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하순 이후 각 보안대 창설과 함께 북한의 동서해 각 해안지대에는 북한 해군의 모체인 수상보안대가 조직되었다. 그 후 1946년 7월 원산에 수상보안대 사령부를 정식으로 설치하면서 동서 양 해안에 각각 1개 대대 규모의 동해 수상보안대, 서해 수상보안대를 예속시켰다.
수상보안대 사령부는 창설 1개월 후인 1946년 8월에 동서 해안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평양으로 이동하여 사령부를 확장하였고, 동년 12월에는 수상보안대를 해안경비대로 개칭하였다. 동해 수상보안대 예하에 속초(束草), 장전(長箭), 서호진(西湖津), 신포(新捕), 고저(庫底) 등의 7개소에 동해 수상보안지대를 설치하였다가 원산․경비위수사령부로, 서해 수상보안대는 진남포 경비위수사령부로 각각 개칭하고, 청진에 추가로 청진 경비위수사령부를 신설하였다.
해안경비대의 초기 간부 충원은 평양학원과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출신자였으나, 해상 근무에 대한 전문지식의 부족으로 근무 중에 많은 기술적 문제가 야기되자 1947년 7월 8일에 해안경비대 간부를 양성하는 해안경비대 간부학교를 창설하여 항해, 기관, 함상포, 해안포 등에 대한 전문 기술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학교가 장차 인민해군 군관학교의 모체가 된다. 해안경비대는 북한군이 아닌 내무성 관할하의 해안경비대로서 존속하고 있다가 1949년에 가서야 민족보위성 예하로 예속변경(1949년 8월 20일부)되면서 북한군 해군으로 발족하게되었다.
해안경비대는 내무국의 관할 아래 놓여 있었으며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의 창설시 6천여명으로 증강되었다. 교육기관은 1947년 6월에 해안경비대 간부학교가 설치되었으나 ‘조선인민군’이 창설되면서 북한군 해군군관학교로 개칭되었다. 병력보충은 지방당원 또는 당 간부의 추천에 의하여 모집하였고 교도대에 입대시켜 사상교육과 제식교련 전투훈련, 사격술 등을 연마시켰으며, 1947년 5월에는 대원을 200명에서 400명으로 증가시켰다.
그동안 해안경비대의 간부들은 평양학원 단기출신과 북조선중앙간부학교출신들을 임용하여 배치하였으나 기술문제가 대두하게 되자 해안경비대 간부학교를 1947년 6월 16일 원산에 신설하였다. 이것이 다시 발전하여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의 창설에 따라 병력도 6,000명으로 증가되고 간부학교도 북한군 해군 군관학교로 개칭되면서 원산에다가 훈련소만 남기고 청진시 신암동으로 이전하였다. 초대교장에 김광연 소장, 부교장에 김원무, 기술부교장(성명 미상), 군사부교장(성명 미상), 후방부교장(성명 미상), 정치부교장 소정철 총좌가 각각 임명되었다.
해군군관학교 내에 기술훈련소를 설치하고 초대소장에 김엽 중좌, 후방부소장(성명 미상), 교육부소장 서덕철 중좌, 군사부소장 김명호 총위, 정치부소장 김웅빈 상위가 각각 임명되었다. 1949년 9월 제1기생 250명이 1950년 5월에, 제2기생 750명이 각각 졸업하고 기술병도 배출되었다.
한편 북한 공군은 1945년 10월 25일 발족한 신의주 항공대로 출발하였다. 실제, 신의주 항공대의 시발은 1945년 9월부터였고, 1945년 10월 25일은 신의주항공대 제1기생의 입대일을 기준한 것이다. 신의주항공대는 일본 나고야(名古屋) 항공학교 출신인 이활(李闊)과 중국 비행학교출신 왕연(王連)이 중심이 되어 임운봉(林雲峯), 김명하(金明河), 강대용(康大鏞), 윤응열(尹應烈), 이세영(李世英), 이영일(李英一) 약 50여명을 규합하여 일본 항공학교 출신 20명과 중국 비행학교 출신 약 10명, 만주군 출신 및 기타 각 항공계에서 근무한 기술자 20여명을 포함한 약 50여명이 주동이 되어 당시 소련 점령군 사령부의 승인을 얻어 민간조직 기구로 신의주에서 발족하였다.
