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떠한 방법으로 한국 철학을 연구해야 하는가
연구자들 가운데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은 연구 방법이 다르다는 점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 근거로 서양 철학이 역사적으로 존재론이나 인식론적 경향이 강했던 것과 달리, 동양 철학은 수양론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을 두기도 한다. 또는 서양 철학이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동양 철학은 직관이나 체득을 중시했다 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어떠한 철학이든 보편성의 원칙에서 본다면 굳이 방법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같은 두 가지 주장은 한국 철학 연구에서도 같은 연장으로 나타난다. 한국이라는 특수한 조건에 근거한 연구 방법이 있다는 주장도 있고, 철학의 보편성에서 볼 때 그러한 주장은 편협한 국수주의적 사고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 속에는 연구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방법론의 차이가 아니다. 어떠한 철학에만 유용한 연구 방법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어떠한 연구 방법이 다른 방법에 비해 한 사상을 분석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에서 비교 우위에 놓인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선택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방법이 연구 목적에 들어맞는 결과를 얻는 데 얼마나 유용한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새롭게 볼 수 있는 틀을 만드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가 하는 데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한국에 적합한 사유 체계를 바람직한 발전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인가, 또 이를 과연 대다수 한국인들이 동의하고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그러므로 훈고학적 방법이든 고증학전 방법이든, 또는 해석학적 방법이든 현상학적 접근이든 위의 전제를 충족할 수 있다면 모두 유용하다. 유물론적 방법 또한 유용하다면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본래 한국 철학 사상을 탐구하는 근본 목적은 한국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 철학을 연구하는 방법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자세가 필요할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해 보자.
첫째,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역사 의식 · 시대 의식 · 사회 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어떠한 철학 사상이 있었으며 그 사상들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했는지, 그리고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부터 오늘까지 이어지는 철학 사상을 탐구하는 목적이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기 위한 것이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으로 창조적인 전환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을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전통 철학 사상으로부터 오늘의 현실 문제를 해결할 힘을 얻을 수 있는 눈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그 눈이란 바로 시대 의식 · 역사 의식 · 사회 의식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시대적 요구와 역사적 사명, 그리고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짚어낼 수 있는 눈을 의미한다.
둘째, 우리 사상에 대한 자긍심이 전통 철학 사상 경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철학 사상을 지나치게 높이고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자세는 자긍이 아니라 자만이 될 뿐이다. 자만은 언제나 자기 철학 사상 안으로 움츠리는 폐쇄성을 낳고, 그 결과는 국수주의나 허위 의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우리의 철학 사상을 스스로 낮추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자기 비하일 뿐이다. 전통 철학 사상에 대한 자기 비하는 우리 민족의 사유 체계 속에 담긴 선조들의 고유한 성과를 무시하는 민족허무주의를 낳고, 그 결과 남의 것을 무조건 추종하는 외래 사상 의존 태도를 가져 온다. 하지만 자긍심은 그렇지 않다. 자긍심은 주체 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철학 사상에 굳건한 토대를 두고 있으면서 외래 사상 가운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긍정적인 자세로 수용하게 만든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에만 우리의 철학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낼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우리 사상에 도움이 될 외래 사상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지 않게 된다.
셋째, 창의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체로 한국의 철학 사상은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근대 이전과 오늘 우리가 사는 현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근대 이전의 철학 사상을 만들어 낸 사회적 토대와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적 토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철학 사상을 실현하는 방법과 주체도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과거의 철학 사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옮겨 심을 수는 없다. 근대 이전의 철학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은 군주가 기준으로 작용하던 봉건제라는 사회적 조건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민중이 기준은 민주 사회에 살고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사회 조건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물론 우리 역사 속에는 약하지만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다른 사회 조건 속에서 한국 철학 사상의 전통들을 의미있게 계승해 내기 위해서는 그 전통들을 철저히 비판하고 개조해 낼 수 있는 창의적 자세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한국 철학을 연구해야 하는가? 첫째는 정치 · 사회 · 경제적 배경과 연관하여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철학이든 그 철학이 나온 시대 상황에서 동떨어질 수 없다. 봉건 시대에 나온 철학은 군주와 양반 관료가 중심이 된 정치 제도와 지주–전호제에 입각한 봉건적 토지 경제 및 차별적인 사회 신분 제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철학이 언급하는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견해 또는 세계관이나 자연관 속에는 그 같은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고려 중기 선종禪宗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현상의 배후에는 양반 관료의 무신 정권의 대립이 감추어져 있고, 조선 중기 예학이 발달했던 배경에는 정치를 문벌 중심으로 고착화시켜 가던 당쟁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토대 분석을 그냥 지나쳐 버리면 과거의 사상아 지닌 한계에 대한 지적 없이 그것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용하다는 몰역사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과학성을 상실한 주장이며,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 될 수는 있어도 철학이 될 수는 없다.
둘째는 다른 학문 분야가 이루어 낸 성과와 연관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철학의 발전은 사회 여러 분야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중세 과학의 발전이 가져 온 세계관의 확대는 일정하게 철학적 세계관의 확장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 외세와의 관계가 주요 모순으로 작용하는 근대 이후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정치학계나 역사학계의 성과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노력 없이 철학의 발전 과정만을 문제삼는다면 그 결과는 관념 일변에 치우친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셋째는 철학사의 흐름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철학사에 나타난 모든 철학이 우리 민족의 사유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물론 아무리 부정적인 철학도 발전 과정에서 본다면 반대 급부로 더 나은 철학을 끌어내는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아무리 긍정적인 철학도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그대로 스러져 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철학사 서술에서 개별 철학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이다. 만약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바람직한 철학의 미래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철학을 판가름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철학의 역할은 시대의 성과를 종합해 들이면서 총체적인 설명을 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시대의 문제점을 얼마나 정확히 짚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인식한 시대의 문제를 얼마나 논리적인 체계로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자료 선택의 문제도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