨ57 자주포, 85㎜ 포, 120㎜ 박격포 등 보다 많은 수의 자동화기, 포, 박격포, 대전차 및 고사포 장비를 보유하게 되었다. 둘째, 중형(重型)글라이더와 화물낙하산이 공수부대들에 도입되어, 57㎜와 85㎜ 포, 경자주포 장비 및 소령차량 등이 공중낙하가 가능하게 되었다. 셋째, 신형 수송기의 도입이 시작되었다. 당시까지도 공정군은 속도가 느리고 화물탑재 능력이 적은 Li-2와 같은 많은 수의 노후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글라이더의 견인과 무거운 화물의 수송을 위해 공군이 퇴역시킨 TU-2 및 TU-4 폭격기를 광범위하게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정치적, 군사적 환경에 처한 소련 지도부는 해군력의 강화에 주목하고, 제4차 5개년 계획의 수행을 통하여 소련 해군력을 신속하게 강화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1952년 제작에 착수한 선박의 총 배수량은 1940년 제작된 함선 배수량의 3.5배를 상회하게 되었으며, 신형 선박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1953년에 이르러서는 전후 제작된 신형선박이 전체 해군 선박의 약30%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소련해군은 연안지역에서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 시와 비교할 때 이 시기 해군의 편성체제에는 변동이 거의 없었다. 즉, 당시에도 해군은 함선, 잠수함, 해군항공, 연안방위부대, 해병 등의 병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특기할 만한 사항은 기지로부터 멀리 위치해서 전투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잠수함의 비율이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소련 해군은 이후 잠수함과 해군항공의 지속적인 강화에 주력하였다. 평시체제로의 전환에 따라 일부 독립 소함대들이 더 이상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해체되었다. 당시 해체된 소함대는 백해 군사 소함대, 도나우 및 드네프르 군사 소함대 등이었다. 또한 연안 방위지역과 해외에 설치되었던 임시 해군기지들도 해체되었다.134)
또한 국경수비군 및 내무경비군의 활동과 조직이 대폭 개편되었다. 우선 현역군 후방에 대한 방위의 필요성이 없어졌으므로 전쟁시 현역군 후방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던 내무인민위원회군 총지휘부가 해체되었다. 내무군은 대폭적으로 감축되었으며 철도 및 주요 산업체 방위부대들도 해체되었다. 소련 국경이 일부 변경되자 과거 현역군 후방을 방위하던 부대들은 새로이 국토로 편입된 지역으로 이동 배치되었다.135)
한편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소련군의 군사교육체계를 전반적으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최초의 징후는 1946년 8월 2일 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선포된 ‘당 및 소비에트 활동가 지휘요원의 양성과 재교육에 대한 포고령’이었다. 이 포고령에서는 기존의 장교 및 지휘관 속성 양성과정을 “계획적이고 엄정하게 조직된 양성과정”으로 전환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그 결과 소련 군사교육체계가 크게 개편되었다.
먼저 중급 군사교육기관의 교육 기간이 2년으로 연장되었으며 입교대상은 전쟁에 참전했던 일반병사와 하사관, 그리고 장교가 되기를 원하는 8~9학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청년으로 규정되었다. 하지만 입교한 인원 가운데 상당수가 중급일반교육을 이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육과정에는 일반교육과정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전쟁시 빈번한 직책 변경과 급속한 계급 상승 등으로 충분한 일반교육 혹은 군사교육을 이수하지 못한 상당수의 장교들을 위하여 새로운 고급 및 중급 군사교육기관들을 설립하였으며, 새로운 장비의 운용을 목적으로 하는 많은 수의 재교육과정을 도입하였다.
즉, 1946년 방공군 최고군사학교가 포병 레이더 군사아카데미로 재조직된 것을 시작으로 1947년 레닌 군정치아카데미와 군사물리체육연구소가, 1949년에는 방공군을 위한 2개 고사포학교와 1개 레이더 학교가, 그리고 1953년에는 통신지휘 아카데미와 포병지휘아카데미 및 방공군을 위한 2개의 무선기술학교가 개설되었으며, 이외에도 수 개의 공병기술과정의 고급 혹은 중급군사학교들이 설립되었다.136) 또한 전쟁종료 후 고급군사교육기관인 군사아카데미에 입교하고자하는 장교의 수가 급증하게 되자 소련군지휘부는 군사아카데미의 입교 자격요건을 강화하여 그 수효를 조정하였다.
