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여름에 이르러 신탁통치를 거쳐 한반도에 단일 국가를 건설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이 실현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자 소련 정부는 38도선 이북에 공산주의자를 내세운 단독 정부의 수립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소련 지휘부는 북한의 ‘소비에트화’ 또는 ‘공산화’를 실현하려 하였다. 즉 최고의 수준에서 소련지도부의 마음에 드는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북한에서 새 정부의 수립은 형성 초기부터 여러 차례의 위기에 직면하였는데, 그 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에서 발생한 학생소요사건이었다. 반공을 부르짖으며 일어난 이 소요사태는 결국 소련군을 비롯한 지방치안단체에 의해 진압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가 한국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한 후 소련 정부는 북한에 공산 정권의 수립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이른바 ‘인민헌법’을 기초할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948년 3월 2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간부회의에서 전 한국의 주권을 주장한 인민헌법 초안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남한의 5․10선거와 때를 같이 하여 5월 1일에 이 헌법 초안을 통과시키고, 이 해 7월에 ‘전 조선이 통일될 때까지 이 헌법을 북한지역에서 실시할 것’과 ‘이 헌법에 의거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발표하였다.(Philip Rudolf, North Korea’s Political and Economic Structure(New York :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p. 17.)

이 결정에 따라 그들은 8월 25일 북한 전역에서 소련식 ‘흑백선거’를 실시하고, 이 해 9월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성립을 선포하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같은 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초대 내각 수상으로 선출되었으며, 그가 임명한 내각이 ‘최고인민회의’의 승인을 받았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그가 내각 성립 다음날인 9월 1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행한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선언’이다. 그는 이 선언에서 북한 정권은 “남․북조선 인민의 총의로 수립되었으며, 중앙정부는 …… 단일 민주주의
국가와 ‘조국통일과업’을 제1차 목표로 삼는다”고 한 것이다. 또 그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적법하게 제정하여 유효한 모든 법률이 ‘무효’이며 ‘위법’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였다.(남·북한이 채택한 헌법은 모두 강력한 통일지향적 법체계로서 상호간에는 법률적으로 충돌을 면키 어렵게 되었다) 이 선언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북한 당국은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소위 조국통일이라는 미명 아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셈이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후인 1948년 10월 12일 소련 정부는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이때 소련 수상 스탈린은 “공화국 정부가 조선 사람들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지상의 과제로 삼으라”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남침’의 별칭인 ‘조국통일과업’을 북한 정권의 ‘주도’로 추진하라고 하는 공개적인 지령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스탈린이 이때 사용한 ‘통일’이라는 말은 ‘평화적인 통일’이거나 ‘무력적인 통일’이거나 어떤 경우라도 북한 당국이 그것을 주도하라는 뜻이었다. 소련 정부가 북한 정권을 승인한 이후 다른 공산국가들도 그 뒤를 따랐다.

한편, 소련 정부는 10월 18일 전 소련 점령군사령부의 군사위원이며, 미․소 공동위원회의 소련측 수석대표로 활약한 슈티코프 장군을 초대 주(駐)북한 소련대사로 임명하였다.(그는 임지로 떠나기 전인 1948년 12월 3일 소련 정부로부터 그 동안 북한에서 활약한 공로를 높이 인정받아 소연방 최고 영예인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슈티코프는 ‘특별군사사절단’을 이끌고 다음 해 1월 12일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그는 대사와 군사령관이라는 이중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임명은 소련의 외교 관례로서는 매우 드문 일로서, 그에게는 분명히 어떤 ‘특수한 임무’가 부여된 것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이리하여 한민족에게는 광복과 함께 단일국가를 건설할 기회가 주어지는 듯했으나, 소련의 남진(南進)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 점령지 분할과 한반도에 위성국가를 건설하려는 소련의 확고한 정책으로 인해 결국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에는 대한민국 민주 정부, 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공산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민족과 국토의 분단이 고정화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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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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