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부철학
기독교 신앙에 대한 플라톤식 합리화
patristic philosophy
교부철학敎父哲學은 교부Church-Father들의 철학으로 기원후 2~7세기 유럽의 철학을 지배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가 대표적이다.
교부철학은 별다른 이론적 토대 없이 방황하던 기독교 신앙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그 이론적 토대의 핵심적 내용은 플라톤Platon에게서 빚지고 있다. 플라톤이 말한 영원 불변의 참된 진리로서의 이데아idea가 기독교 신앙과 결부되어 신God으로 변모한다.
교부철학은 중세 암흑기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교부철학 이후 스콜라철학을 거쳐 르네상스로 이어지기까지 중세 유럽에선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일체의 사상이 완벽히 부정되었다. 1천 200여년 동안 말이다.
혹자는 이런 중세를 암흑기라 칭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보인다. 중세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의 이념체계가 1천200여 년 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신봉된 사회에서 과연 어떤 희망이 발견될 수 있을까? 암흑은 암흑인 것이다. 단지 중세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분들은 그 암흑이 좋다고 느낄 뿐!
교부철학의 최고봉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열렬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앙을 합리화하는 데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악하다고 보았는데, 이런 인성론은 당연히 아담과 이브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사과를 따먹은 아담으로 인해 모든 인간이 졸지에 악한 본성을 타고난 존재로 격하된다.
동양의 순자荀子가 주장한 성악설性惡說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성론에선 인간을 희망적으로 보지 않는다. 악한 인간들은 언제나 악한 제도와 악한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기댈 것은 오로지 신뿐이다. 기댈 것은 오로지 성인聖人이라 본 순자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렇다면 이런 악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착한 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존재의 발견이 중시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게 말한다.
“내가 방황함으로써 내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와 비슷하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발언은 근대적 주체의 발견에 일정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허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발견한 인간이란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본적 미약함을 깨닫고 신을 발견하는 종교적 인간이다. 모든 것을 회의하고 방황한 결과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타락한 존재인지 깨닫고, 참된 존재로서의 신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신앙은 비합리적이다. 초기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Q. S. F. Tertullianus는 “나는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했다. 이것이 어쩌면 가장 솔직한 신앙고백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합리는 또다른 비합리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합리적 이론의 토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공격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이후의 교부들은 플라톤의 정교한 이데아철학을 받아들여 기독교 신앙을 합리화했다. 어떤 합리적·비합리적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이론적 신학을 추구했다.
비합리적인 신앙이 합리적 틀을 갖추면 그것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의 교조적 이론체계는 르네상스를 거쳐서야 겨우 새로운 근대적 희망 앞에 자리를 내놓는다. 그 과정이 얼마나 길고 고난에 찬 과정이었는지는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채석용, 『철학 개념어 사전』(서울: 소울메이트, 2010), 5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