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치지
만물의 과학적 · 윤리적 원리를 탐구하는 방법
格物致知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주희朱熹가 정립한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여덟 가지 조목 가운데 맨 처음을 장식하는 핵심적인 두 가지 조목을 말한다.
여덟 가지 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이 가운데 격물과 치지가 중세 이후 유교철학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온세상天下을 평정하기 위해선 먼저 개인적 덕목인 격물과 치지를 달성해야 한다. 사회보다 개인윤리를 중시한 유교의 본질적 특성이 격물치지론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본래 『대학』은 독립적인 책이 아니었다. 『예기禮記』 가운데 지극히 적은 분량의 한 챕터에 지나지 않았다. 주희는 방대한 양의 『예기』 가운데서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부각시킬 수 있는 두 부분을 발췌해 독립적인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들이 바로 『대학』과 『중용中庸』이다. 『중용』은 성리학의 철학적·이론적 틀을 뒷받침하며 『대학』은 성리학적 실천의 문제를 다룬다.
주희는 격물에서 물物을 ‘사물 및 사태’로 해석하고 격格을 ‘다가감’ 이라고 해석한다. 격물이란 사물 및 사태에 직접 다각 그 내용을 면밀히 탐구하고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치지에서 치致를 ‘완성함’으로, 지知를 ‘앎’으로 해석한다. 치지란 앎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격물치지란 개별적 사물이나 사태를 면밀히 탐구해 궁극적으로 앎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희가 말한 격물치지 과정이 철저히 윤리적 과정에만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격물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로 보면 격물을 과학적 활동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주희가 말한 격물은 과학적 활동이 아니라 윤리적 활동이다. 사물 및 사태에 다가가 파악하고자 하는 목적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윤리적 판단이다. 치지란 곧 무엇이 과연 윤리적 앎인지를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희가 설명하는 격물치지의 내용을 보면 그럴 듯해 보인다. 되도 않는 추측이나 종교적 독단에만 의지하지 말고 사물과 사태에 직접 관여해 윤리적 앎을 이룩하라는 실천지침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허나 아쉽게도 주희와 그 후계자들이 속 시원히 구체적 사물이나 사태를 면밀히 탐구해 “이것이 바로 참된 윤리적 앎이다.”라고 외친 적은 없다. 사물과 사태를 과학적 측면에서 탐구하는 것은 가능해도 윤리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대나무와 바위, 동물과 식물들을 아무리 붙잡고 조사해 봤자 거기서 윤리적 앎의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다.
격물치지를 통해 주희 학파가 실질적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허망하게도 경전 학습이었다. 구체적 사물과 사태를 파악해 봤자 별다른 소득이 없으니 매달릴 수 있는 것은 경전뿐이다. 이미 옛 성현들이 격물을 통해 좋은 말씀들을 경전에 죄다 밝혀 주셨으니 후학들은 오로지 이 경전만을 학습하면 그만이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성리학이 말하는 격물치지가 그럴 듯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성리학에서 격물치지란 실제로 경전학습에 지나지 않는다. 구호는 거창했으나 현실은 초라했다.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인 왕수인王守仁은 성리학이 주장하는 격물치지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대나무를 붙들고 일주일 동안이나 씨름해 병을 얻은 후 “대나무를 통해서는 윤리적 앎을 완성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외친다. 낡은 경전을 붙들고 있어 봤자 얻을 수 있는 가르침도 많지 않다. 그리해 격물치지를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해석한다.
왕수인은 격물에서 격格을 ‘바로잡기’로, 물物을 ‘사태’로 해석한다. 그는 주희처럼 말로만 사물이나 사태를 탐구하자고 주장함으로써 과학과 윤리를 구분하지 않는 모호함 속에 도피하고자 하지 않고 아예 직접적으로 사태를 윤리적으로 제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물에서 사물의 의미를 제거함으로써 애초에 격물을 과학적 탐구의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또한 치지致知에서 치致를 ‘드러내기’로, 지知를 ‘양지良知‘로 해석한다. 치지란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양지를 드러내어 실현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격물치지란 사태를 윤리적으로 바로잡아 인간에게 양지가 주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그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성리학이 탐구를 통해 앎을 극대화하고자 애쓴 주지주의적 입장을 취한 반면 양명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험적 능력인 양지를 토대로 사태를 직접 바로 잡는 실천에 나서야 한다는 행동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주희의 격물치지가 치지보다는 격물을 중심으로 하여 후천적 지식을 극대화하는 것에 중점을 둔 반면 왕수인의 격물치지는 격물보다는 치지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양지가 주어져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리학이 이론적 학문의 성격을 가진 반면 양명학이 실천적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격물치지에 대한 입장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격물치지를 과학적 활동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시도를 행한 사람들은 물物에서 사물의 의미를 지웠던 왕수인과는 정반대로 물物에서 사태의 의미를 지웠다. 격물이란 말 그대로 사물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활동의 의미로 재해석된다. 이로써 격물을 윤리적으로만 해석하고자 한 중세적 사유체계가 부정될 계기가 마련된다.
그러나 여전히 격물은 『대학』의 한 조목이며 『대학』의 궁극적 목표는 윤리이다. 따라서 격물을 과학적 활동으로 해석하고자 한 시도도 『대학』의 틀 자체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과학의 의의를 상대적으로 더 강조했다는 정도에서 그러한 시도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채석용, 『철학 개념어 사전』(서울: 소울메이트, 2010), 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