이활은 신의주에 소년항공대(少年航空隊)를 조직하면서 평양 대동문 옆에 민간항공협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과거 항공계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자들을 규합하여 입대시키기 위한 사전준비였다. 이활은 제2차대전 종전 당시 비행시간 2,000시간의 기록을 가졌고 북한 항공계에서는 가장 비행기록이 많은 인물이었다. 신의주비행장 소련공군 주둔사령관 막시노프 소좌는 북한의 각 비행장에 있는 사용 가능한 95식 고급연습기(구 일본군비행기)를 모아 신의주항공대에 인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평양을 비롯한 함흥, 청진, 회령 등 여러 곳에 조선항공협회(朝鮮航空協會)를 결성하였는데, 이를 북한의 공식 전사기록에서는 항공기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항공계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자들을 규합하여 신의주 항공대에 입대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민간 조직체인 신의주 항공대를 장차 북한 공군의 창설 모체로 이용할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신의주항공대의 편제는 조종교육대, 정비교육대, 통신교육대로 편성되었다 항공관계에 경험이 있는 자와 학력이 우수한 자 80명을 선발하여 입대시켜 본격적인 교육에 임했다. 이들이 인계받은 일본제 95식 고급연습기 3대를 수리하여 동년 11월에 신의주, 평양, 정주, 진남포, 청진간 비행훈련을 개시하였다.
당시 이 신의주항공대는 공산당과 소련군사령부와는 관계없이 이활을 중심으로 한 순수한 민간성격을 띤 항공대였다. 신의주항공대가 발전함에 따라서 소년항공대는 이미 흡수되고 말았고, 한편 소련 군정당국과 북한 공산당은 점차 정치적으로 개입하여 신의주항공대 간부들에게 민청에 가입토록 강요하였을 뿐 아니라 북한에 진주하고 있던 소련공군 맥심 소좌를 신의주항공대에 초대 고문관으로 취임시켜 이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제1기생으로 입대한 인원은 전국 각지의 조선항공협회 회원 및 열성분자 중에서 학력이 우수한 80명을 선발하여, 조종과에 30명 정비과에 30명, 통신과에 20명을 각각 입대시켰으며, 동년 2월 23일에 제2기생 160명을 모집하였다.
그간 일본, 중국, 소련 등지에서 귀국한 항공관계자들이 입대하여 인원이 400명에 이르게 되자 훈련장소와 경비관계로 1946년 5월에 신의주에서 평양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평양으로 이동한 신의주항공대는 1946년 6월에 제2기생이 졸업하고 이어 제3기생을 모집하였다. 1946년 2월 23일 제2기생 160명이 입대했을 때는 신의주 항공대 총 인원이 400여명으로 늘어나 시설과 훈련장이 부족하여 1946년 5월에 평양 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평양 비행장으로 이동한 신의주 항공대는 그 다음 달인 1946년 6월 26일에 제2기생을 졸업시킨 후 평양학원의 항공중대로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간단체 성격의 신의주 항공대는 군사조직의 평양학원 항공중대로 변모하였다.
신의주 항공대가 평양학원에 편입된 직후인 1946년 6월 26일 평양학원 정규과정 제1기생 800명의 입교 인원 중에는 항공중대 제1기생으로 100명이 포함되어 훈련을 받고 1947년 10월 5일 500명을 대량 입교 졸업시켰다. 평양학원내에 훈련용 활주로가 있었고, 종전에 사용하던 일본제 95식 고급연습기 3대만으로 훈련하였다. 그들은 주로 이론교육에 치중하였고 자연 1기생 졸업이 늦어졌다.
1947년 5월 17일 인민집단군 사령부가 창설됨에 따라 평양학원 항공중대의 기간요원과 항공과 요원들을 기간으로 하여 1947년 8월 20일 정규 비행대를 창설하고 평양학원에서 독립하여, 집단군 총사령부 예하의 항공학교 체제에서 정식 항공부대로 승격하게 된 것이다. 항공과장에 왕연, 부과장에 이활이 부임되었다. 비행훈련은 연습기의 부족으로 지연되었으나 반면에 사상교육과 기술이론교육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북한은 이 날을 기념하여 1982년 이래로 8월 20일을 ‘공군절’로 제정하여 기념행사를 실시해 오고 있다. 북한군이 건군되던 1948년 2월 8일 비행대대로 증편되었다.