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해군은 북한군이 창설된 후 일년이 지난 1949년 8월까지도 내무성 산하의 해안경비대로 존속하다가 1949년 8월 20일 민족보위성으로 관할이 이관되면서 북한군 해군으로 공식 발족하게 되었다.

북한 해군 편성
청진기지에 제1위수사령부를, 원산기지에 제2위수사령부, 진남포기지에 제3위수사령부를 두었고, 해군군관학교, 기술훈련소 등을 총사령부 산하에 두었고, 소련의 지원으로 30여 척의 대․소형 함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 병력은 총사령부에 약 1,000명, 원산기지에 4,750명, 청진기지에 3,920명, 진남포기지에 5,000명, 해군군관학교에 500명, 기술훈련소에 200명, 정대에 200명, 총 15,270명이었다.
장비도 초기에는 일본 경비정 및 발동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49년 12월에는 소련군의 군사원조로 대․소형 35척(5,560톤)의 소형함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해군의 면모가 갖추어지자 해군장비와 해군기지를 경비할 목적으로 1950년 5월 중순 원산과 진남포에 각각 1개 대대병력으로 육전대를 신설하였다.
원산기지에 있던 제2위수사령부 직속 육전대는 원산 송도에 1개 대대병력으로 원산기지의 경계업무를 맡아 왔으며 남침이 개시되자 남해여단으로 개편되었다. 한편 진남포기지에 있던 제3위수사령부 직속 육전대도 진남포 기지를 경비하는 임무에서 남침 직전에 북한군 제4사단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50년 5월 1일부터 원산과 진남포의 2개소에 각각 1개 대대 규모의 육전대(한국의 해병대와 동일)를 창설함으로써 총 병력은 15,27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북한군 해군은 6.25당시 동해안의 정동진과 임원진으로, 그리고 남해안의 백령도에 제549 육전대와 유격대를 해상으로 침투 상륙시키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북한 해군군관학교 편성
한편 북한 공군은 ‘조선인민군’ 창군 이후 평양학원 내에 속해 있던 비행대대는 공군의 체계를 갖추기 위한 준비를 하였으며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민족보위성에 배속되게 되었다. 따라서 평양학원이 1949년 1월에 도학리에서 평양 만경대로 이전하면서 제2군관학교로 개편되자 평양학원에 속해 있던 비행대대도 독립하여 평양비행장으로 이전하였다.
평양학원에서 완전 독립한 비행대대는 비행연대로 증편하여 습격기대대, 추격기대대, 교도대대, 후방지원대대 등으로 재편하였다. 비행연대장에 왕연, 지휘부연대장에 이활이 임명되었고, 정치부연대장․기사부연대장 김영수 등은 과거 소련공군에서 복무하던 소련 2세들이 임명되었다. 참모장에는 김만용, 습격기대대장은 최현옥 등이 배치되어 조종사 양성에 주력을 두었다.
소련군 당국은 본격적인 북한공군의 육성을 위해 고문관을 파견하였는데 연대에 수석고문을 두고 각 대대에 2명의 고문관을 배치하여 비행연대의 전반적인 운영관리를 하였고 소련군 정비하사관들은 정비사들을 양성하였다.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 방문시 총 150대의 항공기(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받기로 함으로써 항공부대를 확장하였다. 또한 교육요원 40명을 소련으로 재 파견하기도 하였다.

북한 YAK-9 전투기
북한 공군은 먼저 1차분으로 1949년 8월 중순 IL-10형(전폭격기)과 YAK-9형(전투기) 항공기 총 30대를 지원받아 같은 해 12월에는 항공연대를 항공사단으로 증편하였다. IL-10 전폭격기는 승무원 2명, 중량 6,350㎏ , 최대속도 456㎞/h, 무장 23㎜ X 2, 폭탄 1,000㎏의 제원을 갖고 있었다.114) 그리고 공군부대에서 주로 사용한 무선통신은 RAF 무전기, 폭격기용 무전기, LBM 무전기, US 무전기, 충전기, TAI-43 무전기, 야전전화, PK-30, K-10 무전기 등이었다.

