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신비주의를 버리고 합리적인 세상을 건설하자는 상식철학
enlightenment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으로 인해 몇 년 후 루이 16세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렸다. 하나님의 권능을 현실세계에서 위임받았다고 여겨지던 절대 권력의 상징적 인물이 대중들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죽게 된 것이다. 계몽주의enlightenment란 왕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왕으로 표상되는 온갖 구체제와 신비주의, 구습과 종교를 일거에 내동댕이치는 것을 의미한다.

계몽주의는 정치적으로 왕정을 반대하고 민주정치를 옹호한다. 로크의 이권 분립론과 몽테스키외의 삼권 분립론은 더 이상 왕 하나에만 권력이 집중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계몽주의의 정치선언이다. 권력 분립론에는 왕이 끼어들 여지 자체가 없다.

계몽주의는 사상적으로 신God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을 중시한다. 신학보다는 철학을 중시하며, 철학 가운데서도 형이상학보다는 인식론을 중시한다. 하지만 모든 계몽주의자들이 신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로크도 신을 인정했으며, 칸트도 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진짜 계몽주의는 볼테르Voltaire에 의해 제기되었다. 볼테르를 비롯한 프랑스의 무신론적 계몽사상가들이 계몽주의를 완성했고, 그 결과 혁명이라는 찬란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학문적으로는 그다지 높이 평가받지 못하지만 현실에 미친 영향이라는 측면에선 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라 평가될 수 있다.

계몽주의의 대표자 볼테르의 서재에는 공자孔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정확히 말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중국이 찬란한 문명을 건설해온 역사에 큰 감명을 받았다. 볼테르가 활동하던 18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중국은 문화와 역사, 학문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유럽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앞서 있었다. 볼테르는 기독교라는 유일신을 믿지 않는 중국의 발전상을 본받아 유럽도 신학의 질곡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볼테르의 이런 믿음을 사실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중국에는 신학이 없었지만, 대신 성리학이라는 고도의 형이상학이 있었다. 특히 조선의 성리학은 가공할 만한 이론적 정교함으로 단련되어 도저히 어느 누구도 근본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는 절대적 신념체계로 군림했다. 1789년 프랑스에선 왕의 목을 자르는 혁명이 발생했지만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그런 혁명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정조正祖의 통치가 무르익던 시절이었다. 정조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구체제를 더욱 공고히 다지고자 했다. 정조 이전까지 신하들에 의해 왕권이 농락되던 상황을 바로잡아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던 때에 중국을 통해 서학, 즉 천주교가 유입되었다. 정조 입장에서 천죽는 성리학을 위협하는 이단에 불과했다. 정도 때엔 성리학과 천주교의 대립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조 사후 대립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정조자 죽은 다음 해인 1801년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구체제 세력은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일으켰다.

참으로 슬픈 역사이다. 유럽은 신을 중심으로 한 구체제와 무신론을 바탕으로 하는 계몽주의라는 신체제가 일대 전쟁을 일으킨 반면, 조선에선 성리학이라는 동아시아의 구체제와 천주교라고 하는 유럽의 구체제끼리 일대 전쟁을 벌인 것이다. 유럽이 계몽주의라는 신체제를 피의 대가로 구축하던 시절, 조선은 낡은 두 체제끼리 부질없는 싸움만 벌였던 것이다. 공자를 추앙하는 성리학자들이 기독교 이상의 교조적 신념체계인 성리학을 신봉했음을 알게 되었다면, 아마도 볼테르는 반공자주의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는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이런 자발적인 혁명의 역사가 없다. 중국만 해도 뒤늦게나마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몰아낸 신해혁명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구체제와의 결별을 고한 혁명의 역사가 없다. 우리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게 흐지부지 역사에서 사라졌다.

뒤늦게 터진 4·19혁명은 실상 구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부패에 대한 저항에 불과했다. 때문에 너무도 쉽게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5·16혁명’이라 불렸던 사실은 계몽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이 부재한 우리의 슬픈 역사를 희극적으로 묘사해준다.

신비주의와 교조주의, 주술과 신학이 난무하는 한 계몽주의의 가치는 여전히 현대에도 유효하다. 계몽주의의 함정을 논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치일 뿐이다.

채석용, 『철학 개념어 사전』(서울: 소울메이트, 2010), 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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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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