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론
사물의 본질은 알 수 없고 오직 사물에 대한 관념만 가질 뿐
idealism

관념론idealism에는 두 가지 뚜렷이 구분되는 의미가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의미의 이데아주의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인식론적 의미의 관념론이다.

먼저 존재론적 측면을 살펴보자. 관념론은 idealism의 번역어이다. 여기에서 idea란 고대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를 의미한다. 그리고 고대 희랍철학에서는 이데아라는 용어 대신 형상 형상eidos이란 용어로 즐겨 사용했다. idealism이란 이데아 혹은 형상이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진짜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때 idealism은 ‘이데아주의’ 혹은 ‘형상주의’로 번역해야 옳다.

이데아주의는 현실 속에서 위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디엔가 완벽한 이데아 혹은 형상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는 점에서 유물론materialism과 대립된다. 왜냐하면 유물론은 이데아를 부정하고 존재론적 맥락에서 이데아를 인정하는 것을 idealism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엔 관념론이라 번역하는 것이 부적절하다.

이번엔 인식론적 측면을 살펴보자. 인신론적 의미에서 idealism이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 우리 밖에 실제로 있는 존재즉 실재 reality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물의 실제 본모습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물에 대한 관념idea을 가질 뿐이라고 말한다.

가령 책상 위에 있는 파란 꽃병을 우리가 볼 경우 “파란 꽃병이 실제로 책상 위에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대신 “우리의 감각이 책상위애 파란 꽃병이 있다는 관념idea을 만들어낸다.”고 말해야 한다. ‘파란 색’, ‘책상’, ‘꽃병’이라는 것의 본질을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관념을 가질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밖에 파란 꽃병이 실제로 있고, 파란 꽃병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재론realism이 취하는 입장이다. 실재론은 관념론과 달리 우리 밖의 존재가 리얼real하게 본질적으로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밖의 실체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 인식론적 실재론이 존재론적으로는 형상주의idealism인 경우가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형상주의idealism이면서 동시에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데아가 실재한다고 주장한 실재론realism이다. 따라서 존재론적 층위를 구분하지 않고 idealism을 일률적으로 ‘관념론’으로 번역하면 큰 혼동을 야기하게 된다. 정리하면 이렇다.

• 존재론 : 유물론materialism ↔ 형상주의idealism
• 인식론 : 실재론realism ↔ 관념론idealism
• 플라톤 이데아론의 경우 : 형상주의idealism이면서 실재론realism

인식론적 관념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버클리G. Berkeley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관념론은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독측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자신의 따귀를 때리면 “나의 볼따구니에 철썩 무언가 얹혀 묵직한 고통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졌다.”라고 설명해야 하는데 과연 정말로 버클리는 그런 식으로 주장했을까? 자신의 따귀를 때린 사람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따귀 맞았다는 관념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버클리가 관념만을 인정했다고 해서 우리 밖에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실제로는 없는 것이며 우리의 관념만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버클리는 외부 사물이 있다는 정도는 인정했다. 버클리는 그런 기본적 사실까지 부정할 정도로 심각하게 정신승리를 외친 관념 신봉자는 아니었다.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

버클리의 이 주장은 ‘물질이나 사건이 우리에게 경험되어 관념이 만들어졌을 때에만이 그 물질이나 사건은 의미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념론은 철저한 경험주의적 특성을 보인다.

가령 이런 것이다. 머리에 뿔 달린 유니콘이 현실 속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유니콘은 실레로 우리의 감각에 의해 경험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버클리는 우리가 직접 경험해 관념이 된 것이 아닌 일체의 것을 부정한다.

우리가 유니콘을 직접 경험해 유니콘이라는 관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유니콘을 만들어낸 것처럼 성실성이라든가 신념, 운동, 원인 등의 개념들 또한 우리가 직접 경험한 관념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상상이 빚어낸 허구라고 그는 주장한다.

즉 버클리의 관념론은 외부 대상과 무관하게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 마구 자의 적으로 만들어내는 상상된 실재를 거부하고, 오로지 감각경험이 직접 파악해 관념으로 또렷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외부 대상들만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자는 주장이다.

누군가 자신의 따귀를 때렸을 경우를 다시 살펴보자.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면 순식간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저 자식이 나에게 감정이 있어 내 따귀를 때렸구나. 저 자식 아주 나쁜 인간 말종이다.”라고 단숨에 그의 본질을 규정해버린다.

그러나 버클리는 이런 식으로 무언가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저 따귀를 맞았다는 관념만을 인정하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그가 내 따귀를 때렸던 건 나에게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를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로 착각하고 때렸을 수 있다. 따귀를 맞은 내가 관념만을 받아들일 뿐 그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은 덕분에 나는 그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즉 착각을 범하지 않게 된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본질이란 것은 없다. 그저 그 사물과 사람을 경험함으로써 그에 대한 관념만이 생길 뿐이다. 이것이 바로 버클리가 주장하는 관념론이다.

그러나 버클리의 관념론은 한계가 뚜렷하다. 버클리에 의하면 지각되지 않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지각되지 않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까지 취급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저 멀리 아마존에 서식하는 수많은 생물들이나 태평양과 대서양의 심연은 무가치한 것이란 말인가? 아예 존재 자체까지 부정되어야 하는 것들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버클리는 매우 황당한 답변을 내놓는다.

“아니다. 그것들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을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신God이 지각하기 때문이다. 신은 마물을 모두 지각한다. 다라서 만물은 존재한다.”

대철학자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하는 통찰력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더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가 주장하는 신이라는 것도 결국엔 상상의 소산일 뿐 결코 지각된 경험적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신을 통해 관념론을 합리화하지만 결국 그의 관념론은 신을 부정하는 우스꽝스런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버클리에 이어서 관념론은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이 다양하게 주장한다. 특히 독일에서 관념론은 꽃을 피웠다. 칸트I. Kant의 초월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과 헤겔G. W. F. Hegel의 절대적 관념론absolute idealism은 모두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의식한 결과 탄생했다.

채석용, 『철학 개념어 사전』(서울: 소울메이트, 2010), 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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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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