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철학이란 무엇인가
어느 민족이나 민족의 존립 근거는 주체성이다. 주체성은 민족 내부의 동질성을 보장하는 기반인 동시에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 또는 국가간의 협력과 조화가 강조되는 오늘날의 국제화 시대에는 특수성에 기반을 둔 민족 주체성 보다는 인류의 보편성이 중심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국제화도 민족의 존립이 없다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민족의 존립에 근거하지 않은 국제화는 강대국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허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약소국, 약소민족의 평화에 대한 보장 없이 세계 평화를 논하는 것과 같다.
민족 주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하다. 고유 언어와 관습, 같은 경험을 토대로 한 오랜 역사, 동일한 사회 체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민족의 고유한 철학 사상이다. 철학이란 그 민족의 보편적인 사유 체계이며 세계관이다. 그 속에서 그 민족 나름대로 인간을 보는 눈, 자연을 보는 눈, 사회를 보는 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유한 사유 체계를 지니지 못한 민족은 더 이상 민족으로서 존립 근거를 잃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철학사상은 무엇인가? 일찍이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은 한국에는 고유한 철학 사상이 없다는 논리를 펴기도 하였다. 전통 철학의 핵심인 유교 · 불교 · 도교가 모두 중국에서 들어온 철학이므로 한국만의 고유한 사상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 대신 그들은 한국인들이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에만 집착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유교에만 집착했듯이, 새로운 외래 사상이 들어오면 거기에만 몰두하는 고착성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 문화에 맹종해 온 사대성이 한국 사상의 특징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합리화 하려는 억지에 불과하였다.
그 뒤 이 같은 견해에 반대하는 새로운 주장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에는 유교 · 불교 · 도교는 우리의 고유 철학이 아닌 외래 사상이므로 이러한 사상을 제외한 단군 신화와 무속 신앙, 그리고 화랑도만이 우리 철학 사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이와 달리 비록 유교 · 불교 · 도교가 밖에서 들어온 철학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거치면서 우리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철학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은 보편을 추구하는 작업이므로 서양과 동양으로 나누거나 한국 · 중국 · 일본으로 가를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한국 철학이란 한국에서 하는 철학 정도의 의미로서 이 땅에서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하는 철학은 모두 한국 철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위의 세 견해 가운데 첫 번째 견해는 편협한 국수주의에 머물기 쉽다. 또한 이 견해는 한국의 고유한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단군 신화와 무속 신앙, 화랑도 등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찾기 어려우므로 자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추상화 과정이 지나치기 쉬우며, 이러한 공간을 메꾸는 역할을 신빙성 없는 자료에 맡김으로써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가 생긴다. 또한 세 번째 견해는 뿌리가 없는 보편론이 되기 쉽다. 물론 철학이 올바른 삶을 추구하기 위한 것임은 어떤 철학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넓게 보면 동양과 서양은 삶의 경험과 사유체계가 다르며, 좁게는 한국 · 중국 · 일본의 삶의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사유 체계가 다르다. 철학사를 비교해 보아도 이러한 차이는 서로 다른 경향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체적인 토대를 무시하는 논리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한국 철학이라고 규정해야 할 것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어느 민족이나 그 민족만의 사유 체계를 갖는다. 그것은 그 민족이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살아온 자연 조건과 사회 상황 속에서 겪은 체험들을 추상화하고 체계화해 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사유 체계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외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상으로 만들어 가기도 한다. 사실 인간은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체험 세계, 즉 삶의 세계에 나타난 여러 문제들을 안고 고민하면서 나름대로 답을 구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들은 결코 개별 인간의 문제로만 그칠 수 없다. 따라서 개개인의 고민과 해석이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민족 범주의 보편적 공감대를 구성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사유 체계를 이룬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 민족이 만들어 낸 보편적 사유 체계가 바로 한국의 철학 사상인 셈이다. 일한 점을 좀 더 나누어 한국 철학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적 특징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적 특징이란 밖으로부터 똑같은 사상을 받아들이더라도 다른 나라가 받아들인 모습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예를 들면 불고는 오랜 기간을 거쳐 한국적 특징을 지닌 철학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평가를 기반으로 인도 불교 · 중국 불교 · 일본 불교 · 한국 불교를 구분하며, 그 과정에 기여한 인물들을 한국 철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가로 다루는 것이다. 이 점은 유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유학은 일본 유학이나 중국 유학과 다른 발전 과정을 거쳤으며, 그 결과 독특한 사상 체계를 구축하면서 나름대로 역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서양 철학이나 기독교도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적 특징을 띠게 된다면 한국 철학 사상의 범주에 들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앞의 전제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삶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철학 사상이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해도 그것이 이 땅의 삶과 관계가 없는 한 한국의 철학 사상이 될 수는 없다. 그 사상이 뛰어난 중국 철학이라면 여전히 우리가 아는 중국 철학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독일 철학이라면 마찬가지로 독일의 다양한 철학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철학 사상이 우리 사회를 고민하고 우리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도구가 된다면, 그때 비로소 그것은 우리 철학 사상으로 되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는 도구인 동시에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을 때 우리의 철학 사상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불교나 유학이 토착화하는 과정도 이런 과정이었으며, 앞으로 기독교나 서양 철학들이 걸어야 할 길도 이러한 과정이다.
셋째, 과거의 철학이든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인 외래 사상이든 현시점에서 또는 앞으로 우리 철학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민족의 삶에 발전적으로 작용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과거 우리 철학의 한 부분이었던 전통 철학도 오늘 우리의 삶과 무관하다면 더 이상 우리 철학이 될 수 없다. 물론 그 경우 과거 역사 속에서 그 전통 철학이 가졌던 철학사적 기능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삶과 무관할 때는 그러한 철학의 역할이 오늘 우리의 삶을 개선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기 쉽기 때문에, 과거의 긍정적 역할이 오늘의 역할로 아무런 제약 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무엇을 한국 철학이라고 할 것인가를 검토해 보았다. 어느 민족이나 그 민족의 고유성은 고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민족의 고유한 사유 체계는 그 출발점을 고대 신화에서 찾게 마련이다. 고대 신화는 각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며, 삶의 세계에서 이루어 낸 체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긴 역사를 지내 오는 동안 오로지 자기 민족의 독자적인 사상만을 발전시켜 온 나라는 없다. 어떠한 나라든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아 왔으며, 근대 이후부터는 모든 국가들이 엄청난 사상과 문화 교류를 겪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철학 사상을 살피는 일도 일정 부분은 반드시 외래 사상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중국과 밀접한 연관을 지녀 왔으며,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서양 사상과 많은 관계를 맺어 왔다.
그렇다면 외래 사상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우리 철학사의 범주에 들어오게 되는가? 어떠한 경우든 사상은 주입되어서는 안 된다. 주입된 사상의 경우 주입시키는 쪽는 주체가 될 수 있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상은 반드시 주체적 입장에서 섭취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모든 철학 사상은 그 생명이 모방이 아니니 창조에 있다. 물론 역사에서 볼 때 강제적으로 주입된 경우도 있고 모방으로 그친 경우도 있다. 일제 강점하에 상황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주입되거나 모방된 사상은 외적 조건이 없어지면 생명을 잃고 만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두고 한국 사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외래 사상을 창조적으로 우리 토양에 맞게 주체성 있게 변화시켜 수용하는 것은 현대 서양 철학과의 관계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