소련지도부는 군 교육기관의 개편과 아울러 당정 활동체계도 개편하였다. 전쟁종료 후 소련지도부는 ‘군내 당정활동의 강화, 군내 소장 공산당원들에 대한 이념과 정치교양의 주입, 신형병기에 대한 군 인력의 적응력 향상, 일원적 지휘체계와 군기의 강화 등 평시 군내 당정활동의 주요 과제로 제시하고 관련시책들을 추진하였다.
우선 당 중앙위원회는 군내 공산당원의 수를 확대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1945년 12월 8일 군 인력을 당에 영입한다는 일반조항의 재도입을 규정하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전쟁시 전투에 참여했던 유능한 전사들을 당에 영입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는 동원 해제에 따른 군내 공산당원의 급감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포고령 선포 후 3년이 지난 1948년 말 현재 보병중대의 40%이상과 포병중대의 25%가 당 조직을 보유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조치를 통한 영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어떻든 당 중앙위원회는 군내 공산당원을 확대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는 한편, 전후 군내 당정활동의 개편을 위하여 1946년 7월 ‘당의 확장에 대한, 그리고 당에 재영입되는 자들에 대한 당 조직화활동과 당정활동 강화 방안에 대한 포고령’을 선포하였다. 이 포고령에는 특히 ‘당 규범에 제시된 당 원칙 및 규정의 엄격한 준수, 당내 민주주의의 발전, 공산당원에 대한 이념 및 정치교양활동 강화, 공산당원들의 창조적 적극성과 자율성 향상’ 등의 과제가 강조되었다.
군내 정치교육체계의 강화 결과 1947년의 경우 약 50%의 장교요원이 지휘관 정치교육을 이수하게 되었으며, 13%는 야간대학과 야간 당 학교에서, 약 30%의 장교는 자습을 통하여, 7%의 장교는 일반학교 혹은 고급군사교육기관의 불출석 수업을 통하여 정치교육을 이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군내 정치교육체계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1948년 현재 소련군내에는 정치학교 2,640개, 레닌 생애 연구모임 4,250개, 공산당역사 연구모임 6,200개, 대대 정치학교 690개, 마르크스-레닌주의 야간대학 162개 등이 있었으며, 총 27 명의 공산당원과 콤소몰요원이 교육을 받았다. 또한 1951ᐨ1952년에는 각급 부대 지휘관 가운데 74%가 마르크스-레닌주의 야간대학을 수료하였다.137)
결과적으로 소련은 질적 양적으로 확대된 군 교육기관과 또 새롭게 체계화된 당정 활동체계를 통해 대규모의 군 인력을 다시 확보하게 되었고 재무장계획에 의해 재편된 병력을 기반으로 유사시에 즉시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군을 육성하고 있었다.
128) 항상적 작전요인이란 후방의 안정, 군대의 사기, 사단의 양과 질, 군대의 장비, 지휘관의 조직능력 등이었다.
129)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55-356.
130) 1944년 1개 사단은 총 419대의 차량, 견인차량 및 장갑차를 보유하였다.
131) 이 시기 전차사단 및 기계화사단들은 보다 강력한 장갑력 및 화력, 기동력을 갖춘 신형 中型 및 重型 전차와 과거에는 보유하지 않았던 수륙양용전차를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57ᐨ358.
132)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58ᐨ360.
133) 폭격항공부대로 구성된 장거리항공은 다양한 기종의 폭격기들을 보유하였는데, 상당수의 폭격기들은 핵무기 사용을 전제하고 실전 배치되었다. 공정수송항공은 수송공정항공으로, 그리고 그 후 수송항공으로 개칭되었다.
134)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60-363.
135) 전쟁결과 소련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라투아니아 등 발트3국, 핀란드의 일부 영토, 몰다비아 등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김학준, 『러시아사』, pp. 304-306.
136) 이 시기 장교요원 양성에 공헌이 컸던 교육기관으로는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레닌군정치아카데미, 기갑아카데미, 제르진스키 포병아카데미, 주코프공군기술아카데미, 모자이스키 공군기술아카데미, 공군아카데미, 키비세프공병아카데미, 군통신아카데미, 해군아카데미 등이 있었다. 한편 작전 수준에서의 지휘관 및 참모요원의 양성은 총참모부아카데미에서 담당하였다.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 365.
137) 『소련군사정책, 1917-1991』, pp. 366-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