항공사단 편성
이리하여 장비증강과 병력증가로서 드디어 1949년 12월에 비행연대를 항공사단으로 증편하기에 이르렀다. 사단편제를 보면 추격기연대, 습격기연대, 교도연대, 공병대대로 편성되었고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공병대대는 3개 중대로 조직되어 주요 항공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사단사령부는 평양비행장, 습격기연대는 연포 및 평강기지, 추격기연대는 평양 및 신막기지, 교도연대는 연포기지 등에 각각 배치되었다. 사단장에 왕연, 비행부사단장에 이활이 각각 임명되었다.
습격기연대의 임무는 야전 비행장으로부터 2대씩 이륙하여 편대를 이루고 단 전투대형을 형성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순환 전투대형으로부터 항공기 1대씩 급강하하여 폭탄을 투하하거나 기총사격을 실시하며, 통상적이 기상조건하에서 주간에 중·저고도로 편대를 이루어 항로 비행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추격기연대는 제한된 규모의 비행장에서 2대씩 편대를 이루어 집단 전투대형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고, 폭격기들을 동반하여 항로비행을 실시하며 편대단위로 중고도에서 육안정찰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통상적인 기상조건하에서 주간에 중고도로 편대를 이루어 항로비행 및 공중전 수해훈련을 실시하며 비상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비상출격을 실시하고 매복 비행장으로부터 적 비행기에 대처할 작전능력을 배양하는 것이었다.
사단사령부를 평양비행장에 두고, 비행 행동반경을 넓히기 위하여 대남공격기지를 38선 근처인 평강 및 신막에 비행장을 신설하여 습격연대는 연포 및 평강기지에 배치하고 추격기연대는 평양 및 신막 기지에 각각 설치하였다. 그리고 교도연대는 습격기연대와 같이 연포비행장에 있었는데 이것은 순전히 조종사와 정비사 교육을 시키는 훈련부대인 것이다. 그래서 동 연대 내에 이론교육대대와 YAK-18 교육대대가 있어 전투병력 증가에 주력을 두었다.
동년 12년 월말에 비행사단으로 확장하는데 따르는 항공관계병력을 보충하는 동시에 소련에서 북한군 조종사와 정비사들을 양성하였다. 동년 10월에 졸업한 제1기생들은 비행시간이 40시간 정도였으며 겨우 조종할 정도였다. 이들이 졸업하자 성적이 우수하고 소위 당의 열성분자 40명을 선발하여 소련 우라실로프에 유학을 보내어 습격기 조종과 추격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한편 교관들도 소련 키에프(Kiev)에 있는 연합공군사령부에 보내어 지휘관과정을 받고 1949년 말 입북(入北)하였다.

6·25 당시 운용된 IL-10 전폭기
이리하여 1950년 4월부터 IL-10, YAK-9 등 약 60대를 새로 소련에서 지원을 받아 추격기연대와 습격기연대에 배치하였고, 동년 6월 18일 남침을 1주일 앞두고 소련에서 연포비행장에 IL-10, 60대를 소련군조종사들이 직접 몰고 와서 인도해주었다. 주공격전력인 야크전투기와 일류신폭격기는 제트기의 출현 이전에는 상당히 우수한 항공기로 평가되고 있었다.
1950년 4월에 들어서 북한의 비행사단에 소련제 작전용 항공기가 대거 지원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소련은 1949년 3월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는 공군전력 지원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따라서 북한 공군은 1950년 봄까지 편제상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군병력도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되었다. 조종사와 정비사 등이 소련의 공군기지와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이수하였다. 당시 이들은 평양을 비롯하여 신의주․안주․청진․연포․평강․신막 등 10여개 기지를 운용하였다.
북한 공군은 1950년 6월 25일 현재 IL-10 62대, Yak-3 Yak-7B 70여대, 전투기 132대, 수송기 30여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연포(신포)비행장에 YAK-7B, 10대, YAK-11 12대, IL-10 18대 그리고 신막비행장에 YAK-7B 10대, IL-10이 2대, 평양비행장에 YAK-7B 20대, YAK-11 2대, IL-10 48대 총 122대가 배치되었다. 습격기연대는 연포비행장에 배치되었고 추격기연대는 평양 및 신막비행장에 배치되어 전투비행사단의 규모로 편성되었다. 주로 훈련은 신의주비행장에서 YAK기로 전투비행훈련을 실시하였고 북한 비행군관학교 생도들의 훈련은 평양비행장에서 소제연습기 Y-2형과 YT-2형으로 조종훈련을 실시하였다.
북한군 공군의 전투기 총 수를 보면 YAK형 100대 중 60대는 훈련기(물론 전투기로 사용도 가능하다)이고 40대가 전투기이다. 그리고 전폭기(IL형) 70대와 정찰기 10대를 합하면 실 전투기 총 수는 120~180대 정도의 규모이다. 이 전투기 총 수가 지상군의 전차와 보병 10개 사단에 비교해 보면 소련이 북한 공군에 대해서는 제한된 지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한국 공군의 열세한 전력(연락기 22대 보유)에 비해서 그 이상의 공군력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였으며 전차부대를 보유한 북한의 지상군만으로도 충분히 남한을 석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소련은 북한 공군이 막강한 공군력을 갖춘다면 일본까지 공격하게 되어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소련 특별군사사절단의 자칼로프 장군의 지적에 잘 드러나 있다. 즉, 그는 북한에 강력한 공군을 창설하지 않은 이유를 “만일 인민군이 강력한 공군력과 유수한 기갑부대를 함께 보유한다면 부산 뿐만 아니라 한국해협을 건너 대마도 나아가 사세보까지 갈 지 모른다. 우리는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기본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